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불황의 시대 코스모스
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불황의 시대 코스모스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0.11.13 13:48
  • 업데이트 2020.11.13 13: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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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제1154호(2020.11.15)
월중순 성긴 코스모스 밭
9월 중순 성긴 코스모스 밭

굳이 사춘기의 소녀가 아니라도 우리는 한여름이 가고 소매 끝에 선들선들해지는 초가을이 되면 문득 코스모스를 떠올리게 됩니다. 빨갛게 익어가는 감과 사과, 누렇게 물든 황금들판의 풍요와 수확의 기쁨 뒤에 감춰진 또 다른 가을의 얼굴, 소슬한 가을바람과 드높은 하늘과 차가워지는 이슬과 풀벌레의 애잔한 울음소리의 장본(張本)인 단풍과 낙엽과 쓸쓸한 회갈색 벌판위로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

짧게 기쁘고 길게 슬픈 가을의 전체 이미지 중 우리의 가슴을 가장 쓸쓸함과 외로움으로 채우는 것은 단연 코스모스가 으뜸입니다. 그리고 코스모스가 필 때쯤 절정을 이루다 코스모스 꽃이 지면 함께 사라지는 고추잠자리... 

그런데 올해는 장마가 길어져 가을이 오는 둥 마는 둥 한데다 초가을에 태풍이 세 개 나 밀어닥쳐 온갖 과일이 다 낙과하고 황금벌판의 벼도 타작을 하면 수확량이 많이 떨어져 농민들이 가을의 풍족함을 별로 느끼지 못 하는데 이는 코로나19의 공포에 시달리는 소시민과 그로 인해 도무지 장사도 취업도 안 되는 시장상인과 취업준비생들의 메마른 가슴과 함께 근래에 가장 황량한 불황의 가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9.18 가을이 오는 길목에 찍은 코스모스의 사진을 보면 전체적으로 생육이 부진하고 꽃송이도 드물며 색깔도 별로 화려하거나 안타까움이 묻어나지 않아 가녀린 소녀의 어깨나 목덜미나 먼 도회나 미래를 꿈꾸는 몽롱한 눈빛의 소년의 마음바탕, 달콤하면서도 애달픈 그런 감상적 느낌이 없고 고추잠자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10월 초 간신히 제 모습을 갖춘 코스모스

그래서는 국민애창곡 김상희의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을 절로 흥얼거릴 분위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멀쩡한 사람도 코로나니 불경기니 가슴이 답답한 판에 명촌리의 병든 늙은이라고 다름이 있겠습니까? 하루하루 살아 눈을 뜨는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발바닥이 부르터서 걷기도 힘들고 위장장애로 배는 고픈데 밥상을 쳐다보기만 해도 겁이 더럭 나고 앉았다 일어서면 어지럽고 오르막을 오르면 숨이 차 다른 건 몰라도 의욕 하나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저도 이제 많이 기가 죽고 말았습니다. 어떤 날은 이렇게라도 하루하루 눈을 뜨는 것이 과연 축복인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늘 현실, 아직은 조금도 더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추스립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와 면도를 하고 조금 밖에 못 먹는 식사도 그르지 않고 오전에는 글로 좀 쓰고 오후에는 짧은 거리라도 산책을 하며 아직도 살아있음을, 그래서 언젠가는 다시 건강하게 고래뜰을 걸어갈 날을 꿈꾸며 저만큼 앞의 곡각지에서 뒤쳐진 할아버지를 기다리다 너무 늦으면 슬그머니 뒤돌아 다시 내게 돌아오는 마초를 따라 아주 조금씩 천천히 걷습니다.

첫 번째 사진은 지난 10월 5일 간신히 연분홍 제 색깔을 내며 피어있는 한 무더기의 코스모스를 발견했는데 올해 그 긴긴 장마와 태풍으로 물에 쓸려 도로가 일부 무너진 자갈밭귀퉁이에서 간신히 꽃을 피워낸 소녀가장 같은 모습이었지만 올해 들어 가장 예쁜 코스모스, 코스모스다운 코스모스를 발견했다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홍수에 쓸린 자갈밭이라  그런지 고추잠자리는 없었습니다.

10월 말 불황처럼 스산한 코스모스 꽃

그러나 문득 우리집 대문에서 초록색 펜스를 따라 한 줄로 쭈욱 심어 논 코스모스가 생각나 집에 돌아오자 말자 확인을 했습니다. 올해는 날씨도 궂은 데다 바로 앞 도로에 도시가스배관 공사를 한다고 중장비가 들어와 땅을 헤집어서 그런지 2,30포기 심은 코스모스 중 대문기둥에 붙은 것 딱 세 포기만 피었습니다. 펜스에 걸린 시화와 그런 데로 어울리는 것 같지만 보통 한 무리의 코스모스에 수천, 수만 개의 꽃이 피고 연분홍, 진분홍에 보라, 주홍, 주황, 적색으로 무리지어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흘러가던 꽃의 물결의 분홍빛 단일색이라 격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럭저럭 가을이 다 저문 10월 30일 모처럼 마초를 데리고 길을 나서 무슨 미련처럼 몇 송이 성긴 꽃송이를 매난 코스모스를 발견했는데 뿌리와 줄기부분이 누렇게 퇴색하여 애련한 코스모스가 아닌 서글픈 코스모스로 다가 왔습니다. 꽃과 곡식이 다들 아름답고 풍성해야만 시절이 좋아지고 시절이 좋아야 사회가 발전한다고 하는데...

아무튼 이 불황의 가을에도 코스모스는 명목을 이어가고 마초할배도 그 꽃을 보며 아직도 살아있음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가을이 가고 있습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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