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159) 제3부 열찬, 또 하나의 방랑자 - 제4장 방황의 시작②
대하소설 「신불산」(159) 제3부 열찬, 또 하나의 방랑자 - 제4장 방황의 시작②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06.15 07:00
  • 업데이트 2022.06.15 0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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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방황의 시작②

읍내에는 이 새로운 공장에 많은 외지인이 몰려와 셋방이나 빈집이 동이 나자 여기저기 조그만 연립주택이나 아파트를 짓고 이에 입주한 인구가 늘어나면서 언양국민학교의 아동수도 비약적으로 늘어 한 학년 세 학급으로 200명을 넘지 못하던 입학생이 다섯 학급 300명이 넘고 있었다. 이제 진장이나 동산, 혹은 간월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았다. 농사가 많은 사람은 짚이나 보릿대로, 그렇지 못 한 사람들은 연탄을 때어 밥을 짓고 있었고 셋방살이로 흘러들어온 공장에 다니는 외지인들이 아예 석유곤로로 밥을 짓는 집도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활발하게 변해가는 와중에 아직도 그 변화의 흐름을 잘 타지 못 하고 오히려 거꾸로 가는 집이 있었으니 바로 명촌댁이었다. 명촌댁도 이제 늙어 장에 나가지 못하는 처지라 집안에 농사 외에는 별다른 수입이 없었지만 문제는 새로 들어온 농부 일찬씨가 쟁기질, 써레질을 못하는 반 벙거지에 삽질, 낫질조차 힘에 부치는 백면서생인다 김해댁마저도 농사일에 취미가 없어 삼천 평에 가까운 농토를 남의 손으로 쟁기질을 하여 부치는 판이니 소출도 적고 품삯이 나가 얼마 안 되는 퇴직금이 가을걷이를 하기 전에 바닥이 날 판국이었다.

그렇든 말든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비단 양식뿐 아니라 더러 생선이나 다른 반찬거리도 사와야 되고 <뱀가루>란 이름으로 이미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미원이란 조미료나 비누와 타월 같은 가용잡비도 들어가는 데다 두 아이의 과자 값, 중학생인 백찬이의 학비, 일찬씨의 막걸리 값, 담뱃값도 만만찮게 들어가 새 안주인 김해댁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방학이 되어 마을로 돌아간 열찬이가 급한 대로 벼논이나 콩밭을 매고 풋나무를 해다 날랐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었고 조금만 일을 해도 금방 지쳐버려 논두렁에 퍼질러 앉은 일찬씨로 부터

“열찬아, 세상에 가장 교활한 것이 사람입이라더니 그게 영락없이 맞는 말이구나. 전에 취직을 해서 조금 비싼 고급담배를 피울 때는 몰랐는데 직장을 그만 두고 조금 싼 담배를 피우니 쓰고 맵고 목이 따가운 게 정말 사람 입처럼 간사한 것이 없더구나. 마치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안다는 말처럼 말이야.”

넋두리를 듣다가

“거 힘 드는 데 막걸리나 한 사발 마시고 하자.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란다. 사람이란 그래서 일이 없어지면 죽는 법이란다.”

형제가 막걸리 한 주전자를 금방 비우곤 했다. 학생이나 직장인으로서는 참으로 알뜰하고 깔끔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지만 일개 농부로서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농사를 다른 말로 <땅 파먹는다.>고 하는데 체격이 작고 얼굴이 희고 단아한 일찬씨는 아무래도 그 땅 파먹는 체질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버든의 이씨집안이 영 그렇게 몰락일로를 걷는 것만은 아니었다. 우선 복미대자라는 희성의 조금 부족한 처녀에게 장가를 든 장남 동찬씨는 여전히 언양장마당을 쓸었지만 이젠 단순히 시장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면사무소에 고용된 청소원이 되어 시장바닥은 물론 언양사거리의 큰 길을 쓸고 면사무소의 소각장을 관리하는 당당한 임시직원이 되어있었다. 벌써 용선이라는 딸과 우철이라는 남매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용선이라는 큰 딸은 늘 기미가 낀 검은 얼굴에 아무 생각 없이 왔다갔다 먹고 마시며 지껄이는 제 어미와 달리 키나 몸매도 훤칠하고 동그란 얼굴에 이목구비도 반듯해 얼핏 보면 꽤 괜찮은 집의 귀한 딸처럼 보였지만 머리가 돌아가는 것은 역시 제 어미수준이라 학교에 갈 나이가 다 되어도 공부할 생각을 않고 그저 덩치만 초여름의 쑥 잎처럼 뭉글뭉글 잘도 자라났다.

