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44) 조심해, 전갈
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44) 조심해, 전갈
  • 손현숙 손현숙
  • 승인 2022.03.12 11:30
  • 업데이트 2022.03.19 11: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심해, 전갈 
                 
손현숙

 

내가 장래 희망을 이야기 하자 누가 깨진 이빨처럼 킥킥 거린다 희망보다는 장래 쪽에서 고개를 갸웃, 갸웃 한다 나는 모르는 척, 유유하게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다

나는 이제 내일을 이야기 하면 웃기는 사람 아무도 내 나이를 묻지 않는다 그건 내가 이미 송두리째 들켰다는 거, 신기루처럼 무대에서 흐려졌다는 말씀

그러나 저는 모르고 나만 아는, 생은 누구나 봉투를 뜯는 순간 생돈이 줄줄 새는 생피 팔아치우는 장사라는 거, 누가 밑천이 바닥난 봉투 앞에서 즐거울 수 있을까마는,

세상에 졌다는 전갈이 빠르게 허벅지 안쪽으로 기어들어온다 웃을까, 울을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멀쩡하게 숨을 쉬는 내 코앞에서 검지로 콕 집어 나를, 기어이 똑똑해야 직성이 풀리겠니, 넌?

- 웹진같이 가는 기분》 창간 1주년 특집 신작시. 2022. 봄호 -

손현숙 시인

시작메모 :

정말 그랬다. 송두리째 들켜버린 거다. 나는 나에게 희망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더더욱 내일을 이야기하면 난감한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외면했다. 그렇게 해걸음 앞에서 나는 그만 죄인이 되어버렸던 거다. 주눅이 들어서 스스로 고독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 움켜쥐면 쥘수록 거칠게 되살아나는 엉겅퀴 가시처럼 나를, 나의 생물학적 연대기가 조롱당하자 내 속의 그것이 핵처럼 폭발했다. 내가 뭘? 나는 여전히 울 아버지 딸인데. 내 오랜 벗들은 나를 현숙아,라고 맑게 불러주는데. 그거면 된 거다. 만나고 헤어지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친구가 있고. 꽃이 피면 좋아 죽는 가슴이 있고. 밤마다 걷는 천변풍경은 매일 달라서 매일 새롭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나는 괜찮다. 아니 좋다.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