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시대4-존재의 근원을 찾아서] 소나무의 메타포
[시민시대4-존재의 근원을 찾아서] 소나무의 메타포
  • 시민시대 시민시대
  • 승인 2022.04.11 15:01
  • 업데이트 2022.04.13 10: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영도 / 동아대 명예교수
[사진 : 픽사베이]

1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생전에 〈소나무와 번개(Pine und Blitz)〉라는 제목의 시詩를 남겼다.

 

소나무와 번개

인간과 짐승을 넘어 높이 자라나
말을 거는데 나와 함께 말하는 이
아무도 없다
나 홀로 너무 높이 자라나ㅡ
기다린다ㅡ그런데 무엇을 기다린단 말인가?
내 아주 곁에 구름이 앉아 있다ㅡ
내 기다리는 것 첫 번개이로다

 

고독 속에서 자기초극(自己超克 Selbstuberwindung)을 감행했던 니체는 자기를 한 아름의 소나무로 체험한다. 범속凡俗과 잡박雜駁을 넘어서 창조創造와 본래적 자기(本來的 自己das eigentliche Selbst)에로 비약飛躍한 소나무에게 이 세상은 너무나 왜소한 난장이들로 가득차 있다.

돈, 명예, 권력에 미쳐있는 속물들과 더불어 존재하기에는 소나무는 너무 높이 자라나 있어 어느 누구와도 말을 건넬 수 없고 사귐을 가질 수도 없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높이 올라가 있는 소나무를 쳐다보기조차 힘들 정도이다. 위엄과 엄숙마저 가진 소나무는 오히려 위대하기까지 하다.

홀로 자기가 자기와 대화하고 자기가 자기를 사유하고 자기가 자기를 강화하는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 그 자체로 존재하는 소나무는 구름 속을 번뜩이며 나오는 번개를 기다린다. 아니 자기강화 속에 자기초극을 실현하는 소나무 자신이 위버멘쉬Ubermensch로 번뜩인다. 부단한 자기초극의 순간마다에 구름 속의 번개처럼 소나무는 본래적 자기로서 실존(實存 Existenz)을 획득한다. 니체는 소나무의 암호(hiffre)를 통해서 본래적 자기로서의 실존을 획득한다. 즉 니체는 소나무의 형상을 통해서 본래적 자기로서의 위버멘쉬를 그리고 있다.
 

2
니체의 詩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만나는 소나무는 존경스럽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말처럼 소나무는 산 위의 뭇 나무들 가운데 가장 굵고 가장 높이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수난의 역사와 생존의 전통을 체현體現한 소나무는 자기를 자랑하지도 오만하지도 않는다. 말없이 높이 솟아올라 대양과 하늘에서 휘몰아쳐 오는 비바람조차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온 몸으로 만끽한다. 뿌리를 내리고 자기 나름으로 살을 찌우고 높이를 만들어 간다. 바위틈 사이에도 뿌리를 내리고 어떤 경우에는 바위들을 포옹하면서 위로 치솟고, 옆으로는 자신의 숱한 분신分身들을 마치 공작이 나래를 펼치듯 공간으로 펼쳐 나간다. 소나무는 폭포가 때리는 절벽 난간에서도 다리를 뻗치고 휘어지는 곡선을 과시한다. 소나무는 홀로 서 있을 때면 고독을 반추하며 태고太古의 신비를 향유하는가 하면 가능적 실존에서 현실적 실존에로 나아가는 철학함을 실현한다.

자기의 육신을 나선형螺旋形으로 휘어지며 먹이를 찾아가는 구렁이처럼 휘어지는 곡선을 조각하며 위로 오르는 소나무에게서는 자기초월의 고뇌가 느껴온다.

소나무는 참으로 겸허하면서 다른 존재들을 자비롭게 배려한다. 자신의 영역으로 침식해 오는 이름 모를 나약한 잡초가 있어도 관용과 배려를 베푼다. 스쳐지나가는 들짐승들에게는 선뜻 시원하게 등을 긁어주는 효자손이 되어주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안마기가 되어주는가 하면 세균과 때를 제거해주는 때밀이가 되어주기도 한다.

인간에게 소나무는 삶의 철리哲理를 인식시켜 주는 철학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시장에서, 광장에서 그리고 길거리에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장시간 골똘하게 사유하는 소크라테스Sokrates처럼 소나무는 자기를 성찰하고 자기의 삶을 음미하며 세계를 사유하는 모범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인다.

소나무는 자기희생적이다. 하늘에서 뜨겁게 내려오는 태양의 열을 자기의 육신으로 막아줌으로써 산행山行하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고 쉼터가 되어주기도 한다. 정신적으로 고뇌하거나 과도한 일에 지쳐 쓰러질듯한 화이트 칼러들White-Collar에게 그리고 집중적인 연구와 실험으로 생활의 권태에 사로잡힌 전문직종의 지식인들에게 소나무는 관상용觀賞用 난장이가 되어 사무실이나 연구실에서 대자연의 신비를 감지시켜 주기도 한다.

산수화山水畵의 소재로 등장하는 소나무는 언제나 도인道人과 짝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소나무는 존재 자체인 도道로서 로고스Logos의 은유隱喩이기도 하다.

 

3
신라의 문화 센터였던 최대의 거찰巨刹 황룡사의 대웅전 옆 벽면에 그려진 솔거의 노송도老松圖는 바로 소나무의 은유성隱喩性을 감동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소나무의 고독 속에서 자기를 초극하는 암호를 터득한 니체와, 그리고 더욱 늙어가는 노송의 숙명적 비극 속에서 현존적 좌절을 통한 본래적 자기에의 복귀를 시도한 솔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드라마티쉬dramatisch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힘에의 의지의 직유直喩로서 노송의 휘어지는 삶의 곡선에는 자기를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향상시키는 지향성(Intentionalitat)이 감지된다. 천년을 넘어 솔거는 노송도를 통해서 니체의 위버멘쉬에게 미소를 시사示唆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니체와 솔거가 천년의 시간을 넘어 예술혼藝術魂으로 만나고 있다.

니체가 자기의 주저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so sprach Zrathustra)』의 표지에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고 언표하고 있듯이 솔거는 자신의 「노송도」에서 한계상황의 비극적인 운명 앞에서 좌절하여 절망하는 자만이 실존에의 비약을 감행할 수 있지만,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런 실존적 자기초월을 실현할 수 없으리라는 메시지를 시사하고 있다.

정영도 명예교수

외로이 홀로 서 있는 낙락장송落落長松, 수백 년의 애환哀歡을 살아온 노송, 다른 존재들과의 갈등을 피하며 자신의 육신을 굴절시키며 공존해온 지혜의 소나무들에게서 인간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히 다른 존재들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양보하는 겸손의 미덕이요 공간적인 수평이동의 불가능한 운명을 체념적으로 수용하고 사랑하는 내재적 운명애(運命愛 amor fati)요, 그리고 한 지점에 못박힌 직립直立의 슬픈 운명 속에서 시도하는 자기 실존에의 부단하고 성실한 초월이다.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