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161) 제3부 열찬, 또 하나의 방랑자 - 제5장 가장 서럽고 황홀한 가을
대하소설 「신불산」(161) 제3부 열찬, 또 하나의 방랑자 - 제5장 가장 서럽고 황홀한 가을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06.17 07:00
  • 업데이트 2022.06.18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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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장 서럽고 황홀한 가을

이 가을엔 꼭 한 번
잊었던 당신을 만나고 싶다
빨간 사과 단내 나는 바람맞으며
수수 익는 들길을 걷고 싶다.
해마다 가을이면 풀벌레 울고
풀벌레 울 때마다 슬퍼지는 건
이승 모든 만나고 헤어진 사람
가을마다 잊어지다 다시 그리워
당신은 내 마음속 헤엄치는 잠자리
투명한 나래짓 나를 깨우고
당신은 코스모스 무지개 빛깔
어질어질 환상으로 살아나는 꽃
당신을 이 가을에 만나고 싶다
발그레한 부끄러움 석류 벙글면
은근한 웃음 띠고 손 맞잡고
노루 우는 산길에서 만나고 싶다.
....
 

다시 그녀에게 편지조차 쓸 수 없는 세월이 한참이나 흘러 열찬이는 어느 듯 스물두 살의 청년이 되어 동사무소를 출입하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잡다한 업무에 파묻혀 있었다.

먼지 쌓인 창틀과 고린내 나는 양말로 어둑하게 갈아 앉은 따분한 자취방이 있었지만 거기서 자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았고 밥을 하는 날은 더욱 귀했다. 술이 취해 아무 곳에서 자거나 동사무소 숙직실에 기어들어가는 날이 대부분이었고 따로 빨래를 하기도 뭐해서 입성이나 신발도 형편이 없었다.

한마디로 야간대학 국문과를 나와서 국어교사를 하면서 국문학박사나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이 완전히 박살난 셈이었다. 울고 싶더니 뺨친다고 마침 실연으로 부산대학교 의대를 자퇴한 직장선배 윤정씨를 마나 날마다 술을 마시고 당구장을 돌고 어떤 때는 완월동을 기웃거리기도 하며 한 순수한 시골청년이 서서히 가장 속물적인 도시의 청년, 아무 희망도 의지도 없이 방황하는 소시민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고향에는 농협에 다니던 그 과하게 명석한 형님이 이제 체질에 맞지 않는 농사를 접고 중등학교 교사자격 국가고시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 폭발적인 우울증이 다시 온 집안을 암흑과 공포 속에 몰아넣는 중이라 과히 정을 붙이거나 찾아갈만한 곳도 못 되었다.

수중에는 한 푼의 저축도 없이 몇 푼 안 되는 공무원 월급으로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급급하면서 저녁마다 술을 마셔 오히려 외상값이 여기저기 걸리고 자취방에는 남루한 옷가지 몇 벌과 빛바랜 현대문학 고본들과 몇 권의 시집과 소설책과 습작노트들이 식탁 겸 책상인 낡은 호마이가 판 위에 어지럽게 널려있고 방바닥은 자주 닦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았지만 그걸 쓸고 닦을 염도 없었다.

 

거기다 입영영장이 나와 일주일 후면 입대를 해야 하는 어느 날이었다. 연산3동 1공구, 그러니까 부산역전대화재로 인한 초량동 45번지 철거민들의 집단이주지인 그 곳의 방 하나 부엌 하나의 6평짜리 슬레이트집에 깃든 혼자 사는 노인들과 폐병 든 일가족들에게 밀가루 배급을 주고 연탄가스가 새지 않는지 돌보는 사회업무를 맡은 그가 모처럼 한숨을 돌리며 화장실 가는 모서리의 쥐똥나무그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윤정씨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것이었다.

“와 요? 형님.”
“전화 왔다. 여자전화.”
“전화요?”

자신에게 올 만한 전화라야 어쩌다 한번 씩 부산에 내려오면 지나치는 걸음에 전화를 해서 연결이 되면 술밥이나 얻어먹고 가는 언양의 초중고동창생들이나 벌써 만나지 않은 지가 반년도 넘은 야간대학동창 정도지만 이제 입대를 앞두고 다시 만나 어울리기보다 조용히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고 전화를 할 만한 젊은 여자는 더더욱 없는 지라 혹시 외상술값 독촉일지도 몰라 그는 시큰둥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야. 목소리가 기가 막힌 젊은 여자야, 여자!”