또 우철이라는 아이는 얼굴도 넓고 어깨도 쫙 벌어진 장군감으로 생겨 명촌댁이 그 옛날 증조모의 오라비인 시외삼촌 곰쇠를 닮았다고 속삭이자 큰동서 상남댁이 꼭 그렇다고 맞장구를 칠 정도였다. 그런데 어쩐지 걷는 것도 말을 배우는 것도 느리고 무엇보다 하루 종일 말이 잘 없으며 그 어린 나이에도 무뚝뚝하다 못 해 우울해 보이는 정도였다. 아무튼 어릴 때부터 다리도 아프고 성격도 암 되어 종손의 역할은 물론 아무 존재감도 없이 살던 동찬씨는 영판 자신을 닮은 종손을 키우면서 천하태평, 생애 최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2남2녀에 가는귀가 먹은 노모를 모신 가난한 농부 정찬씨도 이웃 아주머니들의 소개로 몇 번이나 새 여자가 들어와 보름도 못 버티고 떠나버린 후에 마침내 제대로 된 참한 후처를 얻었다. 큰 아들 용우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열다섯이나 되는 딸을 하나 데리고 온 사십이 좀 넘은 임씨성을 가진 과수댁이었다. 덕천고개 너머 수남에 사는 이씨네의 종손인 상도씨가 촌수는 높아도 나이는 적은 아저씨뻘에게 중매를 선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들어온 후처, 약간 작은 키에 마른 몸매와 좁고 야무진 인상의 새 아내는 별다른 조건도 없이 다만 자기가 데리고 오는 딸을 이씨네 집안의 호적에 올려 친딸과 꼭 같이 키워 시집을 보내주면 아직 코흘리개인 네 살짜리 우찬이를 포함한 네 아이를 두말없이 잘 거두겠다는 조건만을 걸었다. 그리고는 약속대로 몇 년간이나 주부가 없었던 집안을 안방과 부엌은 물론 장독간과 헛간, 심지어 헛간과 측간까지 반들반들 윤이 나게 치우고 씻고 닦는 것이 보통 깔끔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비록 잘 먹이고 잘 입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처자식 넷을 매일 씻기고 깨끗이 빤 옷으로 갈아입혀 금방 아이들의 얼굴이 읍내의 아이들처럼 하얗고 반질반질해졌다.

그렇게 버든의 두 이씨네, 상남댁과 명촌댁은 수남댁과 김해댁이라는 새로운 며느리들이 들어오고 이제 머리가 하얀 상노인이 된 두 동서는 뒷전으로 물러나 손자들이나 돌보는 처지가 되었다.

 

방학이 끝나고 부산으로 내려오면서 2학기 등록금이 어떻게 되느냐고 일찬씨나 김해댁도 물어보지 않았고 열찬이도 입 밖에 꺼내지 못 했다. 등록은 하지 못했지만 열찬이는 여전히 초량6동 선화여상 앞의 판자촌에서 대청고개를 넘어 인분냄새가 풀풀 나는 동대신동의 시금치 밭을 지나 야간대학에 다니며 돈 버는 동급생들에게 막걸리 잔이나 얻어 마시며 지냈다.

캠퍼스의 게시판에는 2학기 미등록 학생들은 언제까지 꼭 등록을 하라, 만약 그 때까지 등록을 않으면 정학조치가 되고 정학조치가 반복되면 퇴학조치가 된다는 공고가 붙었지만 현재로서는 달리 대책이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열찬이가 아직도 미등록상태인 것을 같은 동급생들이 알지 못 한다는 것이었다.

