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135) 제2부 농사꾼 기출씨 - 제17장 아아, 턱걸이②
대하소설 「신불산」(135) 제2부 농사꾼 기출씨 - 제17장 아아, 턱걸이②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05.20 07:00
  • 업데이트 2022.05.20 1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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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아아, 턱걸이②

한창 열심히 나락을 베어가던 열찬이의 손길이 멈칫하더니 이내 낫 끝으로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여자 팬티하나를 긁어 올려 논두렁에 던지며 벌쭉 웃었다. 이어 산비탈과 붙은 뒷 두렁을 빙 돌면서 손수건과 타월, 사각형 남자팬티와 동동구리무통에 이르기까지 별별 물건을 다 주워 올리고는 베어 논 나락위에 털썩 주저앉아 또 빙긋 웃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천수답인 데다 부산 가는 국도로 두 동강이가 난 오룡골 논의 아래쪽이라 <밑에 논>이라고 불리는 한 70평 정도의 고구마처럼 길쭉하게 생긴 논배미는 따로 물을 받을 도랑도 없이 비가 올 때마다 도로를 타고 내리는 빗물로 농사를 지어 절대로 땅을 그냥 놀리는 법이 없는 농사꾼의 습관으로 해마다 모를 심기는 하되 제대로 거두는 해가 절반도 되지 않고 곡수(穀數)도 형편없었다. 

그런데 최근 2, 3년 전부터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는데 그것은 방금 열찬이가 수습한 팬티와 손수건과 화장품의 임자인 젊은 남녀들이 그 알량한 농사마저 결단내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 해도 어린 열찬이의 짐작으로도 마을에 라디오를 가진 집이 차츰 늘어나고 저녁마다 마을의 처녀총각은 몰론 아줌마들까지 라디오가 있는 마루 넓은 집에 모여앉아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같은 연속극을 듣고 눈물을 흘리거나 

“아니, 저 저 놈이!”
“그, 그 그라면 안 되지. 어서 몸을 빼야지.” 

마치 자신이나 자신의 딸이 그 달콤한 로맨스의 현장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혀를 끌끌 차다가 이튿날 길을 가거나 밭을 매면서도 예사로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을 흥얼거렸는데 그렇게 바람난 처녀총각들이 애먼 열찬이네 오롱골 논만 버려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누구네 집에서 연속극을 듣고 박꽃이 하얗게 달빛에 부서지는 돌담길을 돌아 나오면서 괜히 가슴이 콩닥거리는 시골처녀나 호시탐탐 그 처녀를 노리는 총각들, 그리고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서부리 언양극장에서 손을 꼭 잡고 달콤한 영화 한 편을 관람하고 길을 나서는 한 쌍의 젊은이들은 저도 모르게 남천내공굴을 건너 이제 버스도 끊어진 신작로를 따라 걷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한 10여분을 걸어 열찬이네 논이 있는 오룡골 산 밑에 이르면 일제 때 늙은 소나무에서 송진이 굳어진 관솔을 녹여 비행기기름을 뽑아내던 구덩이가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고 또 그 중간중간의 아카시아 그늘 아래로 언양읍에서 홍진을 앓다 죽은 어린아이들을 묻은 애장 터에다 6,25때는 언양장터에서 사형당한 빨치산과 피난길에 굶거나 얼어 죽은 행려환자를 묻어 한여름 밤이면 그 인골에서 뿜어 나온 인(燐)성분이 마치 반딧불처럼 공중을 둥둥 떠다닌다고 했다. 그렇게 말로만 들어도 무섬기가 느껴지는 덕천고개의 입구에 다다르면 지금까지 가슴이 뛰고 몸이 달아 따라오던 처녀들은 자연히 멈칫거리며 몸을 사리게 되고 사내들은 아무 걱정 말라며 그런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여자는 품을 파고들고 뭐 그러다가 결국 덕천고개는 못 넘고 그냥 읍내로 돌아가기도 그렇고 해서 그만 어둠에 묻힌 산그늘 열찬이네 메마른 논에서 시골아이들이 하는 말로 <역사>가 이루어지는 모양이었다. 

