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160) 제3부 열찬, 또 하나의 방랑자 - 제4장 방황의 시작③
대하소설 「신불산」(160) 제3부 열찬, 또 하나의 방랑자 - 제4장 방황의 시작③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06.16 07:00
  • 업데이트 2022.06.16 2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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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방황의 시작③

열찬이가 사무실 밖으로 나오자 일창이와 아이들이 뒤따르고 사무실의 눈길들로 골목길을 돌아설 때까지 뒤를 쫓았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어 자연히 단골이기도 한 돼지국밥집에 들어가 음식을 시키니 여섯 살 정도의 막내도 악착같이 자기 몫 한 그릇을 시키더니 아구아구 퍼먹기 시작했다. 기가 찬 열찬이가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열, 열찬아, 미안한데 소주 한 병 하면 안 되나? 내 소주 묵어본 지가 한 달도 더 된다.”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지매, 여게 소주 한 병!”

소리친 열찬이가 맛있게 소주를 들이키는 일창이를 보며

“야, 일창아.”

굳이 페인트 값뿐 아니라 저간에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려고 운을 떼는데

“열찬아, 미안하고 부끄럽다. 내가 니 뼁기 값도 그렇고 체면도 그렇고 마 쥐약이라도 묵고 팍 죽어뿔라고 했는데 이 아아들 우리 누님의 아이, 안나, 순나, 순철이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다. 진짜로 미안하고 부끄럽다이.”

커다랗고 벌건 눈동자를 방금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처럼 이리 저리 굴리더니 다시 열찬이가 말을 꺼내지 전에

“우리 자형의 횡령사건으로 우리 집안의 논밭과 집이 다 날아가고 할배는 어기가 막혀 돌아가셨다. 부산 연산동 물만골 판잣집으로 야반도주해서 엄마는 연산시장서 헌옷을 팔고 할매는 난전에서 단추를 팔고 누나는 다방의 가오마담을 하고 출소한 자형은 노가다 일을 배우면서 여덟 식구가 근근이 살았지. 그런데 우리 누나가 유방암으로 죽더니 반년 만에 우리 엄마도 유방암으로 죽었다. 돈을 번다고 객지로 나간 자형도 몸을 다쳤는지 편지도 돈도 안 부쳐오고 소식 없는 지 오래다. 할매가 파는 단추 장사는 하루에 라면 몇 개 값도 못 벌고 그나마 밑천만 까묵는다. 내가 마 팍 죽어뿌야 되는데 이 아아들 때문에 우리 안나, 순나, 순철이가 불쌍해 죽지를 못 하고...”

그간 일창이가 열찬이 말고도 원택이랑 용호랑 다른 친구들에게도 사기를 치거나 구걸을 다닌다는 소식을 여러 번 들었던 열찬이가

“그럼 일창이 니는...”

넌 왜 일을 않고 친구들 등이나 치느냐고 물으려는데

“열찬아, 우리 집에 쌀이 없다. 아니 먹을 것이라고는 건빵 한 쪼가리도 없은 지가 며칠이나 된다. 우리는 인자 밥을 먹었는데 감기 걸린 할매가 며칠이나 굶었다.”

또 금방 울듯 한 목소리였다. 이번엔 가게주인과 손님들이 눈길이 그들을 에워쌌다.

“가거라. 이것밖에 없다.”

얇아터진 동사무소직원의 호주머니를 톡톡 털었다.

“고맙데이. 열찬아...”

또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가 이제 우짜든동 니가 알아서 벌어먹고 다시는 오지마라 말하려는 열찬이의 입을 막아버렸다. 큰놈 안나가 고개를 숙여 꾸벅 절을 하자 동생 둘이 따랐다. 막내 사내아이는 씨익 웃어보기기까지 하며 그들은 돌아섰다.

“가주사, 밥값이 많이 밀맀데이.”

“알겠심더. 월급날 봅시더.”

빈털터리가 된 열찬이 아직도 영화 「서부개척사」의 마차가 다님직한 도무지 정비되지 못한 울퉁불퉁한 판잣집 골목을 터덜터덜 걸어 동사무소로 갔다.

