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은 인문학 전성시대이다. 엄밀히 말하면 인문학이란 말의 전성시대이다. 온갖 것에 인문학이란 말을 유행처럼 붙인다. 그렇다면 지금은 인문학의 전성시대인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인문학의 위기라 말이 널리 회자하였다. 그때는 인문학의 위기 시대였는가? 위기와 전성은 그 의미가 무척이나 다른 말인데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상전벽해처럼 확 바뀔 수 있는 것인가? 말과 실제의 차이는 없을까? 인문학이란 단어를 붙이고 나오는 인문학들은 진짜 인문학인가? 우리는 우리가 쏟아내는 말에 객관적인 검증의 칼날을 댄 적이 있는가?
광복 이후 이 땅에 인문학의 전성시대는 있었던가? 있었다면 그것은 언제였으며 어떤 모습이었나? 여기저기 인문학이란 말이 두루 많이 사용되면 인문학의 전성시대인가? 대학에 인문학 관련 학과들이 많이 있고, 학생들이 많이 있고, 전공학자들이 많으면 인문학의 전성시대인가? 인문 관련 학과 졸업생들이 취직을 잘하면 인문학의 전성시대인가? 반대로 대학에서 인문학 관련 학과가 줄고, 학생들이 줄고, 전공학자들이 줄고, 졸업생들의 취업난이 높아지면 인문학의 위기 시대인가?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 관련 학과를 다니는 학생들의 위기인가? 관련 학자들의 위기인가? 우리 사회의 위기인가? 인문학 관련 학자들의 위기는 교수가 된 사람들의 위기인가? 아니면 교수가 되지 못한 학자들의 위기인가?
다시 묻는다. 인문학이란 말은 대학의 전유물인가? 문·사·철로 대표되는 대학의 학과와 학생들과 교수들과 그들의 관심과 관심의 표현만이 인문학인가? 지금까지 전성시대니 위기니 하는 것은 모두 대학과 관련이 있고 그 기준은 대학 내의 위상, 그것도 취업 정도에 따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인문학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대학이라는 지극히 좁은 호수 안에서만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2.
그렇다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인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인문학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근본[本]에 충실하면 끝[末]은 저절로 이해된다. 과연 지금의 우리는 인문학의 근본에 진지하게 접근하고 깊게 사유했던가? 단언컨대 아니다. 했다면 지금처럼 인문학이 방향을 잃고 화려한 말잔치에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출발하여 ‘인간 이해하기’에 도달하는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중심이 되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삶, 사고 또는 인간다움 등 인간의 근원 문제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사변적이고 비판적이며 또한 분석적으로 접근하여 인간 본질의 정수를 다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라는 세간의 정의 또한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인문의 한자 표기는 ‘人文’이다. 人은 인간이고 文은 본디 무늬를 뜻하는 말이다. 합치면 ‘인간의 무늬’라는 뜻이니 달리 말하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인문학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인문학에 문학, 사학, 철학, 언어학, 문화인류학, 종교학 등이 들어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사유의 영역이며, ‘인간 이해하기’는 궁극적으로 실천의 영역이다. 사유와 실천은 수양修養을 내면의 기본 바탕으로 하며, 외면의 기본 바탕은 인간을 위하는 마음, 곧 사랑[愛]이다. 본래 인人은 인仁과 통하는 글자이다. 인仁은 ‘남과 나를 구별하지 않는 마음이다. 사유 없는 인문학은 언어유희에 불과하며, 실천 없는 인문학은 공허하다. 인문학이 수양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이기利己에 매몰되기 쉽고, 인문학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 인문학은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다. 인간이 무엇인지 알아야 인간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인간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인간사회가 조화로워진다. 조화의 목적은 인간과 인간이 함께 행복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 수양과 실천을 통한 인간 또는 인간사회의 행복이다.
인문학은 광범위하며 매우 일상적이어야 한다. 인문학은 자기 수양의 학문으로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인간관계의 학문이므로 사회적이다. 인문학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전문적인 학문이 아니며 사람이면 누구나 해야 하는 보편적인 학문이다. 인문학은 대학이나 일부 집단 또는 특정 연령층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면 대학과 대학 밖, 모든 집단 또는 전 연령층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학문이다.
3.
오랜 시간 동안 인문학의 주축은 대학이었다. 아니 대학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런데 인문학의 위기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대학은 그저 인문학의 한 부분을 담당할 뿐인데 마치 인문학 전부가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인식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무엇인가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을 이해하고, 나아가 그 마음을 실천하는 데 있다. 이 모든 과정의 바탕에는 자기 성찰과 수양이 있고,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인간을 위하는 마음, 곧 인간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학에서의 인문학은 인문학의 가장 기본 단계인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한 인문학 전반에 대한 학술적 접근을 주로 하고 있다. 이러한 학술적 접근은 인문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지만, 자칫 이것만이 인문학인 것처럼 하게 되면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수양과 실천을 잃어버리게 된다. 사실 작금의 대학에서의 인문학은 수양과 실천은 잃어버린 채 관념 속에 빠져 인문학자들 저들만의 리그로 빠진 면이 없지 않다.
