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 (80) - 백헌 이경석은 왜 「삼전도비문」을 지었을까?
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 (80) - 백헌 이경석은 왜 「삼전도비문」을 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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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9.05 11:14
  • 업데이트 2021.09.0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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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인조 삼전도서 '삼배구고두' 항복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 10만 명 청(淸) 인질로
이경석, 왕명으로 비문 작성 훗날 논란 대상 돼

1637년(인조 15) 1월 30일 인조는 세자 이하 삼공오경(三公五卿)을 뒤에 거느리고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삼전도로 내려왔다. 청 태종은 높다란 수항단(受降檀)을 축조하고 그 위에서 풍악을 울리며 인조가 항복하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인조는 왕이 입는 곤룡포 대신 평민이 입는 남색 옷(남융복·藍戎服)을 입고 세자를 비롯한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청 태종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라는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인조의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며 한겨울 혹한의 찬바람에 흩날렸다는 설도 있다. 바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었다.

이후 청 태종은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와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후일 제17대 왕인 효종) 등 십여만이 넘는 포로들을 데리고 물러가면서 수항단 터에 공덕비를 세울 것을 요구하였다. 원래 조정에서는 청나라가 비문의 내용을 주면 그것으로부터 비석에 새길 계획이었으나, 청은 조선의 문장가가 비문을 쓸 것을 요구하였다.

[사진 출처 = KBS역사저널 그날] 

그리하여 인조는 장유와 조희일, 이경석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했으나 모두 상소하여 거절하였다. 하지만 인조가 상소를 묵살하고 비문 작성을 독촉하였다. 그러자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엉망으로 써 채택되지 않도록 하였다. 결국 당시 예문관 제학으로 있던 이경석이 비문을 찬술하여 한문·여진어·몽골어로 새기게 되었다.

그러면 인조는 누구이며, 왜 병조호란이라는 굴욕적 상황을 당하게 되었을까?

인조(仁祖·1595~1649)는 조선의 제16대 왕(재위 1623~1649)이다. 선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원군(定遠君), 어머니는 인헌왕후이다. 1623년 김류·김자점·이귀·이괄 등 서인(西人)의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올랐다.

1624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일시 공주로 피난하였다가 도원수 장만이 이를 격파한 뒤 환도하였다. 인조는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反金親明) 정책을 썼다. 그러다 1627년 후금의 침입을 받게 되자 형제의 의(義)를 맺었다.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정이 친명적(親明的) 태도로 일관하자,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태종이 이를 이유로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하다가 패하여 청군에 항복하였다. 그때 군신의 의를 맺고 왕자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포로들과 함께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한 것이다.

자, 그러면 여기서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은 이경석(李景奭·1595~1671)은 누구이며, 왜 그 글을 지었는지 살펴보자.

이경석의 할아버지는 이수광(李秀光)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이유간이며, 김장생의 문인이다. 1617년 증광별시에 급제했으나, 이듬해 인목대비의 폐비 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削籍)되고 말았다. 인조반정 이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벼슬을 시작했다.

이경석 문집과 중시문과 급제 교지
이경석 문집과 중시문과 급제 교지 [사진 출처 = 위키백과]

이경석은 병자호란 때 대사헌·부제학에 연달아 제수되어 인조를 호종해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이듬해 인조가 항복하고 산성을 나온 뒤에는 도승지에 발탁되어 예문관제학을 겸임하며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어 올렸다.

그의 문집인 『백헌집(白軒集)』에 수록된 그의 연보에 「삼전도비문」을 짓게 된 이유가 적혀있다. 그러면 왜 이경석이 삼전도비문을 쓰게 되었을까? 그의 연보에 적힌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를 해보겠다.

당시 청의 지시로 비문을 짓는 일이 매우 급했다. 인조는 장유와 조희일, 그리고 이경석에게 명해 하룻밤에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청의 사신은 장유의 문장 중 ‘정백견양(鄭伯牽羊)’의 구절을 보고 화를 내었고, 이경석의 글에 대해서는 문장이 너무 짧고 전혀 칭송하는 뜻이 없다고 소리를 질러내며 다시 쓰라고 했다. 인조는 이경석을 불러 “저들이 이 문장으로 우리를 시험하고자 하니 여기에 우리의 조정이 달려 있다. 그들 마음을 맞춰 사태가 격화되지 않도록 하라”라고 명을 내렸다. 그래서 이경석은 어쩔 수 없이 비문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침 당시 홍문관 대제학인 문형(文衡)의 자리가 비어 이경석이 혼자 예문관제학을 맡고 있을 때였다.

 

이경석은 1641년에는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의 이사(貳師·세자에게 경서를 가르치는 일을 맡았던 종1품 문관 벼슬)가 되어 심양으로 갔다. 소현세자가 구금되어 있던 심양에서 대청 외교를 슬기롭게 풀어나갔다. 이후 그는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한 뒤 이듬해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총괄하였다. 송시열을 발탁하여 천거하였으나 후일 그와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17세기의 초기·중기에 해당하는 인조·효종·현종의 3대 50년 동안 안팎으로 얽힌 난국을 적절하게 주관한 명재상으로 역할을 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말년에는 차츰 당쟁 속에 깊이 말려 들어갔다. 특히 사후에 「삼전도비문」을 지었다는 행위 자체가 심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에 대해서는 지금도 시비가 엇갈리고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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