 

1972년 가을. 동직원 가열찬의 마음은 점점 초조하고 불안해갔다. 야간대학은 등록금을 내지 못해 등교를 하지 않은 지가 일년 가까이 되어가고 국문과친구들과의 소식도 끊어졌다. 선정기라는 동창이 전화를 한 번 해오기는 했지만 다들 살아가기 바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금방 멀어지는 모양이었다.

돈이 생기면 등록을 하리라 하루하루 미룬 것이 이제는 등록마감기한도 한참이나 지나 아마도 제적이 되었으리라 생각하면서 휴학마저 하지 못한 난처한 지경이 되었지만 한 학기 6개월 치를 몽땅 모아도 등록금에 모자라는 공무원월급에 생활비가 들어가니 복학할 기약도 아득했다. 국어국문과를 나와 소설가가 되겠다는 당초의 꿈은 희미하게 멀어져가고 5급을류 말단공무원의 고단한 하루하루가 그의 앞에 놓여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날마다 칙칙한 절망과 우울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울분의 술잔을 나누던 가장 친한 직원 윤정씨마저 그가 입대를 며칠 앞둔 어느 날 갑자기 잠적해버려 이제 단 한 사람 남았던 말상대마저 없어져 버렸다.

“그까짓 휴학은 아무것도 아니야, 첫사랑의 실패나 짝사랑도 아무것도 아니야, 난 첫사랑이 죽어버렸잖아? 죽어버렸단 말이야. 나 때문에, 아니 땟놈 중국인며느리를 볼 수 없다는 우리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나의 첫사랑, 구원의 여인상이 죽어버렸잖아? 열찬이 니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야, 둘 다 대학을 그만둔 마당에 휴학은 제외하더라도 우리 둘의 슬픔은 급수가 달라. 넌 일단 순영씨가 살았잖아? 연인이 죽어버린 사람과 연인이 냉정한 사람과 누가 더 슬프단 말인가? 열찬이 넌 아무것도 아니야, 니 슬픔은 내 슬픔의 반동가리기밖에 안 돼.”

근 일 년이 넘게 술만 마시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중얼거리던 같은 동직원 윤정씨는 그의 부모가 김해군 대저면 도도리 낙동강변의 펄이 많은 모래밭에서 악착같이 부추를 길러 번 돈으로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시킨 나름 시골마을에서 소문난 수재였다고 했다.

그 잘난 아들을 위해 그의 부모는 한 평생을 딱정벌레처럼 엎드려 하늘 한 번 쳐다보지 못하고 검은 모래밭을 일군 돈으로 아들이 거처할 집을 사고 또 언젠가 농사를 짓지 못할 만큼 늙으면 도시인 부산으로 내려오려고 연산동 신개발지역에 집을 사라고 여러 동의 집값을 주었다.

그러나 날마다 그 끝없는 슬픔, 죽은 연인을 슬퍼하며 열찬이와 밤새도록 마신 술값에 그 대저면 정구지를 판 집값들이 거의 다 날아가고 말았다.

마침내 천식과 당뇨가 심한 아버지가 남동생 둘, 여동생 셋과 어머니까지 일곱 식구를 거느리고 부산으로 내려왔을 때는 겨우 연산동의 2층집 하나만 남았고 체면이 서지 않은 윤정씨는 동사무소에도, 열찬이에게도 알리지 않고 어디론가 잠적해버린 것이었다.

날마다 윤정씨를 찾아다니던 어머니는 열찬이만은 아마도 행방을 알고 있으리란 의심을 늘 품고 있었고 마침내 아직 고등학교졸업반인 여동생 차숙이를 보내 오빠가 갔을 만한 곳을 죄다 뒤지게 했다. 연산동과 양정과 서면의 술집은 물론 남포동 할매국수집과 완당집, 자갈치횟집촌과 충무동골목시장의 찌짐골목과 <계단위의> 완월동골목까지 뒤졌지만 하사였다.

