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55)- 긴 장마 동안 오매불망 필자를 기다렸던 차산
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55)- 긴 장마 동안 오매불망 필자를 기다렸던 차산
  • 조해훈1 조해훈1
  • 승인 2020.09.29 18:09
  • 업데이트 2020.09.29 18: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돌담 넝쿨식물 등 걷어내고 주변 청소
지루한 장마 그치자 오랜만에 차산행
억새와 가시넝쿨 등이 차나무 뒤덮어

사람이든 동물이든 간에 오랜만에 만나보면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상(對象)인 ‘나’를 기다린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보기 좋은 어떤 다른 대상이 나타나더라도 ‘나’ 외에는 제 생각 밖으로 밀어낸다. 더구나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주고 보살펴준 그 마음을 기억하는 경우는 그 정도가 더욱 깊다.

필자는 돌담장의 넝쿨식물 및 다양한 풀 등을 걷어내고 텃밭과 마당의 풀을 정리하는 등 집 안팎의 자잘한 일을 며칠 하다가 이제는 더 이상 비가 오지 않을 것 같아 오늘 낫을 들고 차산에 올라갔다. 장마가 시작되고 며칠 전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곳 지리산 화개동에는 지겹도록 비가 내렸다. 급기야 화개장터 인근을 모두 침수시키고 난 뒤에도 큰 비는 아니지만 하루라도 내리지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날 것처럼 퍼부었다.

필자의 거주지이자 강학공간이 목압서사의 돌담을 정리했다. 사진=조해훈
필자의 거주지이자 강학공간이 목압서사의 돌담을 정리했다. 사진=조해훈

날이 밝자마자 필자의 거주지이자 강학공간인 목압서사 앞의 광장까지 나가 길가의 풀을 뽑고 담배꽁초 등을 줍는 등 추석맞이(?) 청소를 한 후 아침을 조금 뜬 후 차산으로 올라갔다. 그토록 비가 많이 내렸으니 보나마나 필자의 차산은 거의 정글화 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도재명차 김종일 사장이 그의 부모님 산소가 위쪽에 있어서인지 예초기로 그곳으로 가는 길의 잡초를 베어놓았다. 산소는 왼쪽으로 꺾고 그 위쪽으로 계속되는 산길 왼편은 윤도현 어르신의 고사리밭이고, 오른편은 도재명차의 차밭이다.

여기를 지나면 위쪽으로 필자의 가파른 차밭이 시작된다. 풀과 가시식물, 고사리 등으로 뒤덮여 길이 사라지고 없다. 여기서부터는 필자 외에는 다니지 않아 필자의 발자국만으로 길이 만들어진다. 잡풀을 베어 길을 만들면서 올라갔다. 차밭에 이르니 예상했던 대로 차나무는 보이지 않고 정글이 되어 있었다. 순간 필자는 “그동안 비 핑계로 차산에 올라오지 않았더니 얼마나 내가 그리웠으면 이런 식으로 해놓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화가 나면 온 집안에 화장지를 물어뜯어 어지럽게 해놓지 않던가.

사실 필자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차산에 올라가 살다시피 하다가 한동안 오지 못했으니 차나무들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차나무 사이로 억새와 가시넝쿨들이 필자의 키보다 더 높게 자라있었다. 필자의 손길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어찌해야 될지 몰라 멍하니 차산의 정글을 보다가 맞은편 황장산의 구름을 보았다. 그러다 필자의 따스한 손길을 알고 있는 이것들을 빨리 만지기로 하였다.

