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21) 제1부 떠돌이 기출이 - 제5장 너무 이른 사랑과 염막집 염분이
대하소설 「신불산」(21) 제1부 떠돌이 기출이 - 제5장 너무 이른 사랑과 염막집 염분이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01.21 07:00
  • 업데이트 2022.01.22 12: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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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너무 이른 사랑과 염막집 염분이 ⑥염분이
 

참으로 한심한 인생에 기박한 팔자로고, 내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왔는고? 이직 열다섯 살의 애늙은이가 멀어져가는 섬을 보며 땅이 꺼져라, 뱃전이 무너져라 한숨을 내쉬는데

“오빠!”

어디서 조그맣고 통통한 처녀 하나가 나타났다.

“...!”

놀랍게도 염분이었다. 조그만 옷 보퉁이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미리 배에 올라 제 아비에게 들키지 않게 기관실 근처에 숨어있었던 모양이었다.

네가 웬 일이냐는 물음에 염분이가 쉿,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혹시 선장이나 선원 또는 승객 중에 제 아비를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염분이가 오빠, 얼마나 아프냐는 물음에 역시 기출이가 입술에 검지를 세웠다. 그 골치 아픈 일, 그 지긋지긋 한 일을 다시 들먹이기 싫어서였다.

둘은 옷 보퉁이 하나씩을 안은 채 나란히 선실에 앉았다. 이윽히 올려다보는 염분이의 눈을 피해 기출이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염분이가 불안할까봐 오른 손으로 왼 손목을 꼬옥 잡았다. 염분이도 슬며시 눈을 감고 왼 어깨를 기출이에게 기대더니 점점 수그러지며 둘이 다 잠이 들쯤에는 반이나 안기고 기출이도 팔로 감싸 안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덜컹, 배가 흔들리는 소리에 그들은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 옷 보퉁이를 집어 들었다. 환한 햇살 아래 목포항이 펼쳐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가는 머리위로 수많은 갈매기 역시 바삐 끼룩거리며 날고 있었다.

 

선창에 발을 딛자 태어난 지 열다섯에 처음 뭍에 발을 딛는 염분이는 눈이 부신지 한참이나 여기저기를 바라보며 눈을 비볐다. 딱히 갈 곳도 없는 두 사람, 갈매기보다도 바쁠 것이 없는 판국에 염분이는 꿈에 그리던 육지의 모든 것이 다 신기한 판에 사춘기가 되고 달거리를 하면서 처음으로 사내로 느껴본 기출이 오빠가 옆에 있어 온몸이 둥둥 뜨는 기분이라 기출이에게 손목 하나를 맡긴 채 집에서 도망 나왔다는 무서움도 잊고 그냥 황홀한 표정이었다.

배가 고파 우선 국밥집으로 가서 생선이나 조개, 낙지 같은 바닷가 음식이 아닌 쇠고기 국밥을 시키니 염분이는 후룩후룩 소리를 내면서 금방 그릇을 비웠다. 맞은 데가 쓰려 탁주 한 잔을 마시니 낮술이 되어 금방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알딸딸했다.

부둣가에서 해안시장을 거쳐 한참을 서성인 둘은 어느 방파제를 한참이나 걸어 작은 등대를 향하다 너무 멀다싶어 중간에 주저앉았다. 앉자마자 염분이가 제 보따리를 푸는데 놀랍게도 지전이 한 뭉텅이가 나왔다. 기출이가 놀라 입이 딱 벌어지는데 염분이가 쉬잇 말하지 말라며 입을 가렸다.

 

그리고는 돈을 둘로 나누더니 칠 할이나 되는 뭉치를 기출이에게 주며 아마 이 돈이면 오빠의 품삯이 될 것이라고 했다. 깜짝 놀란 기출이가 아직 콩알만 한 녀석이 이 엄청난 돈은 웬 것이며 나는 네 아버지에게 돈 받을 것이 있지 네게는 받을 일이 없다고 밀어냈다. 그러자 오빠 그럼 내 말을 잘 들어보라며 찬찬히 이야기를 꺼내는 염분이를 바라보던 그는 깜짝 놀라 정신이 온통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이야기의 핵심은 어젯밤에 제 어미와 오빠와 아버지 사이에 벌어졌던 모든 일이 어쩌면 제 어미아비가 짜고 한 짓인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염분이가 알기로도 자신이 철이 들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대강 눈치를 챈 여남은 살 이후로도 벌써 서너 명의 염막인부들이 계약한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하나같이 제 어미와 어젯밤 같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그리고는 품삯 한 푼 받지 못 한 채 반병신이 되도록 흠신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제 아비보다도 늙고 병이 들어 늘 해소기침을 달고 다니던 노인도 있어 자기는 진작부터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사태를 대충 눈치 챈 그녀가 하루는 아비에게 왜 그런 나쁜 일을 하느냐고 묻자 다 너희 오 남매를 먹여 살리려 하는 일이라면서 아무소리 말라면서 윽박질렀다고 했다.