ⓒ서상균

윤정씨가 집 몇 채 값을 마셔버리는 동안 열찬이라고 낭비를 않은 것은 아니었다. 월급에서 생활비를 제한 단 몇 푼이라도 언젠가의 등록금을 위하여 저축을 하였으면 좋으련만 윤정씨와 어울리는 사이 그 얄팍한 호주머니도 돈이 씨가 마르고 동사무소 주변의 술집마다 외상술값이 대추나무 연 걸리듯 했다. 그러다 보니 굳이 월급이 아닌 세금이나 수수료도 다음 월급날 채워 넣는다며 써버리고 미처 못 메우는 것은 물론 나중에는 타성에 젖어 몇 건에 얼마인지도 모르는 지경이 된 것이었다.

거기다 더 기가 찬 것은 친구 일창이가 직원들에게 저지른 빚까지 청산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열찬이가 외근을 가는 것을 밖에서 훔쳐보던 일창이가 동사무소로 들어가 직원들에게 자신이 열찬이와 둘도 없는 단짝친구라고 소개를 하자 이미 한 두 번 본 일이 있는 직원들이 아는 척하며 앉으라고 했다. 의자에 앉아 한참이나 사무실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말을 붙이던 일창이가 마침 책상 위에 고급카메라가 놓여있는 김재희라는 남자직원에게 ‘내일 자신이 이름만 대어도 다 아는 부잣집 딸과 선을 보러 가는데 그 카메라만 빌려주면 한결 의젓해 보이겠다, 제발 좀 빌려 달라.’고 했다.

열찬이의 친구인지라 재희씨가 의심 없이 빌려주었고 ‘이번 맞선이 성공하여 부잣집사위가 되면 아주 단단히 한 잔 사겠다.’며 문을 나서던 일창이가 다시 김승호라는 직원에게 팔목에 찬 시계를 좀 빌려달라고 하자 <세워놓고 코를 베어간다.>는 서울출신 서울깍쟁이인 승호씨마저도 아무 의심도 없이 빌려주었다. 그러나 출장에서 돌아온 열찬이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하지도 않을 만큼 단단히 믿었던 그들의 순진한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일창이는 이튿날도 그 다음날도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열찬이가 멋쩍고 민망해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직원들도 차마 열찬씨를 어쩌지도 못 하고 ‘친구 일창씨의 집을 좀 알아 달라.’고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승호씨의 팔목시계야 제가 산 것이니까 문제가 아니었지만 재희씨의 카메라는 월남전 참전용사인 집안의 형이 귀국 때 가져온 고가품으로 그 전 주말에 애인과 나들이를 가며 잠깐 빌려다 쓴 것이었다. 자신의 몇 달치 월급액수보다도 비싼 카메라 값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져 재희씨는 마침내 ‘내 일창인지, 열창인지 가주사 친구 놈을 만나기만 하면 아예 작살을 낼 것이다.’고 별렀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오던 일이 열찬이의 입대 날이 가까워오자 마치 폭풍전야처럼 금방이라도 무언가 터질 것만 같은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열찬이가 연산시장 난전에 일창이의 할머니가 단추장사를 한다는 것을 떠올리고 어느 날 퇴근길에 멀찍이서 바라보니 마침 일창이의 생질 안나라는 아이가 할머니와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더니 돈 몇 푼을 받아 국수다발을 사들고 신리삼거리 도로를 건너 2공구의 판자촌을 지나 물망골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세상에 명색부산이라는 대도시에서 이렇게 사는 사람이 다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스듬한 산비탈의 경사면에 커다란 오리나무 하나를 의지한 조그만 루핑집으로 안나가 들어가더니 이어 귀에 익은 일창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현관도 없는 문 앞에 눈에 익은 일창이의 운동화가 보였다.

“일창아, 이 의리 없는 새끼야!”

열찬이가 득달같이 덮쳤지만 눈물을 질금거리며 싹싹 손을 빌며 ‘이것 보라고. 지금 사흘이나 굶고 우리 할매가 단추 판 돈으로 국수를 사온 것을 보라.’며 울먹이는 커다란 눈동자와 방금 숨이라도 넘어갈 듯 벌벌 뜨는 모습밖에 돌아오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한참이나 다그치니 호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한 전당표 두 장을 꺼내주었다. 그나마 전당잡힌 액수가 비싼 카메라와 시계의 반값도 안 되는 것이 다행이었다. 결국은 그게 다 열찬이가 입대 전에 물어주고 갈 액수였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