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룡 교수의 셰익스피어 이야기] 『햄릿』(16)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3.1.56-89)②
[김해룡 교수의 셰익스피어 이야기] 『햄릿』(16)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3.1.56-89)②
  • 김해룡 김해룡
  • 승인 2020.12.23 15:29
  • 업데이트 2020.12.24 15: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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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프롤로그 - ‘메멘토 모리’의 뿌리 찾기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아나모피즘
#종교개혁의 상황을 빗댄 은유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무덤 파는 광대’(Grave-digger)의 인류를 향한 애도(哀悼)④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②

Joseph Noel Paton,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오베론(Oberon)과 티타니아(Titania)의 다툼.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 [Joseph Noel Paton, 1849. /  Public domain]

● 마지막 소(小)주제 “To be, or not to be, ”

15회에서 32행(56-88)이나 진행되는 “To be, or not to be,-” 독백의 첫 다섯 행(3.1.56-60)을 살폈다. 그 다섯 행에서 햄릿이 “광포한 운명의 돌팔매”를 수동적으로 수용하고 인내하는 것과, “고통의 바다에 대항해 무장하고” 싸워 고통들을 끝장내는 것 중 어느 쪽이 고귀한 선택인지를 숙고하는 듯 했다. 그러나 우리는 햄릿에게 선택지가 없음을 밝혔다. 한 쪽은 비겁해지는 길이고, 한 쪽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선택인 것이다. 비극의 주인공이 비겁한 길을 선택할 수는 없다. 선택불가의 무력함에 빠져 있는 햄릿이 세 번째의 해결책에 대해 부심(腐心)한다. 첫 독백(1.2.131-2)에서 성서의 계명을 앞세워 금기시했던 행위, 즉 자살이다. 독자들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첫 다섯 행을 다시 인용하고 이후의 독백을 연결한다.

햄릿.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
광포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아도

그 고통을 마음속으로 감내하며 사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인가,
아니면 고통의 바다에 대항해 무기를 들고 맞서 싸워
그것들을 끝장내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인가? 죽는다는 것은—잠드는 것,
그것에 불과하며, 잠이 들어 우리가
육신이 물려받은 온갖 가슴앓이와
고통들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절실히 소망하는 궁극적인 결말일 것이다. (3.1.56-64)

5행 이후 햄릿이 죽음(to die)과 잠(to sleep)을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셰익스피어 극의 관객들에게도 이 동일화 개념은 친근했을 것이다. 성서의 가르침이 긴 세월 영향을 발휘한 결과이다. 성서에서 죽음은 ‘먼지속의 잠’이라는 이미지로 묘사되었다. 그 결과 이 순간에도 장례의식에서 추모객들은 고인에게 ‘영면(永眠)하시라’, 혹은 ‘편히 쉬시라’고 빈다. 지구라는 거처에서 잠시 유하다가 익명의 땅에 영원히 묻히는 인류, 그 인류가 겪는 절멸(絶滅)의 공포를 잊는데 이 동일화만한 어휘 놀음이 없다. 햄릿의 사념에 공포심이 이는 것은 사후(死後)의 꿈에 생각이 미쳤을 때이다. 죽음은 “잠드는 것”이기에 그 잠 속에서 필연적으로 꿈을 꿀 것이다. 문제는 그 꿈이 어떠할 것인가이다.

... 죽는 것은, 잠드는 것,
잠들면, 아마도 꿈을 꿀 것이다 ㅡ 그렇다, 바로 거기에 걸림돌이 있다.
왜냐하면 이 삶의 고통과 굴레를 훌훌 벗어던졌을 때
바로 그 죽음의 잠에서 무슨 꿈들을 꿀 것인가가
우릴 주저하게 만든다 ㅡ 그 의혹이
이 기나긴 삶을 질긴 재앙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감히 이 세상의 채찍과 경멸,
압제자의 횡포, 오만한 자의 모욕적인 무례,
무시당한 사랑의 고통, 재판 절차의 지체,
관리의 오만방자함, 선량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비열한 인간들로부터 받는 모욕 등을 감당하려 하겠는가,
단 한 자루의 단검만 있으면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데? (3.1.64-76)

햄릿에게는 “그 죽음의 잠에서 무슨 꿈들을 꿀 것인가”(in that sleep of death what dreams may come)(66)가 상념의 대상이다. 햄릿이 사후(死後)에 꿈꿀 것을 두려워한다. 죽어서도 꿈을 꾼다고? 그리고, 인구에 회자되는 이 “To be, or not to be,-” 독백이 이런 허망한 상상으로 채워져 있다니? 라며 이 글 읽기를 포기하려는 독자는 조금만 인내하시기 바란다. 필자로서도 독자들이 느낄 비현실감과 황당함을 햄릿을 향한 동정과 연민의 정으로 바꿔놓기는 난망이다. 이를 예상해 이 마지막 소주제는 피하고자 했다. 필자의 연극적 상상력만으로 허망하게 들리는 이 독백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난제임을 알기에 그러했다. 그러나 전공자임을 자처하는 주제에 난제라고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과녁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지만 않기를 바랄 밖에.