 

이어 염분이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오빠, 오빠!”

부르더니

“난 오빠가 좋았당께. 난 오빠가 우리 집에 처음 오던 날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어라. 우리 엄마가 오빠에게 다정하게 굴 때는 엄마를 칼로 찌르고 싶었당께.”

갑자기 목소리가 커지며 당돌하게도 똑 바로 쳐다보았다. 이미 끝님이와의 일로 이런 일에 익숙해진 기출이가

“좋긴 뭐가 좋노? 나는 날 때부터 아버지가 죽은 유복자에도 먹고살 살림도 없고 글도 배우지 못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슬며시 빠져나가는데

“그런 말 하는 오빠의 나지막한 목소리도 좋고 후리후리한 키도 좋고 희고 갸름한 얼굴도 좋고 길쭉한 손가락도 좋고 깊숙한 눈매도 좋고 머리에서 나는 기름 냄새, 땀 냄새도 좋고 눈도 코도 입도 귀도 목도 손도 발도 귓구멍까지 다 좋당께.”

“이런 바보. 니가 아직 어려서 그런데 세상에 사내들이란 그저 여자들은 귀찮게 하고 괴롭게 하는 사기꾼들잉기라.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아니랑께. 그래도 나는 오빠가 좋당께.”

오랜만에 둘이 맘 놓고 하는 대화라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가 번갈아 튀어나왔다. 설왕설래 우선 결론이 난 것은 돈 문제였다. 염분이가 이런 사태를 짐작하고 미리 제 아비의 돈을 아예 기출이의 품삯으로 줄 요량으로 훔쳐왔으니 우선은 그 대부분인 7할을 받기로 했다.

다음, 둘이 앞으로 어디 가서 무얼 할 것이냐는 문제였는데 기출이가 생각하기론 우선 자신은 조금이라도 고향이 가까운 진도나 완도의 바닷가에서 배를 타거나 진주나 의령의 넓은 들을 찾아 머슴이라도 살며 몇 년을 떠돌 작정이었다. 그리고 염분이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다시 제 어미아비가 사는 염막으로 돌아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염분이는 달랐다. 오빠만 있으면 어딜 가서 무얼 해도, 어떤 고생을 해도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또 제 아비의 성질이 포악해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서는 뼈도 못 추리고 얼추 초주검을 당할 것이 빤하다는 것이었다. 요는 아비가 무섭다는 핑계로 절대로 기출이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의논한 끝에 튀어나온 말이 열다섯 섬 처녀치고는 정말로 기가 막힐 일이었다. 우리 어서 저녁을 먹고 객주집이나 숙소를 찾아 빨리 우리아버지 어머니가 그렇게 즐기는 그 홀딱 벗고 씩씩거리는 놀음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이 부부가 되어 어디론가 가면 평생 오빠의 아낙이 되어 제 어미보다도 더 억척스레 살 것이라고 했다.

기가 찬 기출이가 이미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면 젊은 남녀가 그런 부부 간의 행사를 함부로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그러다가 아이라도 배게 되면 여자는 큰 일이 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도 자신은 오빠를 닮은 아이라면 제 어미처럼 다섯 아니라 여섯, 일곱이라도 낳을 자신이 있다고 우겨대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날 저녁은 간재미탕에 탁주까지 곁들여 넉넉히 잘 먹었다. 우선 돈도 넉넉했지만 어느새 두 사람이 오랜 이야기 끝에 서로 친밀감도 생기고 긴장도 풀어져 느긋한 마음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또 한참을 장바닥을 돌아다니다 밤에 먹을 오징어랑 감 홍시 몇 개를 사들고 그들은 부둣가 여인숙의 방 하나를 잡았다.

