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자 이성희의 미술 이야기 : 꿈 - (3)잠자는 숲속의 공주
미학자 이성희의 미술 이야기 : 꿈 - (3)잠자는 숲속의 공주
  • 이성희 이성희
  • 승인 2020.12.23 13:10
  • 업데이트 2020.12.2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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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번-존스 「들장미의 전설(The Legend of Bria Rose)」 네 번째 패널
에드워드 번-존스 - 「들장미의 전설(The Legend of Bria Rose)」 네 번째 패널

공주는 잠들어 있다. 이 비밀의 정원에 어떤 마법이 라벤더 향기처럼 퍼져간 것일까? 정원을 뒤덮고 커튼을 넘어서 뻗어 나온 장미 넝쿨의 마법인가? 잠에 빠진 여인들의 무력한 아름다움을 온통 꽃들이 장식하고 있다. 우리에게 ‘잠자는 숲속의 공주’로 알려진 이야기를 그린 에드워드 번-존스(1833-1898)의 「들장미의 전설(The Legend of Briar Rose)」 네 패널 중 마지막 그림이다. 첫째 패널에 등장한 잘 생긴 왕자님이 마지막 이곳에 도달한 것이다. 왕자가 가시넝쿨을 헤치며 들어와 키스를 하면 공주는 깨어날 것이다.

서양의 많은 민담 속에서 늘 그렇듯이 왕자는 공주를 구한다. 공주는 높은 탑에 갇혀 있거나, 미궁 속에 있거나, 마법의 잠에 빠져 있다. 왕자 혹은 영웅이 난관을 극복하고 구하게 되는 공주는 칼 융의 심리학으로 말하자면 남자 속에 숨어 있는 여성성, 즉 아니마(anima)이다. 반면 여자 속에 숨어 있는 남성성을 아니무스(animus)라고 한다. 왕자가 공주를 구하는 이야기는 우리 속에 억압되거나 감춰진 심혼의 한 짝인 아니마를 찾아서 통합하여 참다운 ‘자기’를 완성하는 심리적 과정을 반영한다. 그럴싸하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질문해 보아야 한다. 그럼 공주가 왕자를 구하는 서사는 왜 그토록 드문가? 왜 화가들은 끊임없이 잠든 여자들만 그리는가? 이 일그러진 균형은 무엇을 말하는가?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에 감추어진 젠더의 정치학을 조심스럽게 들추어보아야 한다. 「들장미의 전설」을 다시 보자. 잠들어 있는 공주는 활동성이 제거되어 식물화된 여성이다. 장미넝쿨이 그녀들의 주변을 뒤덮고 있지 않은가. 그녀들의 보석함은 내밀함을 상실한 채 열려져 있다. 긴 세월 그녀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이곳을 비추고 있었을 바닥의 거울은 훔쳐보는 시선을 환기시킨다. 이 장면이 이곳에 도달한 왕자의 시선에 포착된 모습임을 잊지 말자. 남자의 권력과 시선은 여자를 식물이 되게 하고, 잠들게 한다.

페르낭 크노프(1858∼1921)의 「내 마음의 문을 잠갔네」
페르낭 크노프 - 「내 마음의 문을 잠갔네」(1891)

여성의 잠 속에, 그 잠이 이끄는 꿈과 몽상 속에 한 시대의 절망과 구원의 비전이 함께 동거한다. 19세기 벨기에의 상징주의 화가 페르낭 크노프(1858∼1921)의 「내 마음의 문을 잠갔네」 속에서 한 여인이 우리를 보고 있다. 그녀의 음산하고 우울한 시선은 실은 외부의 대상을 보는 시선이 아니다. 푸르고 창백한 내면으로 침몰하는 응시다. 이 황량한 풍경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한가운데에 던져진 여성들의 히스테리적인 내면 풍경이다. 확산되는 여성의 자각과 강고한 사회의 억압구조가 충돌하면서 발생한 질병이 ‘히스테리’다. 히스테리는 19세기 유럽 여성들의 황폐한 내면 풍경의 은유다. 나를 가두는 풍경인 것이다.

생명이 시든 백합이 퍼뜨리는 칙칙한 주황색 계열 속으로 한쪽 날개를 통해 푸른빛을 스며들게 하고 있는 잠의 신 히프노스의 두상이 보이는가. 히프노스 푸른빛이 그녀의 상처와 고독을 조용히 어루만진다. 마음의 문을 잠근 그녀는 히프노스의 안내를 받아 그녀만의 푸른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히프노스는 날개가 한쪽 밖에 없다. 히프노스를 따라가는 잠의 비행이 아득히 먼 곳까지 이어지기 위해서는 몽상이라는 다른 날개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히프노스 옆에 여인을 몽환의 세계로 이끌 양귀비꽃이 피어 있다. 잠과 몽상이 만나면 꿈이 된다. 푸른 여정에 핀 붉은 꽃이 그녀를 위로하며 꿈꾸게 할 것이다. 실제로 여성들의 히스테리를 치료하기 위해 프랑스의 샤르코는 최면술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최면술을 뜻하는 ‘hypnotism’은 히프노스(Hypnos)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히스테리 치료를 위해 프로이트는 샤르코에게 최면술을 배운다. 최면술(잠)은 잠긴 마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이었다. 그러나 합리주의자였던 프로이트는 최면술의 신비주의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독자적으로 자유연상법을 개발하게 되고 이를 통해 무의식이라는 마음속 미증유의 거대한 심연과 직면하게 되었다. 최면술과 자유연상법은 잠긴 문을 여는 방식은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여성의 고통스러운 심연에서 삶을 치유할 수 있는 미지의 세계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성’이라는 편견으로 무장한 근대의 힘들이 질식시킴으로써 메아리만 남은 채 우리 심리의 어두운 지하 창고에 유폐되기 전에는 공공연한 삶의 한 양식으로 우리와 함께 해 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리비도, 욕망, 콤플렉스가 아니라 신화, 마법, 축제 등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꿈의 재산들이다.

