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260)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6장 세상에 눈뜨다①
대하소설 「신불산」(260)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6장 세상에 눈뜨다①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09.26 07:00
  • 업데이트 2022.09.26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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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세상에 눈뜨다①

큰애 슬비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쯤 열찬씨는 아침마다 딸의 학교에 드나들었는데 학부형으로서가 아닌 조기축구회원으로서였다.

어느 듯 30대 중반에 접어든 그는 수천 년 농사꾼의 후예로 진화해서 무엇이든지 잘 먹고 아무데서나 잘 자던 능력마저 고갈되고 있었다. 전에는 아침마다 눈만 뜨면 오뚝이처럼 발딱발딱 일어나는 잠자리에서 한없이 늘어지고 조금만 술을 마셔도 쉽게 취했다.

혈혈단신(孑孑單身), 그것도 수중에 한 푼도 쥐지 못한 적수공권(赤手空拳) 맨몸으로 낯선 도시에 뛰어들어 억지춘향의 군대와 눈치놀음의 공직에 어지간히 녹초가 된 모양이었고 아무런 자제도, 누구의 제지도 없이 끝없이 이어진 술과 담배가 무슨 끈질기고 영악한 말벌처럼 그냥 우직한 풀무치 같은 자신의 몸에 독침처럼 난관을 꽂고 알을 낳아 마침내 숙주가 된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자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내 지금 비록 공부도, 소설도 다 접고 그저 착하고 사람 좋은 아내를 맞아 아들딸 먹여 살리느라 말단공무원으로 있지만 시나브로 바람이 빠지다 마침내 조글조글해지는 풍선처럼 그렇게 시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느낌으로 술을 조금 덜 마신 날의 아침이었다.

운동화를 찾아 신고 슬슬 뒷산으로 오르내리다 문득 산 아래 나란히 붙은 연동국민학교와 연산중학교의 운동장에서 와아 함성을 지르며 축구를 하는 사람들의 울긋불긋한 유니폼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발길이 딸애가 다니는 연동국민학교에 이르고 말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연동국민학교에서 조기축구를 하는 연동축구회에는 열찬씨가 근무하는 연산4동사무소에서 통장이나 청년회원으로 일하는 동년배의 친구가 너덧 명이나 있어 뜻밖의 방문객을 반기며 연습 삼아 같이 차자고 권했다.

얼떨결에 운동화바람으로 운동장에 들어선 열찬씨는 자기 앞으로 굴러오는 공을 차려고 발을 드는 순간 보기 좋게 나자빠지고 말았다. 마사토가 깔린 운동장바닥이 징이 없는 맨 바닥의 운동화로서는 버티기도 어려웠지만 워낙 운동신경이 둔한 탓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했지만 그렇다고 한번 시작한 일을 그만두는 열찬씨가 아니었다.

한 30분을 같이 땀을 흘리고 스탠드에 나란히 앉아 박정희대통령이 그렇게 좋아했다는 막걸리에 사이다를 탄 막사이다를 한 잔 하다 보니 어느 새 그의 트레이닝에는 서너 곳이나 구멍이 뚫리고 찰과상으로 피가 비치는 곳도 있었다.

 

그날 저녁 연산시장 맞은편의 성해씨의 양과점 백록담의 2층 내실에서 고스톱을 치면서 언양국민학교를 6년이나 한 반에 다닌 또 하나의 반창 동규씨는 열찬씨의 상처 난 무릎을 보고 갑자기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사람처럼 허허하하 웃어댔다.

언양 소시장 앞의 국밥집아들인 그는 공부나 운동이나 무슨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어 별로 알려진 아이는 아니었지만 온갖 일에 관심이 많은 개구쟁이로써 이목구비가 반듯한 미소년이었는데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쭉 못 만나다 어느 날 아침 성해씨의 가게 앞인 버스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가게 앞을 쓸러 나온 성해씨와 눈이 마주친 것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전기기술을 배워 여기저기를 떠돌다 당시 부산 주종산업의 하나인 커다란 목재회사에 다녔는데 오일쇼크로 회사가 문을 닫자 동래에서 조그만 모터상회를 운영하는 중이었다. 성해씨나 동규씨가 기억 속에 운동을 잘 하거나 축구를 잘 하는 열찬씨의 모습은 꿈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달리기를 못 하거나 국민체조가 서툰 것은 기본이고 그 또래의 아이들이 방과 후에 학교 뒤나 갱빈에서 한 판을 붙어 순서를 매기는 싸움순서에는 아예 이름조차 없었고 어느 누구도 그런 그와 싸워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중학교입학시험에서도 턱걸이를 못 해서 수석을 놓쳤으랴? 한 시간 동안 남녀 60명이 공 하나로 축구를 하는 체육시간에도 혼자 숨 가쁘게 뛰기는 했지만 발에 공 한 번 못 대어보는 날이 예사이면서도 예외 없이 땅바닥에 나자빠지던 그를 기억하는 친구들에게 그가 축구를 시작했다는 것은 염소가 물똥을 사는 것만큼이나 엉뚱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든 말았든 한번 시작한 일을 좀체 그만둘 줄 모르는 열찬씨는 아침마다 운동장에 나갔고 유리가게를 운영하는 동갑친구 하나가 자꾸만 넘어지는 그를 보다 못 해 헌 축구화를 한 켤레 주어서 무릎을 까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속도가 느린 데다 양발을 요리조리 움직여 상대방을 속여 돌파하는 페인트동작이 인 되어 공격수로서도 쓸모가 없고 상대공격수의 단 한 번의 페인트에 수비가 뚫리는 것은 물론 제풀에 나동그라지기가 일쑤인 그는 시합자체에는 그야말로 있으나마나 한 선수였지만 그래도 땅에 공을 세워놓고 차는 슈팅연습에서는 공의 세기와 비거리가 대단해서 찬탄을 자아냈는데 그건 오로지 지게질, 삽질을 위하여 진화된 그의 탄탄한 다리, 그 중에서도 보통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이 굵은 종아리의 힘이었다.