이직 어리고 사내를 겪어보지 않은 지라 낮에 한 당돌한 말과는 달리 염분이는 기출이가 깔아준 요에 얌전하게 누웠다. 그리고는 웃통을 벗는 기출이게게 무섭다며 옆에 오라고해 낮에 배안에서 그랬듯이 오누이처럼 어깨를 대고 나란히 누웠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이 흘러 서로가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정작 잠을 이루지 못하자 사내는 계집의 손목을, 계집은 잡힌 손가락들을 꼬무작거리며 조금씩 손바닥에 땀이 고이기 시작하다 마침내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옆방에서 붙은 연정의 불길이 벽을 타고 덮쳐온 것이었다.

 

둘이 서로 숨소리를 죽인다는 것이 오히려 상대에게 더 큰 숨소리를 내기를 한참이나 지속하다 마침내 염분이나 기출이 둘 다 혼곤히 잠이 들려는 순간 옆방에 사람이 들어 남녀의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빈들에 소를 몰아 밭을 갈듯, 물레방아가 덜컹거리며 돌아가다 문득 멈추고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밀고 당기고 밀치며 끌리며 숨이 막히고 터지며 물이 들끓어 쏟아지고 넘치고 철석거리는 소리가 온방을 채우더니 마침내 황소처럼 씩씩거리는 사내의 숨소리와 고양이처럼 앓아대는 여자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벽을 넘어 기출이의 방을 가득 채웠다.

“염분아, 자나?”

기출이가 슬며시 흔들자 염분이가 몸을 모로 세워 기출이를 똑바로 쳐다보는데 달빛을 담은 눈빛이 그윽했다. 달빛을 머금은 염막집 딸의 얼굴이 바야흐로 하얗게 달빛으로 채워져 질펀한 소금 꽃, 아니 한 송이의 박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옆방에서는 이제 절정에 도달했는지 여자의 목소리는 하소연인지 울음인지도 모르게 자지러지고 있었고 사내의 거친 숨소리는 소 씨름장의 황소가 도망가듯 툭 끊어지더니 사방이 잠잠해졌다. 부스럭거리며 속곳을 훑어 내리던 기출이와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어주던 염분이 둘이 다 멈칫하는데 무어라고 낮은 목소리로 여자가 옹알거리던 옆방에 밤새 끈 산불의 잔불이 다시 살아났는지 사내의 숨소리가 다시 거칠어지며 여자도 천천히 물결을 타고 점점 깊이 자맥질하다 높이 떠오르며 머나먼 여행을 출발하고 있었다.

조심조심 꼬무작거리던 기출이의 손길이 바빠지자 염분이가 아예 맥을 놓고 눈을 감았다. 기출이가 염분이를 반듯이 눕혔다.

...

 

처음 치른 일이 너무 당황하고 힘이 들었는지 아니면 황홀경에 빠져 꿈속을 헤매는지 염분이는 아랫도리만 대충 건사한 채 밤새 숨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기출이의 품에 안겨있었고 간간히 기출이가 등이나 어깨를 쓸어주다가 엉덩이나 젖꼭지를 슬쩍 건드리면 진저리를 쳤지만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그 가는 떨림이 사내의 가슴을 흔들어 기출이가 염분이를 반듯하게 눕히기를 몇 번, 이제 잠잠해진 건넌방에서 이쪽의 소리를 듣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밤을 새고 늦은 가을 해가 돋을 때까지 파김치가 된 둘은 햇살이 자신들의 홑이불과 맨다리를 비추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일어났다. 보따리를 풀어 속곳을 갈아입던 염분이가 이부자리에 흥건하게 피가 묻은 것을 보고 기겁을 하며 나가자고 했다. 생전 처음 여자가 된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남의 이불까지 버려놓았으니. 그러나 정작 신발을 꿰자 제대로 걸음을 걷지 못했다. 아랫도리가 너무 아려 이리저리 몸을 뒤트는 염분이를 부축해 부둣가에서 풋콩을 넣은 밥을 시락국에 말아먹고 둘은 다시 지난밤을 보낸 반대쪽의 여인숙을 찾았다.

 

이번에는 옷을 입은 채로 둘이 나란히 누웠다. 염분이의 몸이 좀 풀리면 부산이든 한성이든 어디로 가기로 하고 누웠는데 아직도 중천에 해가 훤한 한 낮에 하루하루 염전에서 땀을 흘리던 기출이나 갯벌에서 꼬막이나 바지락을 잡던 염분이도 딱히 할 일이 없이 그냥 심심했다. 억지로 눈을 붙이려하니 오히려 잠은 더 멀리 날아갔다.