(올해도 나락말이라도 먹기는 걸렀군. 하는 수 없지. 길가에 집을 지으면 온갖 사람들이 다 입을 댄다더니 길가에 농사를 지으니 온갖 젊은이들이 다 <역사>를 이루고 가는구먼. 허, 그것 참! 짜까짜까가 그렇게 좋은 것인가, 짜까짜까가?)

하며 또 빙긋 웃었다. 

 

그 <짜까짜까>란 말은 짐승이나 사람의 암수 또는 남녀가 배나 엉덩이를 맞대고 자신들의 새끼를 만드는 작업을 하는데 그걸 <짜까짜까>라고 설명하던 언양중학교의 어느 생물선생의 말이 단번에 언양바닥을 휩쓸면서 열찬이가 근래에 알게 된 단어였다. 듣고 보니 그럴 성 하기도 했다. 짐승도 아닌 사람들의 일을 그냥 흘레붙는다고 하기고 그렇고 그렇다고 함부로 쌍스런 말을 입에 담을 수도 없으니 참으로 잘 생각해낸 말인 것 같기도 했다.
 
또 한 대의 버스가 부옇게 먼지를 말아 올려 가라앉자 읍내 뒤로 서울 방향 국도의 직동고개가 가르마를 타듯 하얗게 드러났다. 그길로 곧장 달리면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와 영천 안동, 영주를 거쳐 죽령을 넘어 충청도를 지나 마침내 한양성인  서울에 닿는다고 했다. 언젠가 자신도 저 먼지가 풀썩 올라오는 35번 국도를 타고 남쪽의 부산이나 북쪽의 서울로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열찬아, 야, 열찬아!”

불러서 바라보니 같은 반 아이 너덧 명이 부지런히 달려오고 있었다.

 

이내 논배미 옆 신작로에 길동이, 용호, 형식이를 비롯한 반 친구 다섯 명이 당도했다. 그들은 열찬이와 같이 수업을 마치고 바로 학교근방인 집에는 들리지도 않고 남천내제방과 강가를 어슬렁거리다 마침 곱게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작천정을 구경 가기로 하고 길을 나선 모양이었다. 그중 열찬이와 가장 친한 용호가

“야, 열찬아, 니 여서 뭐 하노?”
“어어, 보리 갈 준비 좀 한다 아이가. 그런데 너거는 어데 가노?”

반갑기보다는 멋쩍은 생각이 들어 말을 돌리는데

“작천정에 놀러 간다. 니도 같이 가자.”
“아이다. 너거끼리 갔다 온나. 나는 바쁘다.” “야, 니도 한번쯤은 놀아봐야지. 가자. 내 돈 있다. 소 눈깔사탕 사주께.”

용호란 아이가 손에 쥔 빨간 5원짜리 지폐를 흔들어보였다. 당시로는 제법 큰돈인데 장터에서 멸치와 건어물가게를 크게 하는 집 아들이라 쉽게 만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 열찬아, 니도 가자. 우리는 전부 늘 공부하고 일 밖애 모르는 니하고도 같이 한 번 놀고 싶었다. 가자.”

형식이란 아이가 거들자 안 그래도 소의 눈만큼 커다란 알사탕을 사준다는 말에 솔깃하던 열찬이의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그래. 가보자.”

하교 길 그대로 가방을 맨 아이 다섯과 맨몸인 열찬이가 덕천고개의 제법 가파른 길을 오를 때였다. 은백색의 날렵한 동체를 뽐내며 부산에서 언양으로 들어오는 시외버스가 다가오자 그들은 재빨리 길가의 포플러가로수 뒤로 몸을 숨겼다. 자동차바퀴에서 커다란 돌멩이나 자갈이 튀어 팔다리나 뒤통수를 다치는 수가 있었기 때문에.

버스가 지나간 뽀얀 먼지가 가라앉자 이번에는 반대편 언양쪽에서 먼지가 일며 자동차하나가 나타났다. 가까이 오는 것을 보니 제무시끼(GM)라고 불리는 제법 큰 화물차였다. 자갈이 튈까봐 열찬이가 다시 가로수 뒤에 숨는데

“타자. 짐칸에 올라타자.”