동생 백찬씨, 누님 순찬씨와 열찬씨의 3남매는 여느 씨름선수나 축구선수보다도 더 굵은 종아리를 가졌고 순찬씨의 종아리를 물려받은 김해의 미옥이, 영주의 숙현이는 너무나 굵은 종아리 때문에 감히 스커트를 입을 엄두도 못 낸다는 바로 그 굵직한 종아리 덕분이었다.

아무튼 슈퍼 종아리로 불리던 초심자 열찬씨는 어느 새 가방 크다고 공부 잘 하는 것이 아니듯 종아리 굵다고 공 잘 차는 것이 아니라며 연습경기에서 팀이 지면 금방 빛 좋은 개살구로 몰리고 말았다.

그렇든 말든 유리 집, 꽃집, 공병 집, 전기철물 집, 태권도장, 인쇄소, 책방, 슈퍼마켓, 요꼬공장, 주류도매, 철공소에 미장원남편 등 소상공업자를 주축으로 시청, 세무서, 동사무소의 공무원들로 구성된 서른 몇 명의 조기축구회에 정회원으로 가입한 그는 축구가 아닌 경기장 밖에서 월등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첫 째는 붙임성이 좋고 술을 잘 마셔 나이가 형뻘인 회원들하고 저녁마다 어울려 술을 마시고 당시 한창 유흥가로 개발되던 연산로터리 맥주홀과 미드나이트에서 부지런히 잘 따라다니는 막내라는 점이었다.

다음은 창설기념축구회, 창립총회등의 행사에 계획서를 기획하고 플래카드와 팸플릿을 만들고 회장 인사문을 쓰고 사회를 보는 일이었는데 행사가 잘 끝나고 미드나이트에서 부인들까지 참석하는 뒤풀이나 해수욕장으로 버스를 대절해 떠나는 여름소풍의 사회까지 맡으며 존재감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의 축구실력은 지지부진, 11명씩 차는 공식게임이 아닌 당일의 출석자를 그냥 반반으로 나눠 경기를 하는 다섯 명, 혹은 7,8명씩의 미니게임에서도 항상 그는 팀원들에게 별로 사랑받지 못 하고 특정 포지션조차 없는 떠돌이선수였고 그의 등번호인 27번에게 공이 갔다가는 언제나 헛발 아니면 뺏기는 것으로 정평이 났다.

ⓒ서상균

그러나 축구기술이 조금도 안 느는 대신 그의 심폐기능과 근력은 조금씩 향상하는지 그는 여간해서 지치지 않고 여기저기 부지런히 뛰어다니기는 했다. 비록 별 소득은 없었지만. 공격도 수비도 잘 안 되는 그가 어느 날 우연히 문전으로 날아오는 공을 이마로 받아 단숨에 골인을 시키는 일이 발생하면서 그의 축구는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뛰어다니기만 한다면 페인트가 필요한 발동작과 달리 이마로 받는 헤딩슛에는 운동신경이 조금 무디다고 큰 지장이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두 번 헤딩슛을 넣으면서 어느 새 공은 못 차도 헤딩슛을 잘 넣는 이상한 선수, 당시 프로야구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삼미슈퍼스타를 빗댄 <27번 슈퍼스타>로 별명이 붙고 말았는데 어느 때부턴가 이젠 발로도 슬슬 골을 넣기 시작했다.

어느 때는 다른 사람보다 반 박자가 늦고 또 어느 때는 반 박자가 빨라 도무지 골키퍼가 감을 잡을 수 없는 슈터, 그저 앞만 보고 달리는 전차 같은 열찬씨를 편을 갈라 돈을 거는 시합에서 이젠 서로 데려가려는 이변이 생기기도 했다. 모로 가도 서울이라고 통골이라고 불리는 엉뚱한 리듬의 골을 넣는 그를 데려가는 것이 게임을 이기고 돈을 따는 데는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축구를 하면서 운동장이 아닌 엉뚱한 데서 그의 삶을 바꿀 급격한 변화들이 일어났는데 우선 무엇이든 자기 판단대로 그저 열심히 일하고 그것이 반드시 최선이며 진리라고 믿는, 어찌 보면 우직하고 고집스러운 그가 조기축구를 하면서 자기고집을 꺾고 남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선 축구실력이 모자라 경기 중에 슬슬 남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자기보다 나이가 너덧 살이 많은 형뻘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고 다음엔 동갑또래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가게를 가지고 열심히 뛰면서 친구를 위해 몇 만 원쯤 드는 술값도 예사로 내는 것을 보면서 좀팽이 동서기인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 농촌에서 공부를 좀 한다고 똑똑하고 문학지망이어서 순수하다고 자부하던 자신이 이제는 말단공무원으로서 자본주의의 상징인 돈벌이에 뒤지고 주변의 눈치에도 둔감해 상황파악이 늦고 시대에 뒤떨어진 얼치기라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었다.

