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울아버지 명촌어른의 야맹증(夜盲症)4
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울아버지 명촌어른의 야맹증(夜盲症)4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0.12.16 17:10
  • 업데이트 2020.12.16 1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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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제1187호(2020.12.17)

그렇게 부녀가 손을 잡고 보초를 서러 나오던 기출씨 대신 하루는 얼굴에 숯 검댕을 칠한 순찬이가 혼자 나타났다. 그날은 마침 담당 순사 말고도 중남지서의 주임과 울산서의 감찰반까지 나와 있는 터라 감찰반이
“보소, 지서주임! 이기 우째 된 기요? 우째서 나이어린 처녀가 다 보초를 나온단 말이요?”

언성을 높이자 주임도 겁을 먹고 벌벌 떨기만 하고 담당 순사가 벌써 여러 번 부녀가 손을 잡고 오던 그 키다리영감의 딸임을 알고 급히 버든구장을 찾아 나섰다.
“그래, 처녀는 여기 우째 왔소?”

한참 뒤에 울산서의 감찰반이 묻자
“우리 아부지 대신 보초 서러 왔심더.”
“그럼 지금 아부지는 어디 계시요?”
“아부지는 밤눈이 어두버서 지가 없으면 밤에 바깥출입을 못 하지요. 오늘도 진장만디를 올라오다가 엎어져서 복숭씨를 가무텄지요. 그래서 진장만디에 앉아있심더.”
“뭐, 복숭씨를 꼽칩다고요? 우짜다가 그랬노? 조심을 안 하고?”

한참이나 순찬이와 주고받던 감찰반이
“보소, 김주임! 당신은 이 전시에 그것도 모르고 뭐 하고 앉은 거요? 밤눈 어두운 사람을 보초 세워서 뭐 우짜겠단 말이요!”

사진1. 1950년대의 버든마을(추석날 성묘를 간 진장만디에서 찍은 것 같은데 가운데는 태화강 앞은 버든마을 뒤는 언양읍, 고속철 부지로 수용되는 바람에 맨 아래쪽인 생가터는지금 서울산집중우체국이 되어있다.) 
1950년대의 버든마을(추석날 성묘를 간 진장만디에서 찍은 것 같은데 가운데는 태화강 앞은 버든마을 뒤는 언양읍, 고속철 부지로 수용되는 바람에 맨 아래쪽인 생가터는지금 서울산집중우체국이 되어있다.) 

버럭 고함을 지르더니
“갑시다. 아부지 계신 데로!”
순찬이를 앞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회나무진에서 진장만디까지 한참이나 밤길을 더듬거려 도착한 일행 중에서 감찰반이 플래시를 비추어 기출씨의 얼굴을 확인하고 복숭아뼈를 만지자 기출씨가 아파 죽는다고 고함을 질러댔다.
“당신, 도대체 뭐 하는 거요, 이 전시에? 그 뭐 지서주임자리는 나이롱뻥해서 딴 거요?”

다시 지서주임을 얼러대자
“예, 아, 뭐 죄송합니다. 담당순사가 말을 안 해주니 당최 알 수가 있어야지요...”

주임이 더듬거리자 마침 저 아래 담당 순경이 키가 커다란 장구장을 대동하고 올라오고 있었다.
“알겠심더. 영감님은 인자 보초 안 나오라 칼 깁니더. 인자 마 내려가이소.”
“감찰반이 지서주임을 쳐다보며 말하자 기출이가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며 순찬이의 부축을 받고 고개를 내려갔다. 순간 순경과 구장이 도착하자
“보소 장구장, 당신은 와 저 키다리영감쟁이 밤눈 어둡다는 이야기도 안 했소?”

이번엔 순경이 장구장을 잡아먹을 기세로 몰아붙이자 깜짝 놀란 장구장이 “그, 그, 그, 거...”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되었소. 그만 갑시다. 그 참 희한한 동네도 다 있네.”

 돌아서는 감찰반을 따라가던 주임이 문득 후딱 돌아오더니
“이 병신새끼!”

군홧발로 옆에 선 죄없는 순경의 정강이뼈를 사정없이 걷어차고 황급히 감찰반을 따라갔다.

이튿날 아직 아침도 먹기 전에 장구장이 기출씨네 삽짝문을 들어서며 시뻘건 얼굴로 뭐라고 어버버버, 떠들고 있었다. 가뜩이나 더듬는데다 너무 흥분하고 화가 난 그 말을 아무도 알아듣기가 힘들겠지만 한 마을에 오래 살고 눈치가 빠른데다 지난밤 소동의 장본인인 기출씨가 단번에 그 말뜻을 알아차리고
“아이고 동생 오나? 동네일에 고생 많제?”

반색을 하며 눈짓을 하자 알았다고 눈을 끔뻑한 순찬이가 이내 작은 판위에 탁주 한 주전자와 열무김치 한 보시기를 들고 와 평상위에 놓았다. 그 때까지 뭐라고 항변하는 장구장에게 갑자기 기출씨가 정색을 하더니
“야, 이 사람아, 그라문 나는 우짜란 말이고? 니캉내캉 한 마실에서 태어나 형님동생하고 산지가 벌써 50년인데 늙은 내가 아, 새끼들 안 굶가 죽일라꼬 수작 좀 부린 기 그리 앵꼽단 말이가? 니 겉으면 곱다시 앉아서 굶가 죽이겠나!”

도로 역정을 내자 전구장이 움찔했다.
“자, 우선 앉거라. 평생 안 보고 살 사람도 아이고. 낸주게 물고 뜯고 싸우더라도 우선은 한 잔 하자. 피차 간밤에 욕도 봤고...”

씩 웃으며 장구장을 붙잡아 앉히고는 술잔을 건넸다. 두 거한이 주고받고를 한참 만에 주전자가 바닥이 나자 
“며, 며 명촌성님, 잘 묵었심더.”

얼굴이 홍시가 된 전구장이 씨익 웃으면서 돌아갔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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