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시대3-존재의 근원을 찾아서] 대중의 존재 전형으로서 평균인의 반역
[시민시대3-존재의 근원을 찾아서] 대중의 존재 전형으로서 평균인의 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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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4.13 11:33
  • 업데이트 2022.04.13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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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도 동아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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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포괄적으로 표현하면 대중 사회다. 대중 사회에서는 대중이 엄청난 지배력을 가진다. 이 대중은 외견적外見的, 양적兩的 측면에서 본다면 군집(群集, die Uberfullung] 및 충만[充滿, die Anhaufung)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대도시마다 수많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몇몇 도시에서는 인구 밀집 현상을 보여 주고 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만원이 일어나고 있다. 야구장, 축구장, 배구 경기장 등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군집 및 충만(초만원)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 가시적可視的 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군집의 근거에서 일컬어지고 있는 대중은 양적 측면에서 본다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 즉 군집을 구성하는 다중多衆의 인간을 의미한다.

질적 측면에서 본다면 대중은 좋든 나쁘든 무슨 특별한 이유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평가하지 않고, 오히려 생각과 감정과 행동에 있어 다른 사람과 동일하다고 느끼는 인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중은 그 점에 있어 자기가 다른 사람과 동일하다고 느끼는 자신에 대하여 만족하게 생각하는 그런 일상적 세속적 범인凡人들을 가리킨다. 대중은 자기 자신에게 어떤 고귀하고 도덕적인 것, 즉 인간적인 의무를 부과시키지 않고, 편안하고 안이한 태도로 범속凡俗하게 살아갈 뿐이다. 대중이 가진 이러한 속성을 지닌 개인을 우리는 대중인(der Massensmensch大衆人)이라고 일컫고 있다.

대중인은 타자지향적他者志向的이다. 남이 무엇을 생각하며, 무슨 취미를 가지고 있는가 등에 관심을 가지고 남의 눈치를 살피면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존재로 살아가고자 한다. 이 점에서 대중인은 자기를 비판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인간이 내자지향적內者志向的 인간인데 비해서 타자지향적 인간이다.

대중은 자기와 다르거나 또는 탁월하거나 선택된 것을 무엇이든지 절멸하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대중은 시대적 반역, 문명 및 문화에 대한 반역反逆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대중이 오늘날 감행하고 있는 반역은 두 가지 양태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 오늘날의 대중은 과거에는 소수자의 전유물이었던 거의 대부분을 자기의 삶을 위한 레퍼토리Repertory로 삼고 있다. 둘째 대중은 지금은 소수자에게 순종도 하지 않고, 따르지도 않고, 존경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중은 소수자를 가장자리로 밀쳐내고 자기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기도한다.

오늘의 대중은 선택된 집단이 발명한 도구들을 마음대로 사용하면서 인생의 낙을 자기들 멋대로 즐기고 있다. 물론 이러한 도구들이나 인생의 낙은 이전에는 그것들을 발명한 그 선택된 집단만이 사용하고 즐겼었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조차 없다. 오늘의 대중은 이전에는 소수자의 특전으로서 자기들한테는 과분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을 획득했다.

대중은 이전에는 특별한 사람들, 즉 전문가들만이 알고 있었던 기술들을 이제는 비교적 많이 이용하고 있다. 오늘의 대중이 알고 있는 것은 비단 이 물질적 기술뿐만 아니라 법적 사회적 기술에까지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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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극소수에게만 한정되었던 삶의 레퍼토리가 이제 와서는 평균인의 삶을 위한 레퍼토리로 둔갑했다. 일찍이 어느 시대의 평균인도 오늘날의 평균인처럼 삶의 여유를 가지고 자기의 경제 문제를 해결해 보지는 못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현대의 평균인은 자기의 표준적인 생활 목록에 새로운 사치품을 첨가한다. 날이 갈수록 그의 위치는 반석처럼 굳어져 가고 이제는 타인의 의지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다. 오늘날 평균인은 도처에서 사람들의 모범이 된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 평균인의 사고와 감정 자체가 만인의 척도尺度처럼 승인 되고 있다.

평균인은 이 세계가 탁월한 천재들의 창조적인 의지에 의해 창조되고 발전되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고 굳게 믿고 있다. 평균인은 너무나 안이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 현대 문명이며 문화가 근본적으로 인간성에 충실하고 도덕적 의무와 책임에 투철하고 모든 에너지와 열정을 다 바쳐 혼신의 힘으로 현대 문명과 문화를 창출한 천재적인 소수자의 성실성을 망각하고 저절로 그 모든 것이 주어진 것으로 착각한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평균인이 가지고 있는 표피적이면서 천박한 관념에서 비롯한다.