퓨젤리 「티타니아와 보톰」
퓨젤리 - 「티타니아와 보톰」

“아름다운 히폴리타여, 이제 우리가 결혼식을 올릴 시각이 걸음을 재촉하여 코앞으로 다가왔군요. 행복한 나흘 밤낮을 보내고 나면 새로운 초승달이 떠올라 날을 밝혀줄 것이오.”라는 테세우스의 대사로 《한여름 밤의 꿈》은 시작된다. 셰익스피어의 이 유명한 희극은 그믐달이 지고 초승달이 떠오를 때가지, 월광의 꿈과 요정의 마법이 지배하는 숲속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무도회요, 카니발이다. 그 월광의 숲은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마음 안에 녹슨 자물쇠로 잠긴 채 시들어간 비밀의 정원이다.

요정의 왕인 오베론이 ‘사랑에 취한 야생 비올라’즙으로 만든 묘약을 잠든 남녀에게 바르면 깨어날 때 처음 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요정의 여왕 티타니아가 당나귀 머리의 보톰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묘약을 바른 채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실은 꿈의 판타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퓨젤리는 티타니아와 보톰을 둘러싼 숲속 사랑의 축제를 그렸다. 달은 여성성의 원천이며, 한여름 밤의 꿈은 월광과 달의 주기가 지배하는 곳이다. 여성성의 공간인 것이다. 「티타니아와 보톰」 속에 보톰은 근심스런 표정으로 활동성을 상실한 채 앉아 있는 반면 티타니아는 월광으로 충만하며 춤추듯 역동적이다. 축제의 무대 전체를 여성(요정)들이 지배한다. 여성 캐릭터들의 풍요롭고 활기찬 모습들과는 달리 몇 명 없는 남성 캐릭터들은 화면의 구석자리에 아주 작은 크기로 그려져 있어 찾기도 어렵다. 특히 오른쪽 하단의 노인을 보라. 성질이 사나운 구경거리나 애완동물처럼 목줄이 채워져 있다. 「들장미의 전설」 젠더 정치학은 「티타니아와 보톰」에서는 역전된다. 러시아의 문학이론가 바흐친은 말한다. “여성은 새로운 것을 낳는 시원이다. […] 여성은 천성적으로 영원성에 대해 적대적이며 영원성이란 거만한 늙음이라고 폭로한다.”(『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바흐친에게 있어서 카니발은 문화와 예술의 가장 중요한 본원적인 형식이다. 카니발은 영원성에 바쳐지는 늙은 꼰대들의 죽은 의례가 아니라 죽음과 부활, 변화와 갱생, 온갖 대립하는 것들이 뒤섞이며 춤추는 생명의 축제이며, 끊임없이 수태하고 생성하는 자궁이다. 여기에서 잠자는 공주는 춤추는 여왕이 된다. 니체가 그 탁월한 명저 『비극의 탄생』에서 놓쳐버린 지점이 여기다. 그는 아폴론의 질서와 대비되는 디오니소스의 도취를 보았지만, 디오니소스 축제가 가진 여성성을 보지 못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 주기적으로 열린 디오니소스 축제에는 여사제와 여신도들이 광란의 밤을 주도하였다.

꿈의 세계로, 굴원처럼 아득히 원유하기 위해서는 깨고 나면 잊어지는 하룻밤 꿈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여성의 고통을 통해 발견했던 그 광활한 심연으로 한 걸음 내딛어야 한다. 공주를 구하는 왕자의 이야기를 넘어서 더 깊게, 더 멀리 흘러들어가야 한다. 그리하여 『파우스트』의 마지막 노래가 들릴 때까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도다.

칼 융은 마음의 심연으로의 여행에서 아니마 아니무스를 넘어서는 더 근원적인 장소, ‘어머니’를 말한다. 그런데 ‘어머니’, 즉 자궁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도 끝나지 않는다. 그 너머 "출생 이전의 ‘영원히 여성적인 것’인 원형적 가능성들의 근원적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영웅과 어머니 원형』) ‘영원히 여성적인 것’과 접속할 때 우리는 이끌어 올려진다. 그리하여 우리의 꿈은 비로소 한여름 밤의 카니발에 참여하게 되고, 노인들의 견고한 질서를 뒤집는 상상력의 도취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희 시인
이성희 시인

◇미학자 이성희는
▷1989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부산대(철학과 졸업)에서 노자 연구로 석사, 장자 연구로 박사 학위
▷시집 《겨울 산야에서 올리는 기도》 등
▷미학·미술 서적  『무의 미학』 『빈 중심의 아름다움-장자의 심미적 실재관』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등
▷현재 인문고전마을 「시루」에서 시민 대상 장자와 미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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