인문학에 대한 학술적 접근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인문학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인문학을 대체로 학술적인 것으로만 접근하면서 문·사·철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 관련 학과들은 오직 학술 연구와 학자 배출에 치중하였다. 사실 인문학에 관한 학술적 연구는 인문학 전반에서 보면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대학에서의 인문학은 오직 학술적 연구와 인문학자 배출이 전부인 것처럼 하고 있다.
사실 인문학 관련 전문 학자는 그렇게 많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한때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해마다 인문학자들을 쏟아냈다. 수요는 제한적인데 공급은 수요를 훨씬 능가하니 당연히 자리를 잡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마련이고 이는 취업 문제로 대두될 수밖에 없고, 이것이 마치 인문학의 위기인 것처럼 알려졌다.
대학에서의 인문학의 또 다른 문제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공학이나 상학商學 등을 서로 관련이 없는 별개의 학문으로 인식하게 했다는 데 있다. 그러니 공학이나 상학 등의 성행이 인문학의 축소로 인식된 것이다. 그런데 인문학과 자연과학, 공학이나 상학은 서로 별개의 학문이 아니며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인문학의 중심은 인간인데 사실 인간 또는 인간의 삶과 무관한 학문이 있을 수 없다. 자연과학이나 공학도 그 바탕에는 반드시 인문학이 있어야 한다. 자연과학을 하는 근본에는 인간을 위하는 마음이 있으며, 공학도 상학도 인간이 그 대상이다. 따라서 인간을 잘 이해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좋은 공학, 좋은 상학에는 반드시 인문학이 있어야 한다.
인문학은 대학에서의 교육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초·중·고등학교 교육 전반에 걸쳐 필요한 것이 인문학이다. 단지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가르치는 것을 인문학 교육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초·중·고등학교에서의 인문학 교육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알아가고 인간을 위하는 마음을 쌓아가는 교육이어야 한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것은 자기 성찰을 통한 올바른 인간 되기이며, 인간을 위하는 마음은 인간관계 속에서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조화는 남을 이해하는 마음, 나아가 소통하고 공감함으로써 나와 내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초·중·고등학교에서 인문학 교육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저 경쟁을 부추기고 차별 의식을 만들어내는 교육만 할 뿐이다.
대학에서의, 인문학 교육은 학술 위주에만 치중해서는 안 된다. 인간을 알아가고 인간을 이해하는 쪽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이 배제된 학문은 없다. 인간을 알아야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고 물건을 많이 팔 수 있다. 인간을 알고 이해하는 사람,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좋은 리더가 될 수 있다.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을 알아야 인간을 잘 드러낼 수 있고, 인간을 이해하는 마음이 있어야 크게 성공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인문학과 분리된 학문은 없다. 따라서 인문학이 학술 연구에만 얽매이고 학술 전문가를 양성하는 곳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난다면 대학에서 인문학의 영역은 무한하다. 공학도 상학도 예술도 인문학의 가치를 안다면 지금처럼 인문학을 사변에 그치거나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이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 인문학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학문이라고 인식할 것이며, 적어도 꼭 필요한 학문으로 인문학을 가르치려고 할 것이다. 덧붙이자면, 지금 대학에서 가르치는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닌 경우가 많다. 거의 모든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글쓰기 과목만 해도 인문학이라기보다는 기술학이나 실용적 학문에 가깝다.
4.
요즘 아이들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이라는 말들이 많다. 학교에서 제대로 된 인문학을 가르치지 않아서 그렇다. 인간에 대한 사유, 인간 이해하기, 소통, 공감, 인간을 위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없으니 그렇다. 깊은 사유 없이 어떻게 하면 점수를 잘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를 읽고, 역사를 외우고, 철학을 백과사전처럼 정리하는 것은 일부 적당히 똑똑한 사람을 만들 수 있는지 몰라도 좋은 사람을 만들 수는 없다.
위에서 인문학은 결국 인간을 이해하고 위하는 마음의 실천으로 완성된다. 실천은 저절로 그렇게 되었을 때 가치가 있다. 저절로 그렇게 되려면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인문학이다. 한편 실천은 지속해야 한다. 실천이 일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실천이 일상이 되려면 인문학이 학교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일상 속에 늘 있어야 한다. 그동안의 인문학은 학교로 대표되는 담장 안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그것도 학술 위주로 편향되었다. 이제 인문학은 담장 밖에서 더 넓어져야 한다. 우리의 일상과 언제나 공존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을 이해하고 위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 담장 밖은 인문학 전성시대라고 할 만큼 인문학이라는 말이 흔하다. 그런데 인문학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다 인문학인 것은 아니다. 지금 담장 밖에는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단 인문학 아닌 것들이 너무 많다. 사유 없는 인문학, 인간이 중심이 아닌 인문학, 인간을 위하는 마음이 없는 인문학이 너무 많다.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달았을 뿐 내용은 인문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도 있다. 인간이 없고 사유가 없고 실천이 없는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 담장 안에서도 담장 밖에서도 인문학다운 인문학을 했으면 좋겠다. 특히 인문학이 일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담장 밖 인문학은 매우 중요하다. 인문학이 일상이 될 때, 우리 사회는 갈등보다는 조화로운, 진정으로 인간이 인간을 위하는 사회, 더불어 하나가 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 송철호 : ▷문학박사, 인문고전평론가 ▷(사)인문예술 아카데미 담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