그가 손가락 두개를 입술에 갖다 대며 쉬잇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자라...”

딱히 전화가 올만한 여자가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내게

“임마, 순영씨야, 나순영씨!”

“...!”

그의 입에서 순영씨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만 열찬이의 가슴이 박상기계 아가리를 여는 순간처럼 펑 터지는 것 같더니 쿵 내려앉고 말았다.

“순영씨, 아아, 순영씨라, 순영씨...”

넋을 놓는 그에게

“임마, 전화부터 받아, 정신 좀 차리고.”

울분 속에 술이 취해 짝사랑으로 끝난 실없는 첫사랑의 전말과 아름다운 순영씨의 눈빛과 하얀 살결과 단정한 걸음새에 관해 술자리에서 지겹도록 들은 윤정씨가 관심과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 여보세요?”

“저 나순영인데요. 갑자기 전화를 해서 놀라셨나요?”

그렇게 시작된 통화는 너무 뜻밖이라 특별한 이야기도 없었지만 자세히 기억조차 나지 않은 채 그냥 가슴이 콩닥거리는 상태에서 이튿날 저녁 만나자는 약속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참으로 뜻밖의 일이었다. 그간 하루라도 생각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첫눈처럼 깨끗하고 순수하고 가슴을 뛰게 하는 첫사랑의 그녀에게 정작 직장을 가지고 객지로 나오면서 단 한 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처음 대학교에 진학할 당시에 연락을 해볼까 했지만 상대가 아직 고등학교졸업반이라 조금만 기다려 그녀가 졸업을 해 다 같이 사회인이 되면 한다는 생각을 차일피일 미루고 실행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후 막상 그녀가 사회인이 된 후에도 이번에도 혹시 묵살당하면 어쩌나, 사춘기의 순수한 짝사랑마저 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은 우려로 또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돈이 없어 대학교를 휴학하고 윤정씨를 만나 매일 술을 마시고 도시의 뒷골목을 헤매면서 차마 다시 그녀를 첫사랑이라고 부르거나 찾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많이 타락하고 속물화된 자신을 자책하기도 하고...

그렇게 늘 아쉬움과 자격지심에 빠져있었지만 간혹도 맑은 정신으로 잠이 깬 새벽에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회한에 가슴이 내려앉고, 고지대 판자촌의 외근 길에서, 복잡한 도심, 길게 뻗은 길과 먼 바다를 보며 한번 씩 떠오르면 가슴 가득 벚꽃이 피듯 분홍빛이 감돌다가도 이내 깊은 심연에라도 추락한 듯 가슴이 어둠으로 가득 차는 것이었다. 그런 날은 밤마다 윤정씨와 아직도 실연과 휴학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 한 아픔의 술판이 벌어지고 그 좌절의 술자리가 파하면 어두운 담벼락에 대고 왝왝거리며 토하거나 노상방뇨를 하면서 낮게 불러보다 마침내 울부짖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만난 지 4, 5년이 되도록 자신으로 인해 온갖 고초와 애로를 겪었음에도 그때까지 단 한 번의 원망이나 타박도 없었던 여자, 마치 그 모든 일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것처럼, 차라리 남의 일이나 국외자라도 된 듯 말 한마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그녀에게서 갑자기 먼저 전화가 오다니, 그리고 한번 만나자고 제안이 오다니...

머릿속이 온갖 상념으로 뒤엉켜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갈피도 잡을 수 없었고 얼굴을 떠올리려 해도 여고생이 되고나서 두어 번 훔쳐본 쌍갈래로 땋은 머리채를 나풀거리며 여상 앞의 신작로와 작천정 벚꽃 길을 걸어가던 단정한 걸음걸이 뿐이라 이제 스물셋이나 되는 성숙한 처녀의 모습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일과가 끝나고 그보다 나이가 여섯 살이 많아 형님이라고 불리는 윤정씨가 우선 진정하라며 돼지국밥집에서 소주반주를 겸한 저녁을 사주면서 한 가지씩 차근차근 풀어나가자고 했다. 우선 이렇게 연락이 왔으니 일방적인 짝사랑이 아니라 저쪽에서도 상당한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로 졸업을 하고 성인이 된 후에 여자가 먼저 전화를 한 것은 상당한 호감 또는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나 설계 같은 것이 있는 것이 틀림없으니 너의 첫사랑은 마침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겠다며 그는 매우 신이 나서 자기 일처럼 즐거워했다. 멋쩍은 가출에서 돌아와 부모나 가족에게 볼 낯도 없이 무엇 하나 즐거운 일도 없이 지내는 판에 모처럼 신명나는 일이 생긴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튿날 저녁으로 약속된 만남을 위해 당시만 해도 귀했던 자기의 손목시계를 아낌없이 풀어 열찬이의 팔목에 채우더니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이발을 하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이발을 하고 출근을 하자 세탁소에 맡겨둔 자신의 춘추복양복을 찾아와 열찬이에게 입혔다. 사실 열찬이는 그때까지 변변한 양복 한 벌이 없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구두를 닦아서 벗어주었지만 누대에 걸쳐 농사꾼으로 진화한 열찬이의 발등이 너무 높아 또 다른 키 큰 직원의 구두로 바꿔 신게 했다. 그리고는 다들 잘 갔다 오라면서 응원을 했다. 그렇게 그는 약속장소 곰다방으로 향했다.