형식이가 소리치자 아이들이 천천히 오르막을 오르는 화물차꽁무니를 향해 뛰어갔다. 열찬이도 엉겁결에 뛰기 시작했다. 맨 먼저 화물칸에 올라간 형식이가 종종걸음으로 매달리는 용호를 끌어올리고 또 한 아이가 올라가고... 마침내 다섯 아이가 올라가고 열찬이만 남았는데 그는 아직까지도 화물칸에서 두어 뼘 떨어져 손이 닿을락 말락 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에겐 그렇게 쉬운 일이 그에겐 너무 빠른 화물차에 비해  달음박질은 턱없이 느렸다. 가방을 맨 다섯이 다 올랐는데 맨몸인 그만 못 올랐으니 너무나 기가 찬 일이었다.

“옳지!. 조금만 더...”

아이들이 내민 손에 닿으려던 열찬이의 손이 빗나가며 한 발이나 간격이 벌어지자 함께 용을 쓰던 아이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쪼매만 더, 쪼매만 더!”

다섯 아이가 열렬히 응원했지만 화물차와 간격은 점점 멀어지고 말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찬 열찬이는 그만 털썩 길가에 주저 앉아버렸다. 너무 숨이 가빠 하늘이 노란 모양이었다.

한참이나 숨을 돌린 열찬이가 그만 돌아갈까 생각하다 다시 천천히 언덕길을 올랐다. 포기하기도 민망하지만 눈깔사탕도 아까운 것이었다. 마침내 열찬이가 덕천고개위에 닿았을 때 화물차가 멈춰선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와아, 열찬이 온다!”

함성을 지르던 아이들이 저마다 손을 내밀어 그를 차위로 끌어당겼고 운전기사도 차문을 열고 내다보며 빙긋 웃었다. 바로 용호네 친척아저씨였고 일찬이형도 잘 알던 사람이었다.

그날 그들은 작천정 호박소의 맑은 물과 단풍구경도 하고 정자구경도 하고 눈깔사탕도 사먹었다. 그러나 열찬이에겐 그 화려한 벚꽃이나 작천정 호박소의 맑은 물이나 달콤한 눈깔사탕의 기억은 별로 없고 오로지 덕천고개를 숨 가쁘게 오르던 늦어터진 자신의 모습과 저만치 멀어지던 자동차와 아이들의 손길뿐이었다.

공부는 잘 하지만 가난한 집 아이, 도무지 싸울 줄 모르는 순한 아이지만 새까맣고 못 생긴 아이에서 다시 달리기와 운동을 너무 못 하는 아이로 읍내에 파다하게 소문난 열찬이의 그 덕천고개의 악몽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될 때까지 끈질기게 이어졌다.

ⓒ서상균

그 해 늦가을 그들은 중학교 입학시험준비에 골몰하고 있었다. 당시 언양읍에는 4학급의 공립 언양중학교가 있어 언양읍을 비롯한 상북, 두동, 두서, 삼남(나중에 삼동면이 분면)서부 5개 면의 십여 국민학교 졸업반들이 시험을 치러 입학을 했다. 그러나 경쟁률이 아주 낮아 일 년에 불과 10명 정도 밖에 낙방하지 않으니 거의 대부분이 치기만 하면 합격이었다. 그렇다보니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은 누가 수석을 차지하여 입학금을 면제받느냐, 또 성적이 영 시원찮은 아이들은 정말 최악의 상황인 불합격으로 이제 생긴지 3년도 안 되는 상북면의 사립중학교로 진학하느냐가 주요관심사였다.

당연히 열찬이는 수석합격을 노리는 쪽, 그러니까 개인의 수석합격보다도 학교전체의 명예를 걸고 다른 학교아이들과 겨루어야하는 선두그룹으로서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은 물론 전교생과 학부형과 마을사람전체의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었다.
 
입학시험 며칠을 앞두고 담임선생님은 방과 후에 열찬이와 성해를 따로 불러 턱걸이와 달리기, 넓이 뛰기 공 던지기 등 4종목의 체육 실기시험연습을 시켰다. 반에서 2등인 성해는 네 종목을 단 번에 거뜬히 만 점선을 통과했지만 열찬이는 도무지 성적도 나오지 않고 진보도 되지 않아 선생님이 골치를 썩였다. 특히 담임 안정효선생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갓 부임해 그들보다 열 살 정도 어린 제자를 가르치는 매사에 의욕이 넘쳐 필기시험에 썩 강한 열찬이를 진작부터 수석합격자를 만들려고 점찍어 놓고 있었다. 

