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141) 제2부 농사꾼 기출씨 - 제19장 떠돌이 영혼 기출씨의 죽음①
대하소설 「신불산」(141) 제2부 농사꾼 기출씨 - 제19장 떠돌이 영혼 기출씨의 죽음①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05.28 00:00
  • 업데이트 2022.05.2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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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떠돌이 영혼 기출씨의 죽음①
 
중학생시절에 일어난 변화가 또 있었다. 기출씨의 가문에 그 누구보다도 큰 풍파를 몰고 온 새 식구인 형수가 들어온 것이었다. 

열찬이의 형수 맹여사와 형 일찬씨의 인연은 참으로 엉뚱하게 시작되었다. 창원 36사단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하던 일찬씨가 어느 날 국도로 고개 몇 개만 넘으면 되는 가까운 순찬씨의 집에 놀러갔을 때였다. 그날 하필이면 같은 39사단에 근무해도 서로 면식이 없었던 끈텅집 둘째아들 맹또길상병이 동시에 외박을 나와 동갑내기의 두 병사가 만나게 된 것이었다.

부산의 공업학교 전기과를 나와 한전에 근무하다 입대한 또길씨와 농협에 다니다 입대한 일찬씨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수재소리를 들으며 남들의 선망을 받는 직장에 다니는 등 여러 공통점이 있어 금방 친해지기 시작했다. 일찬씨가 끈텅집에 놀러 가면 밥상을 들고 오던 스물한 살의 여동생 정자씨가 오빠의 친구이자 사돈인 일찬씨에게 급속도로 빠져들며 오빠 맹선길씨를 통해 시집갈 의향을 보인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남동생의 부모입장에 서게 된 순찬씨는 황당하기도 했지만 단호하게 반대의사를 나타내었다. 이미 신앙심 깊은 신도를 넘어 삶의 대부분을 하느님 아버지와 대속자 주 예수가 차지하는 광신도가 된 순찬씨로서는 그 좁은 마을에서 집안에 부처를 모셔놓는 것은 물론 갑자기 체하거나 한밤중에 경기(驚氣)들린 아이들의 손을 따 낫게 하거나 마을아낙들의 부탁에 따라 동당동당 북이나 꽹과리를 치며 푸닥거리를 해주는 처녀의 어머니, 그래서 사돈 간의 체면도 던져버리고 맹렬하게 싸웠던 처녀의 어머니를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입장으로서는 사돈이 아니라 단순히 우상을 섬기는 죄인이자 이교도로서 당장 회개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와야 할 죄 많은 딸일 뿐이었다. 
 
거기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비록 간간히 사형 맹선길씨가 순찬씨의 급한 일을 도와주거나 재근씨를 동행해 마을의 남정네들이 모이는 술자리나 노름판에 끼워주기도 했지만 언양에서 명동까지 200리 가까이 먼 곳으로 이사 온 사람이 느끼는 서먹함과 서운함이 어쩐지 텃세를 당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손위동서의 말만 믿고 이사를 오긴 했지만 처음 기대와는 다르게 무언가 속고 손해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 것이 어쩌면 애초부터 맹선길씨가 뒷 조종을 해 자신들을 끌어들인 것 같은 의구심이 들기도 했던 것이었다.

만약 울산사람, 김해사람, 함안사람이 없으면 부산교도소가 텅 빈다고 하는 판에 언양땅의 재건씨나 김해바닥의 선길씨가 대도시인 부산과 마산에서 멀지 않은 반촌사람이라 셈이 빠르고 생활력이 강하게 타고났으니 난 처음부터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믿지 못할 수밖에 없었고 마을사람들 역시 새로 이사 온  언양댁과 그 식구들이 예사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판이었다.

아직 결혼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찬씨는 뜻밖의 구혼에 당황했지만 차차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구체적인 검토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처녀가 키도 몸매도 그만그만하고 인물도 멀끔하며 애교가 있는 데다 집안의 형제들이 공부도 잘 하고 머리도 좋은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그이 마음을 동하게 하는 것은 아버지 기출씨가 병이 깊어 얼마나 더 살지도 모르는 형편에 장남으로서 살아계실 때 결혼하여 며느리의 손으로 밥상을 받고 손자를 안아보게 하는 것이 도리인 것이었다. 

또 가난한 농가에 어린 남동생이 둘이나 되고 병든 아버지와 단순한 어머니, 시누이가 넷이나 되는 집에 누가 선뜻 시집을 오겠다고 나설 사람이 없으리란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형편에 그런 힘든 맏며느리의 자리에 저 먼저 시집을 오겠다고 하니 고맙기도 한 일이었다.
 

