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1994년 세상을 떠난 화가 베타 한손의 어린 시절을 사라 룬드베리가 다시 살려낸 그래픽 노블이다. 그래픽 노블은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쯤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그래픽 노블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정의definition이자 폄훼에 가깝다.
책 표지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어린이책이란 글귀에 사로잡혀 그림책은 어린 아이들이나 보는 책이라는 ‘편견’만 없다면, 이 책은 꿈을 좇는 세상 모든 여자들의 ‘인생의 책’이 될 만큼 절실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베타 한손은 화가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 20세기 초 스웨덴의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여자아이에게는 불가능한 선택지였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진흙으로 새를 빚거나, 마음에 와 닿는 풍경이나 동물들을 그림으로 표현하곤 했다. 답답한 현실과 아득한 소망 사이에서 어린 베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녀가 태어난 지 100여년이 지난 지금,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내게도 어린 시절 ‘베타의 진흙’이 되어주었던 책들이 있었다. 요즘엔 한 두 알의 약 복용으로 통원치료가 가능한 신장염이 그 시절엔 몇 달씩 입원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중병’이었던 탓에 콩팥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는 사실상 감금에 가까운 칩거생활을 강요받았다. 꼼짝할 수 없는 몸. 갇혀 지내다시피 했던 내겐 병에 대한 공포나 통증보다 심심한 하루하루가 더 큰 고역이었다. 맞벌이인 부모님이 나가시고 나면 혼자 남겨진 집에서 나는 온종일 무료하게 뒹굴었다. 그러다 컴컴한 천장과 바람소리, 째깍거리는 괘종시계 소리에 놀라서 한참동안 울기를 반복했다. 독서용이라기보단 장식용에 가까운 육중한 책장 속의 책을 한 권씩 꺼내들었던 것도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알라딘 요술램프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나는 책 속으로 사라지곤 했었다.
그 시절 즐겨 읽었던 책들은 주로 그림형제의 동화였다. 백설공주, 라푼젤,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 다른 이유는 없었다. 아버지의 책장을 훔쳐보던 어린 딸을 기특해하셨던 아버지가 고를 수 있는 ‘여자아이용’ 동화책이 이것 말고 딱히 있을 리 없는 시절이었다. 덕분에 나는 어린 시절 내 자아의 상당부분을 백설공주와 신데렐라에게 빚지게(?) 되었다. 언젠가는 나를 집[original family]에서 끌어내줄 근사한 왕자가 찾아오리라.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긴 하지만 나는 대학에 가서도 이런 꿈같은 현실이 가능할 꺼라는 믿음을 놓지 않았다.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간다』라는 책 제목은 베타 한손이 쓴 일기의 한 구절이기도 하다. 1943년 베타 한손의 첫 개인전이 스톡홀롬의 화랑에서 열렸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화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몇 년 뒤엔 스톡홀롬에 무료작업실까지 얻게 되지만 홀로 남을 아버지 걱정으로 고향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그러나 넒은 세상으로 딸이 나아가길 원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권유로 결국 파리행 기차를 탄다. 베타 한손이 쓴 그날의 일기장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내 안의 새는 날개를 펴고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리라”
책 속엔 어린 시절 베타의 삶이 잘 표현되어 있다. 지나치게 사실적인 묘사는 오히려 현실의 아픔을 반감시키기도 한다. 베타 한손의 까마득한 제자인 저자 사라 룬드베리의 글과 그림은 이것조차도 넘어선다. 너무 슬퍼서 아름다운 베타의 삶.
“해야 할 일과 걱정거리를 모두 잊고 나는 이곳에 숨어 있었다.”
“내 소망을 비밀로 해야 한다. 침묵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정면으로 보이지 말아야 한다.”
아픈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을 도와야 했던 베타는 엄마가 영원히 자기 곁을 떠난 후 결국 폭발하듯 쏟아낸다.
“죽을 것만 같아요 엄마처럼요. 죽을 것만 같아요 여기 있으면요.”
100여 년 전 지구 북반구 끄트머리에 살았던 어린 여자아이와 지금의 내 모습이 이토록 겹쳐있다니…. 그저 놀라웠다.
여성이 거의 아무런 권력도 가지지 못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 여자들은 꽤 괜찮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는 제도적인 차원이나 문화 일반에서의 공적 변화 덕분이기도 하다.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한 나는 그림책을 핑계삼아 페미니즘을 유포시킨다는 오해(?)를 살까봐 솔직히 두려웠다. 두렵다기 보단 이제 적잖이 지쳤고 귀찮아지기까지 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젠더는 인류문명의 기초라는 사실이 상식이 되었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여성의 삶은 가족과 사랑이란 이름으로 호명될 때만 사회적 의미를 인정받는다. 그것이 우리 사회 젠더 인식의 현 수준이다.
게다가 이제는 남녀 할 것 없이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각자도생의 사회, 플랫폼 자본주의라고도 불리는 지금의 경제체제는 각자 ‘알아서’ 살아 남아야 하는 처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을 내몰았다. 물론 이것이 순수하게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작동한 결과라고 믿을 만큼 순진한 이들은 많지 않겠지만 지금의 신자유주의는 기존의 페미니즘을 변형, 왜곡시켰으며 그것의 공공성을 크게 훼손했다. 이런 시류에 편승하지 않을 정도의 오기와 의식은 지녔다고 믿고 있는 나도 더 이상 웬만한 자리에선 페미니즘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적당한 선에서 비판을 접고,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주제는 아예 꺼내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간들, 앞으로도 내가 젠더의 생존자[가부장제 사회에선 불가능한 프로젝트이다!]인 척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진 모르겠다.
최근 종영된 모 드라마에서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인상적인 대사를 만났다.
“달리기 할 때 제일 앞에 달리는 놈은 첨부터 제일 앞에 서면 손해란다. 어쩌면 이 애비의 삶은 맨 앞에서 온 몸으로 바람을 맞는 바람막이 같은 삶이었다. 행여나 너도 나 같은 바람막이가 될까 모든 풍파에 날개가 꺾일까 전전긍긍하며 너를 붙잡기 바빴다.”
이 장면에서 나는 눈시울을 붉혔었다. ‘아버지의 연장으로 아버지의 집을 부술 수 없다’면, 차라리 바람막이 같았던 내 인생을 붙잡았던 아비의 손을 뿌리치지나 말 것을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공상! 따윈 하지 않으리라…. 이 책을 가슴에 품고 여전히 허허벌판일 세상에서 온 몸으로 바람을 맞고 살아가 보리라 다짐한다.
끝으로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여성학자 정희진의 추천사를 소개한다.
“여성이 의미있는 삶을 꿈꾸고 실현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세상의 아픔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껴안는 노력입니다. 아름다움은 슬픔과 고뇌 속에서 피어나는 우리 몸의 일부입니다. 타인의 요구를 존중하되 동시에 무시할 수 있는 용기!”

◇이진서
▷부산대, 이화여대, 영국 워릭대(University of Warwick)에서 수학했다.
▷지금은 김해에 둥지를 튼 고석규 비평문학관에서 비평적 글쓰기에 대한 실험들을 해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