그해 9월에 부산시로부터 발령이 났는데 그는 언양과 가까운 동래구로 지원했고 다시 진외가의 6촌 형인 화옥이, 원규형제가 사는 연산3동사무소를 지원해 발령을 받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기왕에 야간대학과 가까운 서구나 중구 같은 시내를 지원했으면 교통비라도 덜 들었을 텐데 단지 한 마을에서 자란 먼 피붙이인 진외 6촌 형들이 있다고 연산동 을 택한 우를 범한 것이었다. 1공구와 3공구라는 초량 45번지, 부산역전의 대화재로 소실된 판자촌에 살던 이주민들이 몰려온 정책이주지라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기피지인 달동네를 스스로 지원한 셈이었다.

그러고 보면 먼 지리산에서 흘러온 부처손이란 별명을 가진 곰쇠와 부처손 남매에서 흘러온 핏줄은 그 손자 대에 와서도 여전히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아니 핏줄을 못 속인다는 말처럼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끈끈한 접착력이 흐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서상균

정책이주지로 불리는 첫 발령지 연산3동사무소는 그야말로 무법천지난장판이었다. 동직원이 서넛밖에 없는 사무실에 철거민의 6평짜리 슬레이트집 입주권마저도 팔아먹은 주정뱅이들이 산꼭대기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다 철거를 당해 알거지가 되거나 젊을 적의 사고로 팔다리가 잘리거나 결핵에 걸린 환자들이 몰려와

“공무원 너거는 밥을 쳐묵었나? 못 사는 나는, 또 내 식구는 사흘을 굶었다!”

땡깡(트집)을 부리기가 예사였고 관내를 한 바퀴 둘러보면 나지막한 판잣집이 늘어선 골목 여기저기에 누런 황토 흙이 드러나 빗물이 고이고 쓰레기가 드문드문 한 사이로 고물장사의 리어카가 간간이 다니는 것이 영판 역마차가 다니는 서부영화에서나 보는 황야의 모습이었다. 언제 어디선가 불시에 총을 든 무법자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숙직실에서 잠을 자면서 10월의 첫 월급을 탄 열찬이는 중앙동의 산업은행으로 다니는 중학교동창인 박원택이를 찾아갔다.

2학기 등록금이 모자라니 좀 빌려달라고 하니 국민학교는 달라도 중학시절엔 성적이 엇비슷했던 착한 친구는 두 말없이 그러마고 하며 열찬이로서는 엄두도 못 낼 갈비탕이나 소금구이 같은 고급음식을 사주기도 했다. 가끔 자기가 숙직을 하는 날이면 미리 열찬이에게 연락해 수업을 마친 열찬이와 숙직실에서 밤새 바둑을 두기도 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당시 공무원은 월급이나 대우가 형편이 없어 공무원 숙직비는 달랑 돼지국밥 한 그릇 값에 못 미칠 정도였는데 은행의 숙직비는 거의 열배 가까이나 되어 열찬이는 늘 부러워했고 그런 친구를 위해 원택이는 늘 넉넉히 술밥을 사 먹였다.

그러나 그런 열찬이에게도 그 좁고 지저분한 숙직실로 찾아오는 친구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당시의 부산은 별 능력도 기술도 없는 시골청년들이 우르르 몰려오긴 했어도 쉽게 터를 잡을 수 있는 만만한 도시가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시끄럽고 혼란스러우면서 조금씩 인구가 늘고 항만이 개발되고 공장이 늘어가는 아직 제대로 성장하기 전의 사춘기에 가까운 도시였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열찬이의 숙직실을 찾아오는 친구 중에는 이제 조방 앞으로 터미널을 옮긴 시외버스의 조수인 김용호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열찬이와 국민학교 6년간을 한 반에서 지낸 고추친구로서 언양장터 멸치가게 아들이었다. 형제도 많고 살림도 넉넉했지만 애당초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 늘 언양차부의 하얗게 반짝이는 버스의 번호판과 운전수아저씨 이름을 달달 외우더니 과연 어릴 적 희망이던 운전수가 되기 위해 그 첫걸음으로 조수가 된 것이었다.