그렇게 일찬씨가 긍정적인 의사를 보이자 처녀 측 맹씨네는 반색을 했지만 아랫집 순찬씨는 난리가 났다. 도대체 저 우상을 섬기는 죄 많은 무당의 딸에게 무엇을 믿고 장가를 들려고 하느냐, 저 사돈처녀가 오로지 사람 하나를 보고 시집을 가겠다고 했지만 그건 동생 니가 인물이 좋거나 다정다감한 한 사내로서 처녀의 가슴을 설레게 한 것이 아니고 단지 직장이 좋아서, 농협이란 안정된 직장에 다녀 일단 결혼만 하면 한 평생 호미질, 낫질에 허리가 휘는 농사일을 않고 편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언양의 병든 아버지는 장가를 가겠다는 자체가 기쁠 뿐 싫고 좋고를 말할 처지가 아니었고 아직도 영감이 무섭기만 한 어머니 명촌댁도 역시 이웃에서 신붓감을 늘 봐온 순찬씨의 처분만 바라는 형편이라 처녀와 늙은 어미는 악착같이 언양댁 순찬씨에게 달라붙어 온갖 비위를 맞추며 정성을 다했다. 형만 한 동생이 없다고 하지만 떼쓰는 아우를 이기는 형도 업는 법, 마침내 순찬씨는 처녀가 결혼과 동시에 미신을 버리고 교회에 나가 하느님을 섬길 것을 약속받고 결혼을 승낙하게 되었다.

 

김해에서 구식으로 식을 올리고 언양으로 시집을 온 맏며느리는 맹정자씨는 사대육신이 멀쩡하고 인물이 훤해 한눈에 버든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 눈치가 빠르고 몸이 가벼우며 인사성이 밝은 데다 붙임성이 좋아 처음에는 명촌댁이 큰며느리를 참 잘 본다, 일찬씨가 공부를 잘하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인만큼 농사꾼의 땟물을 벗은 배운 며느리를 보았다고 부러워했다. 사실은 며느리 맹여사 역시 가난한 농가의 막내로서 2남 3녀중 머리가 좋은 손위 오빠 하나만 공부를 시켜 단지 국민학교만 나왔음에도. 
 
군복을 입고 식을 올린 일찬씨는 이내 창원의 부대로 돌아가고 혼자 남게 된 새색시는 세 살 어린 막내시누이 덕찬이와 아랫방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이튿날 오전 부엌일을 마친 정자씨는 용감하게 아랫방의 여닫이문의 부러진 댓가지를 빼내고 새로 맞추려고 문종이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런 며느리를 본 기출씨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내내 콜록거리면서도 그 기다란 왼손잡이의 손가락을 움직여 완성해주었고 며느리는 시집올 때 밑반찬으로 가져온 붕어젓갈로 점심상을 봐왔다. 열찬이에게도 털실로 짠 하늘색 스웨터 하나가 예단으로 주어져 그는 가끔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입어보일 뿐 애지중지 아끼느라 자주 입지는 않았다.

ⓒ서상균

남편도 없이 시집살이를 시작한 맹여사는 시누이 덕찬이와 함께 새로 산 라디오를 틀어 연속극이나 유행가를 들으며 여덟 살이 된 막내 백찬이를 안아 주거나 슬슬 놀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밭에서 덕찬이에게 노래를 가르쳤지만 원래 노래에 소질이 없는 덕찬이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열찬이가

  차라리 만나지나 않았더라면 
  행복이 무엇인지 몰랐을 것을
  야속히 정을 두고 떠나갈 바에
  어이해 내 가슴에 그리움을 남기고
  밤마다 울게 하나? 왼손잡이 사나이

라는 <홍콩의 왼손잡이>라든지

  님이라 부르리까 당신이라고 부르리까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을 참고 사는 
  마음으로만 사랑해 마음으로만 그리워
  애타는 마음
  그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 것처럼
  울어야만 합니까, 웃어야만 됩니까?

하는 이미자의 <님이라 부르리까?>와 또 최숙자의 <황해도색시>

내 고향 황주땅은 능금꽃 피는고장
푸른 바람 언덕 넘어 반물(감색갈) 치마 펄럭이나
둥그레 당기 당실 싹트던 그 사랑 
사연도 아득코나 십여 년을
기약 없이 떠돌았네 황해도 색시

첩첩산중 두메골짝 구월산 산기슭에
임도 없는 그 땅에서 누굴 위해 피어졌나
둥그레 당기 당실 진달래 사랑아 
시들은 내 청춘만 따져보는
넋두리만 실었구나 황해도 색시.

같은 노래가사를 금방 외어 반주만 나와도 왠지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은 이미자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 정경을 눈앞에 떠올려보곤 했다.

 

환갑진갑이 다 지난 아버지와 열두 살이 적은 어머니에 남편이 군에 간 며느리와  열아홉의 딸과 열다섯, 여덟 살의 뚝뚝 떨어진 간격의 3남매의 뭔가 아귀가 잘 맞지 않은 이상한 여섯 가족은 그렇게 한 해 겨울을 넘기게 되었다.

