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65)- 보물 제260호인 『미암일기』의 저자 유희춘
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65)- 보물 제260호인 『미암일기』의 저자 유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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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2.08 22:36
  • 업데이트 2021.02.08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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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제역 벽서사건 연루, 20년 넘게 귀양살이
55세 재등용 때부터 사망 전까지 11년간 써
중요한 자료 많고 『선조실록』 사료로 활용돼

26세인 1538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1513~1577)은 선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가르쳤다. 선조는 항상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였다 한다.

미암은 전라남도 해남에 세거하던 선산 유씨(善山柳氏)로 부친은 유계린, 조부는 유공준, 증조는 유양수이다. 그의 직계 조상 대부분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지역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특히 부친 유계린은 장인인 최부(崔溥)로부터 학문을 익혀 학자로 유명했다.

미암은 2남 3녀의 형제가 있었는데 유성춘이 그의 형이었으며, 누이는 장성한 후 이울·오천형·한사눌에게 각기 출가했다.

그의 형 유성춘은 1513년(중종 8)에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이조정랑에 이르렀으나 2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와 형은 나이차가 많은데다 그가 벼슬살이를 시작할 무렵 형은 이미 오래 전에 사망했다.

미암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미암일기.
미암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미암일기.

미암은 55세 되던 1567년 10월 1일부터 세상을 떠나던 해인 1577년 5월 13일까지 약 11년 동안 일기를 썼다. 그것이 보물 제260호인 『미암일기(眉巖日記)』이다. 조선시대의 개인일기로는 아주 방대한 것으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일기는 원래는 14책이었으나 현재 11책이 남아 있다. 그 일기의 일부는 필자의 문집인 『미암집』에 초록, 기재되어 있다.

이 일기는 명종 말 선조 초의 여러 가지 사건과 관아의 기능, 관리들의 내면생활, 본인이 홍문관·전라도감사·사헌부관원 등을 역임하면서 겪은 사실들을 비롯해 당시의 정치·사회·경제 상태와 풍속 등을 기록하였다.

특히 동서분당 전의 정계의 동향과 사림의 동태, 감사의 부임과 교체, 순력(巡歷) 및 감사의 직무 수행, 경재소와 유향소의 조직과 운영, 중앙 관료와 지방관과의 관계에 관한 중요한 자료가 많이 실려 있다.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經筵日記)』와 함께 『선조실록』의 기사 사료가 되었다.

각 책의 기재 내용을 살펴보면, 제1책은 1567년 10월 1일에서 1568년 3월 29일까지, 제2책은 1568년 3월 29일에서 12월 5일까지, 제3책은 1569년 5월 22일에서 12월 30일까지, 제4책은 1570년 4월 24일에서 7월 8일까지, 제5책은 7월 9일에서 12월 25일까지, 제6책은 12월 26일에서 1571년 12월 3일까지가 기록되었다.

미암박물관 입구 표지석. 사진=미암박물관.
미암박물관 입구 표지석 [사진=미암박물관]

제7책은 1572년 9월 1일에서 1573년 5월 26일까지, 제8책은 1573년 6월 1일에서 12월 30일까지, 제9책은 1574년 정월 1일에서 같은 해 9월 26일까지, 제10책은 1575년 10월 27일에서 1576년 7월 29일까지를 기록하였다. 제11책은 부록으로서 저자와 그 부인 송씨(宋氏)의 시문과 잡록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미암일기는 그가 말년을 보낸 처향인 담양(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장동길 76)에 있는 마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현재 남아있는 미암일기는 그가 충청도 은진에서 유배생활을 한 이후의 일기이다. 미암은 20년 넘게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세 번째 유배지인 충청도 은진에서 해배되어 1567년(선조 즉위) 성균관 직강과 홍문관 교리로 복귀했다.

미암은 어찌하여 그 오랜 기간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을까? 그는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리하여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 곳에서 19년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이 때 국경 지방의 풍속에 글을 아는 사람이 적었는데, 교육을 베풀어 글을 배우는 선비가 많아졌다 한다. 1565년 충청도 은진에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삼정승의 상소로 석방되었다. 직강·응교·교리 등을 거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했으며, 이어 장령·집의·사인·전한·대사성·부제학·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575년(선조 8) 예조·공조의 참판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해 낙향하였다. 만년에는 왕명으로 경서(經書)의 구결언해(口訣諺解)에 참여해 『대학』을 완성하고, 『논어』를 주해하다가 마치지 못한 채 세상을 버렸다.

미암이 유배가 풀려 다시 등용되던 당시부터 일기를 쓴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 그는 어찌하여 일기를 거의 매일 쓰게 되었을까? 햇수로 20년이 넘는 유배를 사는 동안 수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복직이 되면서 나랏일을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앞으로의 생이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남은 공적인 삶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공인의식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내용을 매일매일 거의 빠짐없이 써내려갔을 것이다.

그는 외할아버지 최부의 학통을 계승해 이항·김인후 등과 함께 호남 지방의 학풍 조성에 기여하였다. 그의 아내인 송덕봉 역시 시를 잘 지어 부부가 시우(詩友)이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미암일기』·『속몽구(續蒙求)』·『역대요록(歷代要錄)』·『속휘변(續諱辨)』·『천해록(川海錄)』·『헌근록(獻芹錄)』·『주자어류전해(朱子語類箋解)』·『시서석의(詩書釋義)』·『완심도(玩心圖)』 등이 있으며, 편서로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이 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참고자료>
-이연순(2012), 『미암 유희춘의 일기문학』(이화연구총서 15), 혜안.
-정창권(2003),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미암일기 1567-1577』, 사계절.
-전경목(2015), 「미암일기를 통해 본 16세기 양반관료의 사회관계망 연구」, 조선시대사학보 73, 조선시대사학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사·고전인문학자, 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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