조방 앞에서 마지막 운행을 마치고 부산에서 자는 날이면 용호는 미리 동사무소로 연락해 수업을 마친 열찬이와 자동차 기름이 둥둥 뜨는 비포장 물구덩이의 차부광장과 골목길을 지나 돼지국밥집에서 오래도록 술을 마시고 밤하늘에 대고 노래를 불렀으며 어떤 날은 아가씨가 있는 술집에 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시외버스조수나 동사무소직원의 호주머니는 한 달에 사나흘이나 돈이 돌 정도라 대부분의 밤을 열찬이의 동사무소숙직실에서 구멍가게의 외상소주와 오징어로 밤을 세우며 술을 마셔야했는데 어떤 날은 6원짜리 시내버스인 3번 학성여객의 조수인 백영일이란 친구가 들러 같이 어울리기도 했다.

연산3동 비탈길의 조그만 슬레이트집의 큰 형님집에 얹혀살며 형수의 눈치가 힘이 들어 퇴근길이면 늘 동사무소에 들려 열찬이가 숙직을 하는지 살펴보는 이 친구는 버든에서 언양장터로 들어가는 초입에 살면서 농사도 바로 열찬이네와 붙은 논을 부치던 가까운 사이였다. 열찬이네 집은 물론 모든 버든사람들이 <백손댁>이라고 부르던 집의 넷째 아들이었다. 인물은 멀겋지만 공부는 중간정도였던 그 아이가 유명하게 된 건 5학년 땐가 한 번 시험지에 이름을 쓰면서 <백영일>이 아닌 <101>로 써 담임선생에게 혼쭐이 난 사건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영일이와 같이 언양장터바 닥에서 같이 자란 김용호도 국어시간에 교통안전 표어를 쓰면서 <부산 가는 뻐스야, 요롱소리 빵빵 내라!>라는 천하명문으로 단번에 스타가 된 적이 있었는데 술이 한 잔 들어가며 서로가 상대방의 사건을 들먹이면서 웃었다.

 

열찬이네의 숙직실을 찾는 친구가 비단 이들뿐이 아니라 기가 막힌 방문객 하나가 있었으니 이는 주야불문 사무실과 숙직실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박일창이였다. 열찬이가 대학교와 가까운 시내가 아닌 6촌 형들이 사는 연산동을 근무지로 택한 점이 가장 잘못된 부분은 바로 그의 동사무소에서 20분 거리에 천하의 골칫거리 박일창이가 산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었다.

어느 날 창구에서 주민등록등본이랑 인감증명을 발급하느라 용지사이에 먹지를 넣고 볼펜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써내려가는 열찬이의 머리를 누가 툭 치는 것이었다. 가까이 지내는 직원이나 통장인가 싶어 고개를 들던 열찬이 흠칫 놀라고 말았다. 가뜩이나 쾡한 얼굴의 일창이가 눈에 핏발이 벌겋게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어, 일창이. 니가 우째...”

세상에 할 짓이 없어 친구의 페인트 값을 사기치고 도망간 친구, 적어준 전화번호로 아무리 찾아도 그런 사람이 없다던 네가 어째 나타났는가, 설마 페인트 값을 갚아주려 온 것은 아니겠지, 곰곰 머리를 굴리는 열찬이에게

“열찬아, 니는 밥 묵었나?”

금방이라도 눈물을 주르르 흘릴 것만 같은 불쌍함이 물씬 풍기는 말투에 사무실의 직원들과 민원손님들이 일제히 둘을 쳐다보았다.

“나는 밥을 굶었다. 그라고 여 쫌 봐라. 우리 조카들도 며칠이나 밥을 굶었다!”

그러고 보니 민원대 너머로 열 살이 채 안 되는 소녀와 그보다 어린 남매가 오래 굶은 초췌한 얼굴로 열찬이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어린 사내아이는 얼굴에 땟물이 쪼르르 흘렀다. 흘낏 뒤를 돌아보자 동료 김 주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와 대신 열찬이의 의자에 앉았다.

“가자!”

열찬이가 사무실 밖으로 나오자 일창이와 아이들이 뒤따르고 사무실의 눈길들도 골목길을 돌아설 때까지 뒤를 쫓았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