아침상머리에선 <즐거운 우리 집>이란 아침 드라마를 듣고 한낮엔 <정오의 꽃다발>이란 가요 프로를 듣느라 이제 갓 들어온 전기 불을 아끼느라 큰방작은방 사이에 구멍을 뚫고 백열등을 한 가운데 얹어놓은 봉창을 통해 라디오가 오고가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마침 라디오가 큰방에 있을 때 느닷없이 조영남의 <딜라일라>가 흘러나오면 기출씨는 대경실색 라디오를 끄면서 혀를 끌끌 찼고 며느리와 아이들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게 봄을 맞았고 일찬씨가 제대해 맹여사는 직장이 있는 의령으로 떠났다. 

 

열찬이는 고등학교에 입학은 하였지만 중학교와 같은 정문과 운동장을 쓰고 같은 교장선생을 모시는 사실상의 한 학교라 고등학생이 된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울산지역에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하여 시 외각엔 공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사연댐과 대암댐이 조성되고 바닷가인 장생포, 방어진에는 공단이 조성되어 정유, 화학, 비료공장이 들어서고 인구가 급격히 불어나고 외지인이 유입되어 하루하루 산과 들이 깎여나가고 인심이 야박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런 변화의 하나가 바로 일평생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이젠 등골만 빠지는 농사보다는 공장에서 일하는 월급쟁이생활이 훨씬 편하고 경제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논 여남은 마지기를 농사짓는 꽤 단단한 중농이랬자 일 년에 쌀 스무 가마니를 소출, 농비(農費)를 빼면 한 달에 한 가마니 꼴 소득에도 못 미치는데 엔간한 공장에 다니면 매달 쌀 두어 가마니 값을 받으니 굳이 지주에게 굽실거리며 소득도 없는 남의 논을 부칠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제 땅이 없다고 택호(宅號)조차 없이 괄시받던 사람들이 얼씨구나 하고 울산으로 떠나 명절이 되면 번듯한 옷차림으로 나타나 부러움을 사곤 했다.
 
당시에는 이미 갑오경장으로 양반상놈이 없어진 지가 오래 되어 대놓고 양반이라고 으스대거나 상놈이라고 괄시받는 사람이 없이 언양바닥에는 남천내 방천 둑에 나지막한 초가집을 짓고 사는 단 한 집, 5일 장, 한 장 사이인 닷새마다 소 한 마리를 잡아 정육을 팔고 남은 소머리와 내장을 몽땅 넣고 한 이틀 푹 고아 장날마다 아이도 한 그릇, 어른도 한 그릇씩 듬뿍듬뿍 퍼주는 <소피국물>을 파는 김아무개집 하나만 빼면 모두가 다 양반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나이든 그 집 부부를 백정이라고 하대(下待)했고 또 그들도 모든 어른들은 물론 자기 집 아이들과 한 반인 동네 조무래기들에게 함부로 말을 놓지 못해 말을 붙이지 않고 땅바닥만 바라보고 길을 다녔다. 

그러나 농사를 짓는 반촌에는 옛날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남여하인 노비(奴婢)와 묘지기, 산지기를 비롯해 시집올 때 몸종으로 달고 온 하녀와 그 자식 등 아직도 알게 모르게 괄시를 받는 사람들이 몇 가구씩 있기도 했다. 

그러나 들이 좁아 장날에 뭔가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태반인 버든에는 좀 남다른 차별기준이 있었는데 그건 농사가 전혀 없이 남의 품을 들거나 허드렛일로 살아가는 웃각단의 보깡구나 동사에 사는 만택씨 또 일본에서 건너온 타지출신의 귀환동포나 6·25 피난민이거나 고아출신등 대체로 남의 셋방살이나 작은 오두막집에 사는 근본이 불분명한 사람들에게 택호를 붙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점잖게 불리는 명촌댁, 상남댁, 상천엄손, 출강김손이 아닌 각각 보깡구집, 아무개아부지나 어머니, 일본씩의 미짱집과 아무개신랑 등으로 불렸다. 

내력이 그런 만큼 새색시가 시집오면 그 이튿날 마을의 아낙들을 모아 술과 밥을 푸지게 대접하고 비로소 그 친정마을의 이름을 딴 명촌댁, 평동댁, 쇠꼴댁, 외양댁, 반천댁, 새말댁 등 촌, 동, 골, 양, 천, 말 같은 자가 붙은 택호를 부여받는 것이 전통이었던 거였다.

그러다보니 평소에 알게 모르게 설움이 많았던 택호도 없는 집 사람들이 재빨리 울산의 공업단지에 자녀들을 취직시켜 돈을 벌어 아무개아버지가 아무개김손, 박손에게 돈을 빌려주는 현상이 나타나고 고등학교도 농업학교가 아닌 울산이나 부산의 공업학교로 보내는 붐이 일어났다.
 

특히 울산에는 당시 반만년의 보릿고개를 물리칠 최초의 공업단지를 제 고향으로 끌어온 군사정부 최고의 실세이자 중앙정보부장인 이후락씨가 여러 개의 사립학교를 세우는 바람에 그 좁은 언양바닥의 중학교 졸업생들이 대부분 울산공고와 언양여상에  들어가서 언양농고에는 겨우 서른다섯 명의 입학생이 있을 뿐이었다.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