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 (13)‘치맥’과 노예무역, 그리고 아편전쟁 ①내 소비행위가 누구의 탐욕을 정당화한다
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 (13)‘치맥’과 노예무역, 그리고 아편전쟁 ①내 소비행위가 누구의 탐욕을 정당화한다
  • 조송원 기자 조송원 기자
  • 승인 2021.11.13 12:12
  • 업데이트 2021.11.1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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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일 끝내고 치맥 한 잔 하입시더.” “그래, 좋지. 시간 한 번 가짐세.” 친구 감 농장에서 대봉 감 수확하는 일을 도왔다. 후배 역시 옆 감밭에서 감을 따다가 오래간만이라며 한 잔하자는 제의다. 이 후배도 친구와 마찬가지로 수 년 전 귀촌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고 활동하던 사람치고는 꽤 농촌생활에 잘 적응하는 편이다. 외양만 봐서는 타고난 농사꾼 같다. 귀촌하여 제대로 정착하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무난히 농사일에 물드는 것 같아 대견해 보이기도 한다. 귀촌 전까지는 일면식 없었지만, 잘 지내는 사이다.

일단 약속은 잡았지만, 뭔가 꺼림하다. ‘치맥’에서 맥주는 빼고 치킨이 마음에 걸린다. 다른 안주는 없나? 삼겹살? 역시 돼지고기기도 마찬가지다. 요기 겸해 한 잔하는데 치킨이나 삼겹살만한 게 어디 있나. 나는 음식에 까탈을 부리지 않는다. 돼지고기든 닭고기든 가리지 않는다. 마는, 치킨과 삼겹살은 피하고 싶다. 입맛은 당기는데, 머리가 거부한다.

윤석열 후보는 지난 10월 31일 TV토론회에서 “식용 개라고 하는 것은 따로 키우지 않느냐”고 말했다. 식용 개라고? 식용 달팽이나 식용 개구리란 말은 들어봤지만, 금시초문이다. ‘1일 1망언’에다 사회문제에 대한 이해도가 지극히 낮은 위인이라 논급할 가치도 없다. 굳이 팩트 체크를 하자면, “식용견은 따로 있다”는 윤석열의 발언은 ‘거짓’이다. 현행법에 개는 ‘가축’이지만 ‘식용’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법원도 식용견 도살행위는 동물 학대라고 판결했다.

‘동물의 권리’를 옹호한다. ‘인류의 반려동물’인 개뿐 아니라, 돼지와 닭의 권리도 인정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물권 인정에 대한 접근 방식은 다른 동물애호가들과는 그 이유를 달리한다. ‘동물권’ 인정을 인간의 탐욕에 대한 최소한의 브레이크로 보기 때문이다.

[픽사베이]

인간은 지구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과학과 기술이라는 무기를 장착한 탐욕의 동물이다. 이 동물의 추동력은 ‘이윤’이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동물이든 식물이든 지구 자체건 가리지 않고 착취한다. 코로나19 역시 인간이 무자비하게 자연을 강탈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탐욕에 고삐를 채우지 않고도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지속가능할까? 우주적 입장에서는 인간이나 개나 돼지나 닭도 같은 지구의 시민이다. 각자의 권리를 존중해야 모두 공생할 수 있다.

닭과 돼지는 더 이상 양계장과 돼지 농장에서 길러지지 않는다. 일반 공업생산품과 마찬가지로 양계공장과 돼지공장에서 ‘생산’된다. 이 공장에서는 닭과 돼지는 고통과 비참함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로 간주되지 않는다. 단순히 기계취급을 받는다. 공장에서 이 동물들의 수명과 삶의 질은 해당 기업의 이윤에 따라 결정된다.

양계공장에서 닭 한 마리에게 주어지는 바닥면적은 가로 25cm, 세로 22cm에 불과하다. 모이는 충분히 제공한다. 그러나 닭들은 너무 좁아서 날개를 펴거나 똑바로 설 수도 없다. 돼지공장의 축사는 너무 비좁아서 돼지가 몸을 돌릴 수조차 없다. 암퇘지는 출산 후 4주 동안 밤낮으로 이런 우리에 갇혀 있다. 그 후 새끼들은 살을 찌우는 비육돈이 되기 위해 어디론가 옮겨진다. 그리고 암퇘지는 다음번 새끼를 임신한다.

조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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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누구나 즐겨먹는 치킨과 삼겹살은 농장에서 길러진 닭과 돼지가 아니라, 공장에서 기계가 된 닭과 돼지가 생산한 제품이다. 켕김 없이 이 제품들을 소비해도 아무 탈이 없는 것일까? 내 소비행위가 자연을 약탈하고, 뭇 생명과의 공존을 파괴하는 데 일조를 한다면, 한 번쯤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동물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다. 우리 삶의 보장을 위해서이다. 인간을 사고파는 노예무역의 주체는 누구였던가. 악랄한 왕이나 인종차별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탐욕을 추구하는 자본과 달콤한 홍차와 캔디를 즐긴 유럽인들이 그 주역이었다. 달콤함을 즐기던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소비행위가 노예무역을 조장한다는 사실을 의식했을까?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작가 / 선임기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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