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 시인의 단시조 산책 (33) 몽당연필 - 박희정
이광 시인의 단시조 산책 (33) 몽당연필 - 박희정
  • 이광 이광
  • 승인 2022.06.01 10:04
  • 업데이트 2022.06.02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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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
                          박희정

 

 

내 살이 다 닳아서 없어질 그때까지

시간이 문드러져 여백을 채울 때까지

뻥 뚫린 심장의 말을

전할 수만 있다면


박희정 시인의 <몽당연필>을 읽는다.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 흔히 보아오던 몽당연필은 이젠 찾기도 힘든 물건이 되었다. 어린 시절 손가락에 겨우 쥘 정도로 짧아진 연필은 다 쓴 볼펜 자루에 끼워 그야말로 ‘내 살이 다 닳아서 없어질 그때까지’ 사용했고, 그러한 정신은 커가면서 각자의 육신에도 적용되었다. 집안을 위해, 가족을 위해 뼈가 닳도록 일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몽당연필은 아껴 쓰는 절약과 제 몸을 아끼지 않는 헌신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보여준다. 중장에선 또 이와는 다른 차원의 몽당연필의 모습이 드러난다. 문드러진 시간의 여백을 기록으로 옮기는 역할이다. 수기에 의존하던 지난 시대엔 연필은 증인으로서의 사명이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이미 과거의 이야기로 흘러가버렸다. 아날로그 시대의 가치를 고수하는 사람은 시인이나 화가와 같이 소수일 따름이다. 게다가 시인은 영상으로 무장한 세력에 밀려나 변방에 처해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이란 몽당연필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뻥 뚫린 심장의 말을’ 전하기 위해 연필을 손에 쥔다. ‘뻥 뚫린’은 ‘꽉 막힌’의 반대말로 그 속애는 타자를 향한 간절함이 담겨 있다. 자기중심적이고 물질을 우선하며 영상을 지나치게 탐닉하는 오늘날 시인이 몽당연필이 되어 전하고자 하는 그 말은 무엇일까. 꽉 막힌 심장들에 의해 외면당하고 있는 시를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인류의 일원이기에 시를 읽고 쓴다는 ‘죽은 시인의 사회’ 속 대사가 뇌리를 잠시 맴돈다. 

 

이광 시인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lkanok@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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