● 죽는 것은, 잠드는 것(To die, to sleep)

햄릿이 자살을 감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드러났다. 자살을 하면, 즉 잠이 들면, 그때부터 꿈을 꿀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구체적으로 “무슨 꿈”을 두려워하는지, 다시 되돌아 갈 곳이 없는 이 꿈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독자들과 함께 밝혀내야 할 의문이다.

꿈의 담론에서 벗어나 당대 영국인들의 삶을 잠시 살피자. 햄릿은 자신이 죽은 후에 꿈 꿀 것이 두려워 목숨을 부지하기로 한다. 이 비루한 연명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고통과 치욕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한 차례 단검을 휘둘러 삶을 끝내면 겪지 않아도 될 것들이다. 햄릿이 이 견디기 힘든 고통과 치욕을 열거한다. “이 세상의 채찍과 조소,/ 압제자의 횡포, 오만한 자의 모욕적인 무례,/ 무시당한 사랑의 고통, 재판 절차의 지체,/ 관리의 오만방자함, 선량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비열한 인간들로부터 받는 모욕” 등이다. 그러나 이 고통을 신분 높은 왕자 햄릿이 겪지는 않을 것이다. 보편적 인류가 겪을 보편적 고통이다. 자신의 내부에 침잠해 상념의 공장을 가동하던 햄릿이 인류에게 눈을 돌린 것이다. “To be or not to be” 독백이 개인적 고뇌의 영역에 갇혀있지 않고 인류를 향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은 적지 않은 수확이다. 이 독백이 인류를 향한 연민의 정(情)임은 텍스트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햄릿이 극중에서 유랑극단 배우에게 “연극의 목적이란...거울을 들어 자연을 비추는 일, 즉 선은 선의 모습으로, 악은 악의 모습 그대로 비춰서, 그 시대의 양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3.2.21-23)이라 정의한다. 또한 배우는 “시대의 축도이며 연대기”(they are the abstract and brief chronicles of the time)(2.2.520)라 칭한다. “시대의 축도이며 연대기”인 배우 햄릿이 연극과 배우의 역할을 배신할 이유가 없다. 햄릿이 이 독백에서 열거한 고통과 치욕은 “거울”에 비친 시대의 양상이다. 협의로는 셰익스피어 극의 관객들을 향했고 광의로는 인류를 향했다. 당대 관객들의 삶은 “둘러서서 야유를 퍼붓는 군중들 사이에서 하급관리(beadle)들에게 채찍질 당하는 매춘부나 부랑자들처럼” 채찍질 당하는 삶이었다(John Dover Wilson, ed. Hamlet: The New Shakespeare [1972]).

『위로』(Comforte, 1576)

『햄릿』 공연사의 초기에 연출가들은 햄릿이 한 손에 펼쳐진 책을 읽으며 이 독백을 시작하는 연기를 선호했다. 문제의 책은 16세기 이탈리아의 박식가(polymath) 제로라모 카르다노(Gerolamo Cardano 1501.9.24-1576.9.21)가 쓴 『위로』(Comforte, 1576)이다. 셰익스피어가 이 책의 영어번역본을 읽었으리라 추정하는 근거는 이 책의 내용이 “To be or not to be” 독백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독백을 햄릿이 뱉도록 극을 구성할 때 셰익스피어의 내면에 이 책의 내용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주의 외의 연출 기법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이므로 햄릿이 실재로 이 책을 들고 등장해도 어색할 것이 없었다. 무대에서 햄릿이 펼쳐 읽었을 책면의 내용이 이러하다.

...성서 속에서 죽음은 잠에 불과한 것으로 비유되었으며, 죽는 것은 잠드는 것이라 불리었다.... 성자 아가티우스(Agathius, 그리스 이름 ‘아카기오스’[Ακακιος]. 303년에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다 순교했던 그리스의 백부장[필자 주])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 그는 죽음을 정당하게 칭송했으니, 가령, 죽음은 질병과 모든 다른 슬픔들을 걷어갈 뿐 아니라, 고통이나 역경은 반복적으로 삶속에서 생겨나지만, 죽음은 결코 한 번 이상 오지 않는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건대, 인간이 편안히 죽으면, 그 죽음을 그 어떤 것보다도 잠에 비유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런 잠은 가장 안락하고, 또한 가장 깊은 것이 확실하기에, 죽은 자의 잠이 그러하듯 아무 꿈도 꾸지 않는 잠이 최상의 잠인 것이다. 방해받은 잠(broken sleep), 선잠(the slumber), 그리고 온갖 상(像)들로 가득 찬 꿈들은 연약하거나, 병든 육체에 깃든다......"(Variorum ed. 209에서 재인용)