결국 또 그게 그거였다. 어깨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다 마침내 엉덩이의 토실토실 부드러워 저릿저릿한 살을 더듬다가 마침내는 팥알 같은 젖꼭지를 비틀어보다 마침내 염분이를 반듯하게 눕혔다. 그렇게 걸음도 못 걷는다고 아우성인 여자를 밀어붙이는 사내나 그걸 또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콩알만 한 계집이 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대명천지 빈 방에 젊은 남녀가 호젓이 남았으니 달리 할 일이 있을 수가 있었으랴?

대낮의 방사를 치르고 내려온 기출이가 아직도 부끄러워 눈을 채 못 뜨는 염분이를 끌어당겨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이건 만에 한번, 그러니까 만약에라도 이런 일이 생기면 이리이리 하라면서 귓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우리 둘이 아무리 정이 깊고 늘 붙여 다녀도 살다가 보면 녹두장군의 일처럼 난리가 나거나 사내가 관재수가 들어 붙들려가거나 아니면 물에 빠지거나 길이 헷갈려 피치 못해 떨어질 일이 생길 것이다. 내 자신이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어 제대로 먹여 살리기도 힘든 판국에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어이 날 찾아오라고는 못할 처지이니 새로 좋은 사람이나 일거리를 만나 다시 염막의 부모를 찾아 서로 내왕하며 살 정도이면 그냥 스쳐간 인연으로 생각하고 날 찾지 마라. 하지만 젊은 우리가 어젯밤부터 벌써 수차례 몸을 섞었으니 이미 아이가 들어섰을 수도 모를 터, 만약 그런 경우라면 경상남도 맨 동쪽 울산의 언양읍에 와서 하나뿐인 소캐집, 즉 솜 파는 집에 가서 이기출이를 찾거나 남천내 건너 버든이라는 마실 서촌댁을 찾아 가기출이를 물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양땅에서 무슨 죄를 지어 앞으로도 사, 오년은 걸음을 못할 판이니 당장 만나지 못하더라도 느긋이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만약이다, 절대로 그런 일이 없도록 내가 이제부터 너를 건사할 것이다. 걱정마라. 절대로 걱정마라.”

도중에 고개를 돌려 뭔가 항의하려는 염분이의 머리를 억지로 그러안으며 기출이가 낮게 속삭이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자 마침내 깊은 잠이 들었는지 푸우푸우 황소 같은 숨소리를 뿜어냈다. 하긴 그럴 만큼 된 시집, 아니 중노동에 시달렸으리라.

 

염분이를 오른 팔위에 눕힌 채 기출이는 골똘히 상념에 잠겼다. 아마도 한 두 시간 후면 어제 그 맘 때, 증도를 거치는 통통배가 닿는 시간이리라. 염분이가 한 시간 너머 푹 잔 뒤에 눈을 뜨자 기출이가 점심을 먹자고 데리고 나갔다. 이번에는 선짓국으로 배를 채우고 찐 고구마 몇 개를 사 보퉁이에 넣게 했다. 먼 길을 떠나려면 간식도 필요하다는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그리고는 부둣가의 측간에 들러 먼저 일을 본 기출이가 염분이의 보따리를 들고 측간 앞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염분이를 들여보냈다. 기출이의 시야에 마침 어제 자신이 타고 온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선착장에 배가 닿기를 기다려 기출이가 뱃전으로 다가갔다. 예상대로 염막집 사내가 씨근거리며 내리고 있었다.

“아저씨!”

기출이가 부르는 소리에 얼굴을 든 사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야, 이 콩알만 한 놈아!”

땅딸막한 사내의 짧은 다리가 냅다 뛰기 시작했다. 여남은 걸음의 간격을 두고 측간으로 향하여 뛰어가던 기출이가 걸음을 멈추자 마침 염분이가 나오고 있었다.

“염분아, 염분아...”

목이 잠겨 갈아 앉은 목소리로 부르던 기출이가 염분이의 보따리를 툭 던져주면서 등 뒤를 가리켰다. 염분이의 아비가 달려오다 우뚝 서고 염분이도 사색이 되었다.

“아부지 따라 염막을 돌아가거라. 그라고 좋은 사람 만나 잘 살아라.”

뚜벅뚜벅 다가가 머리를 한 번 쓰윽 쓰다듬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염막사내가 쫓아왔지만 숨소리만 씩씩대고 어림없는 일.

“오빠아, 기출이 오빠...”

염분이가 꺽꺽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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