아아, 곰다방!

그의 일생을 두고 출입했던 그 많은 다방과 커피숍과 카페, 파리나 나폴리의 노천카페보다도 죽을 때까지 더 또렷이 기억에 남을 첫사랑과의 첫 만남을 가진 그 촌티 나는 다방은 2공구 3거리와 브니엘중고등학교 사이, 연산초등학교 약간 아래에 있었다. 열찬이가 근무하던 1공구의 와는 1km가 조금 넘는 거리였는데 그 길지도 짧지도 않은 거리를 걸어가면서 그는 온갖 생각에 빠져 기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지만 가장 심각한 걱정거리는 그녀와의 첫 인사를 어떻게 할까하는 걱정이었다.

물론 마산까지 백일장을 갔다 오던 1박2일 동안 말은 주고받았겠지만 사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둘이 마주보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그 엄청난 고민은 떨리는 가슴으로 문을 열자말자

“오셨어요?”

차분하고 반갑게 맞이하는 그녀의 첫 마디와

“아, 예에...”

그의 어눌한 얼버무림으로 쉽게 끝나고 둘은 서로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하다 서로 민망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바라보며 엽차를 마시고 커피를 마셨다.

그동안 정말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 긴 편지들에서 말했지만 나는 정말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이나 단아한 기품을 좋아하고 그런 당신을 위해, 당신의 남자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지만, 좌우간 설악산수학여행의 일로 당신을 힘들게 해서 너무나 죄송하다, 운운 손에 든 엽차 잔을 덜덜 떨면서 그가 더듬거리며 사과조의 이야기를 늘어놓자

“괜찮습니다. 가열찬씨! 천천히 이야기하세요.”

그윽한 눈빛으로 그를 안정시키며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처음 그의 편지를 받았을 때 너무나 당황했지만 굳이 좋다, 싫다를 떠나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아마도 처음 대하는 남자의 접근이랄까 숨결이라 그런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다 점점 잦아지고 길어지는 편지에 어떡하나 두려움이 생기면서 대학노트 한 권에 온통 나순영이란 자기 이름 석 자로 가득채운 편지를 받고는 정말 큰일 났다, 이제 벗어날 수도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하면서 수학여행의 일등 민망한 일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대체로 상대가 편안한 기분이 되도록 신경 쓰는 느낌이었다.

다시 찬찬히 뜯어보니 정말이지 그녀는 아름다웠다. 둥글고 윤곽이 반듯한 하얀 얼굴도 그대로였지만 그간 맑고 크며 희고 검은 동공과 흰자위의 대비가 뚜렷한 눈빛도 더 깊어지고 광채도 더 진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쌍갈래로 땋던 머릿결은 단정한 쇼트커트에 귀밑을 감싸는 선이 우아했고 너무 반듯한 이목구비와 당당한 표정도 그대로인데 늘 쭈뼛거리는 그를 의식해서인지 자주 엷은 웃음을 띠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입대를 앞둔 스물두 살이니 그녀는 이미 스물세 살의 혼기에 가득 찬 성숙한 처녀였던 것이었다.

이어 그녀는 그가 그 힘든 대학교예비고사를 합격하고 야간대학교에 입학해 대학축제에서 당편소설이 당선되고 비록 신문지 한 장 크기이지만 국어국문과의 동인지발간을 주도하고 열심히 창작에 몰두한 점을 칭찬하며 자신도 이제껏 말은 않았지만 열찬씨의 행적을 꾸준히 파악하며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