죽은 자가 꿈꾼다는 햄릿의 발상이 이 이탈리아인 박식가의 글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전거(典據)에 접함으로 인해 우리가 햄릿의 사유의 향방을 어림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한 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의 한 장면. 티타니아(Titania)와 보틈(Bottom) Edwin Landseer, 1848,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의 한 장면. 티타니아(Titania)와 보톰(Bottom). [Edwin Landseer, 1848. / Public domain]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1596)

햄릿이 무슨 꿈을 두려워하는가? 셰익스피어가 꿈에 집착한 흔적을 남긴 대표적인 극 두 편이 있다. 낭만 희극인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1596)과 사극 『리처드 3세』(Richard Ⅲ, 1593)가 그것이다. 『한여름 밤의 꿈』은 극의 절반이 꿈으로 채워져 있다. 요정들이 두 쌍의 연인들에 끼어들어 남성들의 잘못된 욕구를 순화시켜 온당한 짝끼리 맺어주는 이야기이다. 이 과정에 요정이 숲속에서 잠든 두 남성의 눈꺼풀에 마법의 꽃즙을 바르는데 잠에서 깨어난 이후부터 이 둘은 이 꽃즙의 마력으로 환몽의 상태에 든다. 이 환몽의 상태에 잠행하는 동안 둘은 진정한 연인을 분별하는 지각을 잃고 왜곡된 욕구를 맘껏 발산한다. 정화(淨化)의 단계에 들기 전 순전치 못한 정서를 배설하는 것이다. 이윽고 꿈에서 깨어나자 둘은 온전한 정념을 되찾아 합당한 배필과 맺어지며 ‘향기 가득한 낭만희극’(sweet comedy)(4,2,42)의 끝을 마무리 한다.

극중 어릿광대 배우 보톰(Bottom)은 요정의 마법에 걸려 당나귀로 변신한다. 요정의 왕 오베론(Oberon)이 요정의 여왕 티타니아(Titania)와 다툰 후 홧김에 잠든 티타니아의 눈에 꽃즙을 바른다. 눈에 마법의 꽃즙이 칠해진 존재는, 그가 인간이던 요정이던, 잠에서 깰 때 제일 먼저 본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티타니아가 잠에서 깨어나 제일 먼저 이 당나귀를 보게 되어 둘은 사랑에 빠진다. 환몽의 상태에서 당나귀 보톰은 티타니아의 품에 안긴 채 달콤한 건초와 도토리를 마음껏 먹으며 극락을 경험한다. 요정 티타니아의 당나귀 보톰을 향한 사랑이 이러하다.

티타니아. 주무세요. 두 팔로 안아드리지요.
요정들아, 물러나라. 사방팔방으로 물러나라. [요정들 퇴장.]
담쟁이가 부드럽게 인동덩굴을
감싸듯, 암덩굴이
거친 숫덩굴 마디들을 감싸듯 안을 테에요.
오, 너무나 사랑해요! 그대를 미친 듯이 사랑해요. (4.1.29-33)

김해룡 교수
김해룡 교수

보톰은 환몽의 상태에서 깨어 난 후에도 꿈을 잊지 못한다. 보톰이 장주(장자, 莊子)의 ‘나비의 꿈’을 꾼 것이다. ‘장주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다. 훨훨 나는 나비가 된 것이 기뻤고 흔쾌히 스스로 나비라고 생각했으며 자기가 장주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깨어나자 틀림없이 다시 장주였다’(기세춘 옮김. 『莊子』 제물론 103). 장주는 나비가 누렸던 즐거움과 자유를 심히 아쉬워했다. 보톰은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혼몽한 상태에 잠기지만 이 당나귀 꿈을 결코 발설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당나귀로 변한 꿈이 그립고 당나귀로 변하고 싶은 것이다. 누가 ‘보톰의 꿈’(Bottom’s Dream)(4.1.214)을 두려워하는가?

『리처드 3세』에서 펼쳐지는 꿈을 이야기 할 순서이다. 이 극은 『햄릿』보다 8년 전(1592), 『위로』(1576) 보다는 16년 후에 집필되었다. 이 극에서 왕위 찬탈자 글로스터의 음모에 걸려 런던탑에 갇힌 클래런스가 ‘꿈속에서 죽은 후에도 계속 꿈을 꾼다.’ 햄릿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바로 그 ‘죽음의 잠 이후의 꿈’을 꾸는 것이다. (계속)

<전 한일장신대 교수 / 영문학 박사(셰익스피어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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