올해 장마가 길어 정글이 되어버린 차산의 풀을 베다 잠시 쉬고 있는 필자. 사진=조해훈
올해 장마가 길어 정글이 되어버린 차산의 풀을 베다 잠시 쉬고 있는 필자. 사진=조해훈

웃자란 억새와 가시넝쿨들을 베면서 한 걸음씩 전진하는 게 힘들었다. 차나무도 옆으로 덩치를 키운 상태였다. 어차피 내년 봄 곡우 무렵 첫차를 딸 때까지 이것들을 정리하고 보살펴야 한다. 마치 끝 모를 시간이 앞에 놓여있는 것 같았다. 모기떼들은 얼굴을 물어뜯고 땀은 비 오듯이 흘렀다. 차나무 정리는 차후에 할 생각이었다. 몇 미터 나아가지 못했는데 점심때가 되었다. 물 한 병도 갖고 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내려가야 했다.

산에서 일할 때는 못 느꼈는데 집으로 내려오는 동안 땀에 젖은 옷에서는 쉰내가 진동하였다. 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쉬었다가 수돗가에 있는 숫돌에 낫을 갈아 또 차산으로 향했다. 윤도현 어르신 고추밭 앞에서 시내 다리를 건너 도재명차 위쪽으로 해서 움막으로 들어갔다. 슬레이트 지붕과 철골 뼈대만 남아있는 움막에 대나무가 또 여러 개 자라있었다. 대나무를 잘라내려고 안쪽으로 들어가니 비가 많이 온 탓에 바닥이 꿉꿉한데 그곳에 염소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있었다. “그러면 그것들이 가끔 움막에 온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드넓은 지리산에서 마음껏 풀을 뜯어먹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며 방사를 해준 염소 두 마리가 아니던가. 혹시나 그것들이 오면 먹으라고 소금을 매달아 놓았다. 소금 아래에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결코 멧돼지 발자국은 아니다. 이 골짜기 여러 곳에서 멧돼지 발자국을 숱하게 봤기 때문에 그야말로 척보면 안다.

차산 아래쪽 움막 안에 찍혀 있는 염소발자국. 얼마전 드넓은 지리산에서 마음껏 자라라고 염소 두 마리를 방사했는데, 그들이 와서 매달아둔 소금을 먹은 흔적인 것 같다. 사진=조해훈
차산 아래쪽 움막 안에 찍혀 있는 염소발자국. 얼마 전 드넓은 지리산에서 마음껏 자라라고 염소 두 마리를 방사했는데, 그들이 와서 매달아둔 소금을 먹은 흔적인 것 같다.
사진=조해훈

여하튼 움막 안의 천장 꼭대기에 키가 닿아 구부러져 있는 대나무를 한 개씩 잘랐다. 열댓 개쯤 되었다. 해마다 움막 안에 자란 대나무를 자르지만 힘들다. 한 개 자르고 좀 쉬었다가 또 한 개 자르고 쉬고를 반복한다. 곡괭이를 사 움막 안 바닥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만 해왔는데 이번에는 실행에 옮길 참이다.

오후 5시 넘어 차산에서 내려와 외출 하기 전에 얼른 숫돌에 낫을 갈아놓았다. 사진=조해훈
오후 5시 넘어 차산에서 내려와 외출 하기 전에 얼른 숫돌에 낫을 갈아놓았다. 사진=조해훈

움막에서 나와 차산으로 올라가면서 도재명차에서 낸 길을 필자는 낫으로 정리를 하면서 더 넓혔다. 억새와 대나무가 많아 역시 쉽지 않았다. 땀이 비 오듯 했다. 벌써 오른쪽 손목이 아려온다. 가을 햇살까지 강렬하다. 김 사장의 부모님 산소로 가기 위해 왼쪽으로 꺾는 곳까지 낫으로 정리를 하다 보니 벌써 오후 다섯 시가 넘었다. 손님이 오기로 해 빨리 집으로 내려가야 하지 않는가. 집에 와 젖은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어제 베어 마당에 뒹굴고 있는 덩치 큰 까마중의 줄기를 잘라 말려야만 차를 만드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글렀다. 얼른 낫을 갈아 숫돌 옆에 두고 외출할 준비를 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massjo@hanmail.net>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