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아름다운 노랫말⑮ 이미자의 〈아씨〉
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아름다운 노랫말⑮ 이미자의 〈아씨〉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0.11.08 17:34
  • 업데이트 2020.11.08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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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제1148호(2020.11.9)
간월산 노을
간월산 노을

<아씨>는 1970년대 처음으로 TV연속극이 나오던 시절 전국민을 밤마다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들여 문단속은 잘 했는지, 수도꼭지는 잘 껐는지 자막으로 안내를 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일일연속극의 효시입니다.

줄거리는 1940 왜정시대에서 해방을 맞고 6.25 동란을 거치며 몸종까지 거느리고 시집온 양반집 <아씨>가 바람둥이 시아버지와 남편의 2대에 걸친 축첩(畜妾)과 시어머니의 박대, 가세의 몰락, 전쟁의 혼란 속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낙선하고 병사한 남편 대신 첩의 자식까지 키우며 꿋꿋이 가정을 지키며 자신의 소임을 다 했습니다. 그렇게 곱게 늙어온 아씨가 꽃가마를 타고 말 탄 서방님을 따라 시집오던 길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간  옛날을 회상하는 내용입니다. 

그 위에 신이 내린 목소리 이미자의 주제가가 금상첨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이 노래를 아름다운 노랫말에 뽑게 된 것은 복사꽃 곱게 피어있던 길의 감미로운 가사내용도 있지만 그렇게 고생한 아씨가 옛날의 아름다운 과거는 소상히 회상하면서도 자신이 걸어온 40, 50년의 그 쓰라린 간난신고의 아픔을 구체적으로 단 한마디도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한 세월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극히 담담하게 끝을 맺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나이든 여자를 보통 여사(女史)라고 부르는데 이는 곧 <여자의 역사(歷史)>의 준말로서 머리가 하얗게 쇤 여자라면 꿈같은 소녀시절과 설레는 사춘기와 결혼에 이어 진통과 성취로 이어지는 출산과 양육, 먹고살기 위한 생업과 부엌일을 비롯한 부도(婦道)에 남편과의 사별...

명색 몸종을 거느린 아씨가 남편으로 부터 사랑도 받지 못하고 시어머니의 냉대 속에 첩의 자식까지 기르며 집안의 몰락과 전쟁의 이산(離散)을 겪으면서도 그 많은 사연을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한 평생 다 하여 돌아가는 길>로 묻어버리고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라는 짧은 소회(所懷)로 마무리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한 많은 평생을 축약한 그 <노을>이라는 단어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노을은 날마다 한 번씩 죽어가는 태양이 피우는 꽃, 저녁하늘의 꽃인  것입니다. 산과 들에 수많은 꽃이 피지만 태양만큼 크고 화려한 꽃이 없고 수많은 꽃이 지지만 노을만큼 붉고 선명한 죽음이  없으니 노을은 공간적으로 이 세상, 시간적으로 이승에서 가장 화려한 주황빛의 설움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의 작사가나 가수 이미자가 노을을 단지 그렇게만 생각했다면 이 연속극이나 노래가 그렇게 구슬프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노래에서의 노을은 사실 매일 죽는 태양의 죽음이 아니라 하룻밤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 매일 다시 태어나는 여명의 빛, 바로 끝없이 이어지는 우주의 순환과 생명을 긍정하고 예찬하며 그래서 자신이 살아온 한 세상도 아름답고 다음 세대도 그렇게 이어지리라는 가장 동양적이고 여성적이면서도 섬세한 철학과 인간애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지금 연재하는 한 20곡의 노랫말 중에서 단 한 줄로 잘 압축된 가사를 뽑으라면 저는 단연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를 뽑고 싶습니다. 노을이란 의례 슬픈 것, 그래서 자신의 고달픈 생애도 노을과 같다고 수용해 그 서러운 노을마저 아름다움으로 승화(昇華)시키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여기에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미자의 가창력입니다. 저는 이미자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장 한국적인 정서와 멜로디가 신이 창조한 여가수를 이미자를 통해서라야 비로소 발현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요 백년사에 별별 대단한 가수가 나오지만 지금껏 산을 노래하면 그 목소리에 복사꽃이 피고 뻐꾸기를 노래하면 눈물이 돋고 이별을 노래하면 밤하늘의 별들이 모두 서러운 눈빛으로 변하는 노래, <해당화> 단 세 자만 들어도 갈매기 울고 동백꽃 피어나는 섬마을이 펼쳐지는 그런 마성(魔性)의 가수는 없었으니까요. 소위 가왕이니 절창이니 하는 조용필이나 나훈아가 온몸의 힘과 정기를 모아 쥐어짜듯 노래를 하는데 비해 마치 이야기라도 하듯 나지막이  풀어가는 이미자의 조용한 노래에 그렇게 드넓은 세상이 펼쳐지고 온갖 감회가 다 밀려오다니 말입니다.

저는 외침과 전쟁과 가난으로 점철 된 20세기의 고단한 대한민국에 신(神)이 딱 두 가지의 선물을 주었는데 하나는 북의 김소월이요, 또 하나는 남의 이미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그 뉘도 흉내 낼 수 없는 천의무봉의 시와 노래, 우리는 김소월과 이미자가 있어 행복한 민족인 것입니다.

아씨 / 작사 임희재, 작곡 백영호, 노래 이미자 

옛날에 이 길은 꽃가마 타고
말탄 님 따라서 시집 가던 길
여기던가 저기던가
복사꽃 곱게 피어 있던 길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옛날에 이 길은 새 색시 적에
서방님 따라서 나들이 가던 길
어디선가 저만치서
뻐꾹새 구슬피 울어대던 길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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