평균인의 심리를 분석해 보면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이 감지된다. 하나는 그들의 삶에 대한 욕망의 무한적 팽창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에게 안락한 삶을 가능케 해 주는 그 모든 것에 대한 배은망덕背恩忘德이다. 이 두 가지 특징은 20세기의 스페인의 위대한 철학자인 오르테가Ortega에 의하면 집안에서 가족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응석받이[das Verwoentes Kind]의 심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중으로서 평균인은 영감과 노력의 천재였던 과거의 상속인으로서 주위 세계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해서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귀여워한다는 것은 욕망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것은 무슨 짓을 해도 괜찮으며 또 아무런 의무도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인간은 자기 자신의 한계점에 대해 그 어떤 경험을 가질 기회가 없다. 주위에서 가해지고 있는 압력을 받을 필요도 없고 또 타인들과 충돌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실로 자기 혼자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타인의 존재를 무시하게 되고, 마침내 이 세상에는 자기보다 뛰어나거나 우수한 사람은 없다는 우월감, 나르시즘(Narcism, 자기도취증) 또는 자기적自己的 카리스마(Charisma, 많은 사람을 휘어잡는 능력이나 자질)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유형의 인간은 자기보다 더 강한 자가 나타나서 그로 하여금 욕망을 단념함과 동시에 자신을 위축시키고 제한하도록 강요할 때까지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우수성이나 탁월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자기보다 더 강한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의 독선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는다.

<여기에서 나의 존재는 끝이 나고 이제부터는 나보다 더 유능한 자가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에는 확실히 두 가지 스타일의 인간이 존재한다. 하나의 스타일의 인간은 나보다 더 유능하고 훌륭한 인간이다.>

과거 다른 시대에 있어 평균인은 그의 세계로부터 이러한 교훈을 근본적인 지식으로 매일 습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의 세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재난이 일어났고, 따라서 무엇 하나 안전하고 안정된 것이 없을 정도로 그 조직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대중, 즉 평균인은 수없이 많은 가능성으로 가득 찬 안전하기 그지없는 환경에 직면해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마치 우리가 태양을 어깨 위에 올려놓는 수고를 하지 않는데도 태양이 하늘 높이 떠 있는 것처럼 비록 사전에 아무런 노력을 아니 해도 세상만사가 자기들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평소에 막연하나마 이렇게 생각하듯이 이른바 귀여움을 받고 있다는 오늘날의 대중 또는 평균인이 자기들을 둘러싸고 있는 물리적 사회적 조직이 마치 자연발생적인 것처럼 거의 완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때문에 그것을 아무리 사용해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 공기와도 같은 원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오르테가는 이처럼 다복한 가정에서 귀여움을 받는 응석받이에 빗대어 현대사회의 대중, 즉 평균인의 망나니 같은 단순하고 위험한 생각 및 행동을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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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사회에 있어 이 응석받이가 21세기 한국의 현대 문명의 상속인으로서 행동을 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오늘날 한국에 있어 현대 문명은 실로 편리와 안전을 수반한 시설과 설비의 복합체로서 21세기 한국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문명이다. 덧붙여 말하건대 현대 문명이 이 세계에서 창출한 여유있는 삶 속에서 응석받이와 같은 특성을 지닌 새로운 인간 유형이 한국에서도 출현한 것이다. 이 새로운 유형의 인간은 현대 문명이 물질과 풍요를 생산한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도 만들어낸 많은 기형[Missbildung]들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 속에서 창출된 삶이 매일 결핍과 싸우면서 존속하는 삶보다는 더 행복한 삶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생각은 분명히 착각이고 환상이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안하무인격眼下無人格으로 살아가는 이러한 응석받이를 오르테가는 대중인이며 평균인을 빗대어 낮춤말로 언표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이 대중인을 “만족에 사로잡힌 철부지 도련님”(der zufriede junge Herr)이라고 언표하기도 한다.

정영도 명예교수

이 철부지 도련님으로서 응석받이는 자기멋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어 오히려 귀엽게 보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주지하다시피 가정 내에서는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결국 흐지부지한 채 아무런 벌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적 분위기란 상대적으로 인위적이어서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가족들은 관대하게 용서해 주는 것이 하나의 규범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만일 사회에서 그런 짓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당연히 벌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철부지 도련님은 자기집 밖에서도 집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철부지 도련님 또는 응석받이 유형의 인간들이 혼란, 범법犯法, 부정, 패륜, 사회적 반역을 거리낌없이 자행恣行하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인간들은 한국내 각 분야에 출현하여 반사회적 반국가적 파행跛行을 야기하고 있다. 이 유형의 철부지 도련님들이 특히 정치 분야와 법조계와 언론계에 니체의 말처럼 벼룩처럼 날뛰고 있다. 이것이 한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