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지나간 가을의 추억과 흔적
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지나간 가을의 추억과 흔적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0.11.25 17:07
  • 업데이트 2020.11.25 17: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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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제1166호(2020.11.26)
 사진1 꽃무릇과 일일초, 달리아 등걸이 어울린 화단(9. 15) 
상사초(꽃무릇)과 일일초, 달리아 등걸이 어울린 화단 

오늘이 11월 26일 이제 올해의 가을도 몇 밤 남지 않았습니다. 생각날 때 마다 여기저기 써두는 문서 폴더를 뒤지다 가을 중에 쓰긴 했지만 그리 예쁜 글이 아니라 그냥 넘어갈 번한 포토에세이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막상 버리기도 아까워 아쉬운 대로 올려봅니다.

1. 상사초, 얼마나 기다려야 사랑을 얻을까?
 

올해도 상사화(相思花)로 불리는 <꽃무릇>이 피었습니다. 무엇이 그리 바빠서 줄기도 잎도 없이 꽃대만 길쭉하게 피어 가을들녘 전체를 분홍색으로 펼쳐가는 꽃 무릇, 그 끝없이 번져가는 사랑의 세레나데(원래 서양의 목동(牧童)들이 해질 녘에 양떼를 몰고 오면서 마을에서 기다리는 아가씨를 위해 부른 노래라 함)처럼 번져 가는데 옆자리에 가득히 핀 희디흰 일일초가 마치 소금 꽃이 한창 피어나는 소금밭에 달빛이 비친 듯 차갑고 처연한 얼굴로 

“사랑 그거 별거 아니야. 나는 봄부터 초가을이 되도록 열심히 잎을 피우고 꽃봉오리를 피우는데 벌, 나비들은 몽땅 색깔 좋은 상사화나 봉숭아 쪽으로 가버리고 나는 늘 달빛 아래서 혼자 늙어가곤 하지. 오죽하면 마초할배가 날 <소박맞은 아낙의 꽃>이라고 했을까?”

하고 툴툴거리는데 늦봄에서 여름까지 주먹만 한 꽃송이에 붉고 흰 방사선 무늬 눈을 어지럽히며 파우스티나의 뜰을 이끌어오던 달리아가 말라버린 시꺼먼 대궁이 하나가

“에라이, 젊고 철없는 것들. 뭐 사랑이 그립고 가슴 뛰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사랑이란 오래 기다려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거야. 피어난 꽃이 떨어지면 다시 한해를 기다리면 또 다른 꽃이 되고 벌, 나비가 올 일, 괜히 저 외로운 시인 마초할배처럼 끙끙 앓지마. 그냥 나처럼 조용히 썩고 무너지고 세월 속에 함몰되면 돼.”

똑 부러지게 결론을 내리자 다시 뜨락이 조용해졌습니다.

2. 일천 송이의 천일홍, 그 두 곳의 천 송이가 지기까지는?

사진3 금방 베어진 변씨댁 할머니가 논두렁에 심은 천일홍.(8. 30)
금방 베어진 변씨댁 할머니가 논두렁에 심은 천일홍

부지런한 농부의 아내이자 벼나 참깨를 멍석에 늘어 말리며 깜짝 놀라도록 아름다운 판화를 만들어 보이는 변씨댁 아주머니(약75세)가 올해는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매번 참깨를 심던 논둑을 묵히더니(봄에 아팠는지도 모름) 늦은 봄에 천일홍 씨를 뿌려 논둑가득 진자주색의 꽃송이가 피어났습니다.
 
한 곳에만 천개의 천일홍이 심겼으니 두 곳이면 그 두 곳의  천일홍이 피었다 지는 시간이 (1,000*1.000*2)=2백만 일 동안이 이 되는데 올 가을 내내 오가며 느긋이 즐기려는 저와 마초의 꿈은 그만 한방에 날아가고 만 백일몽이 되었습니다. 날씨가 꾸물거려 두 마리 소를 키우기가 힘든 할아버지가 저전거 위에 소쿠리를 싣고 쇠꼴을 베러가다 너무 힘이 들자 가까운 아내의 꽃밭에 낫을 들이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초와 저는 겨우 한 닷새만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화무십일홍도 아닌 200만 송이의 <5일홍>, 명촌리의 달력은 좀 이상한 모양입니다. 1천*1천*2가 겨우 5니까,  해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요즘 자꾸만 머리가 빠려 허전해지는 이마를 쓸며 요즘 이틀에 한 번씩 하는 면도도 사흘에 한 번씩하기로 했습니다. 세월은 자라는 어린이나 청년에게는 더 이상의 축복이 없지만 늙고 병든 사람에게는 어떻게도 감당이 안 되는 아픔인 것입니다.

사진2. 가을이 깊어야만 황금빛 제 빛깔이 나타나는 메리골드 꽃(10. 31)
가을이 깊어야만 황금빛 제 빛깔이 나타나는 메리골드 꽃(가운데 노란색 꽃)

3. 서양봉숭아와 물봉숭아

올해는 장마가 길어서인지 여름한철을 붉게 태우는 봉숭아가 우리 손녀들 손톱에 물 한번 들일 틈도 없이 녹아버리고 지금쯤 한창 가을의 노래로  불릴 김상희의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의 코스모스도 제정신을 못 차려 꽃이 핀 곳이 거의 없습니다. 
 
대신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 접사꾸라(왕벚꽃)같은 두툼한 서양봉숭아의 꽃송이가 올해 급조한 우리 새 화단에 만발 뭔가 버성기고 눈에 차지 않습니다.

또 보통 한 송이가 철심을 넣은 공작부인의 치맛자락처럼 폭 1미터가 넘고 자줏 빛과 노랑 빛이 세로 줄로 피어 요염함을 자랑하는 메리골드의 꽃, 꽃 한 포기에 몇 백 또는 몇 천  이가 피는 꽃송이가 겨우 다섯 개 달리지도 않고 활짝 피지도 못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올해는 장마가 잦아 온갖 화초가 다 망한 셈인에 그래도 도랑둑의 물봉선은 개그우먼 신봉선 같은 통통한 꽃송이에 홍조를 띄어 그 눈부심이 일당백입니다. 역시 우리 것, 자연스런 것이 가장 아름다운가 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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