드디어 입학시험 날, 선생님은 전날저녁 열찬이와 몇에게 시험을 잘 치라고 그 귀한 짜장면을 사주었고 열찬이는 그날  처음 먹어본 황홀한 짜장면의 맛을 평생 잊지 못하게 되었다.

예상대로 열찬이는 필기시험을 꽤 잘 쳤다. 당시는 국어, 산수 두 과목만 6점짜리 문제 각 35개 도합 420점, 체육실기 60점, 도합 480점이 만점이었다. 그러나 체육시험은 참석만 하여도 기본점수 40점을 주고 턱걸이 등 4과목당 5점씩 도합 20점만 실제로 차이가 나게 되어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선생님과 다시 풀어본 결과 열찬이는 도합 2문제, 성해는 4문제가 틀렸다. 한 문제당 7점씩이니 14점 차이나 되었다. 학교를 통 털어 열찬이 혼자 2문제가 틀리고 나머지는 모두 4문제 이상이었다.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의 기대는 한껏 부풀었다. 다른 학교에서도 모조리 4문제 이상 틀리고 그만 유일하게 2문제가 틀려 수석은 따 놓은 당상이나 같다고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긴 20점 만점 체육실기중 7점만 획득하면 도무지 상대가 없었으니까.
 
운명의 체육실기 시험 날이었다.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다 했지만 도무지 무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그저 담임선생님, 교장선생님의 탄식소리만 여지저기 가득했다. 달리기에는 넘어질 뻔 하고 넓이 뛰기는 선을 밟고 악전고투 속 마지막 턱걸이를 할 때였다. 그렇게 연습했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성공을 못 한 그 턱걸이를 한두 개만 하여도 1등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역시 그 싸늘한 쇠파이프에 턱 한번 걸어보지 못하고 내려오고 말았다.

“아이고, 열찬아...”

담임선생이 모래밭에 털썩 주저앉자 교장선생은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시험성적이 발표되던 날, 상위 10등까지에 열찬이의 이름은 없었다. 14점이나 앞서 20점을 두고 다툰 싸움에서 상대들은 모두 20점 만점을 받고 그는 겨우 5점에 그쳤다. 친구 성해는 전체 4등을 하고. 아아, 이 빌어먹을 운동신경, 저주 받을 운동신경, 그 후로도 그는 그 둔해빠진 운동신경으로 평생을 고통 받고 지내게 되고 말았다. 

“아이 엠의 보이, 유아의 걸. 아이 엠 윌리 딕슨, 유아 셀리 브라운”

봄볕이 포근한 오후에 노란 햇살이 스며든 윗목에서 새끼를 꼬는 열찬이가 저 만큼 영어책을 펴놓고 읽고 외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날씨만큼씩 몸이 풀리는 아버지기출씨도 모처럼 숨길이 편해져 돋보기안경을 찾아 쓰고 화투 패를 떼고 있었다.

“아이엠의 스쿨보이, 아임의 스쿨보이.”

열찬이 다음 페이지를 읽어나갈 때였다

“야야, 영어 그거 아무 거도 아이네. 아이머 스쿨보이면 맞으면 동쿨보이가 아이가? 그까짓 영어는 나도 하겠네.”

아버지 기출씨가 빙긋 웃으며 열찬이를 바라보았다. 장난기 많은 아버지가 아마도 스쿨을 서(西)쿨로 알아듣고 금방 동(東)쿨이란 반대말을 찾아낸 모양이라고 열찬이도 씩 웃으며

“맞심더. 아부지 영어실력이 보통이 아이네요.”

받아넘기는데

“그런데 옛날에 벌짱인가 회나무진에 살던 문웅인가 무웅인가 하는 아가 하는 영어는 한 마디도 못 알아듣겠더라. 인자 영어를 배운 니는 그 때 그 기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아주 오래전 일찬이형 또래의 문웅이란 학생이 매일아침 삼남면방면에 사는 중학생의 통학로인 열찬이네 집 앞을 지내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커다랗게 외우던 걸 떠올린 모양이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