바야흐로 6공이라는 매우 폭력적이며 직선적인 또 하나의 군사정권이 탄력을 받던 당시에는 나라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절이었다. 어떤 형태의 장사나 사업도 문만 열면 대체로 성공을 하고 공무원이나 회사원들도 해마다 월급이 오르고 보너스가 나오던 호시절이기도 했다. 또 누구나 조금씩 적금이나 저축을 하고 집이나 가게를 장만하고 또 봉고차를 사서 낮이나 주중에는 사업을 하고 밤이나 주말에는 외식이나 놀이를 즐기던 그야말로 태평성대 잘 나가던 시절이라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는 희망이,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저마다 자부심, 자존심이 대단한 시절이기도 했다.

아직도 박봉에 셋방살이를 못 벗어난 열찬씨도 마침내 크게 잘나거나 많이 배운 것은 없어도 땀 흘려 번 돈으로 스스럼없이 친구를 위하여 술을 사고 밥을 사는 주변의 이웃과 친구들이 나보다 앞서고 나는 그들을 존중하고 배워야한다는 자각에 이른 것이었다.

그 동갑내기 조기축구회원들이 크게 한번 도움을 준 적이 있었는데 그건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정부의 제1시책으로 전국의 읍면동장에게 자신의 직위를 걸고 강력히 추진하라는 가족계획, 직설적으로 말하면 아이 안 낳는 인구증가억제대책이 시달되면서 동사무소에서 단체원과 가장 친화력이 좋으면서 어느 듯 전입 5년차가 되는 열찬씨가 담당직원으로 지정되면서였다.

 

1983년께로 기억되는 그 해는 6.25전쟁으로 전장에 끌려가 전사를 하거나 상이용사가 되고 또 수많은 가족이 피난길에 올라 여기저기를 떠돌던 민족의 대혼란이 정전협정으로 종식되고 비로소 사회가 안정되고 생업에 복귀하면서 헤어졌던 부부가 재회하고 제대군인을 비롯한 젊은이들이 각자의 짝을 찾아 첫 아이를 낳은 1955년 이후의 아이들이 다시 성년이 되어 결혼을 하고 출산을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말하자면 제1차배이비 붐으로 전국의 모든 국민학교 교실을 오전오후반 2부제 수업을 하는 콩나물시루로 만들고 중고등학교의 입학을 엄청난 입시전쟁으로 몰아넣어 대학교입학자체를 국가가 원천적으로 통제해 일정의 학력수준이 아니면 아예 응시나 지원을 할 수마저 없는 <대학입학 예비고사>까지 나오게 한 세대들이 점점 자라 결혼을 함으로서 다시 수많은 아이들이 태어나 과히 인구폭탄이라고 지칭되는 제 2차 베이비붐을 맞아 3천리 강산이 그야말로 만원사례가 되는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 그 대상은 6.25당시 갓난아기였거나 전쟁 중에 태어난 열찬씨 또래의 남자와 영순씨처럼 휴전 한두 해 뒤에 태어난 여자들이 피임 또는 불임시술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군에서 정훈하사관을 지낸 경험으로 민방위대훈련을 썩 잘 시키는 직원으로 당시 비교적 평온한 보직이던 그는 가족계획 특별계획이 시달되자 곧바로 담당자로 지명되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관활 동의 주민 중에서 누군가 정관수술을 할 남자나 난관수술을 할 여자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었다.

구청의 총무과에서 업무를 맡아 동별로 경쟁을 붙여 구청장실에 매일매일의 실적이 보고되고 일주일에 한번, 월요일에 구청장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성적이 부진한 3개동은 특별대책을 세워 별도로 보고하게 하는 바람에 가족계획은 동장들의 관심사를 떠나 자칫하면 옷을 벗고 공직을 떠나야만 하는 엄청난 위협이 되어 모든 동장이 실적을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가족계획의 실적을 평가하는 기준은 백점 만점에 피임약판매가 5점, 정관수술은 30점, 난관수술이 전체 2/3에 가까운 65점이었는데 그 이유는 모체에 부작용이 많은 피임약은 아무리 팔아도 가임여성인 주부가 안 먹으면 그뿐이라

산아제한의 기능이 미미한 것이었고 사내의 정관을 절제하여 아이가 되는 정자의 이동을 차단하는 정관수술을 가임여성의 난관을 소작, 즉 불로 지져 난자의 이동을 원천봉쇄하는 난관수술보다 낮게 평가하는 것은 정관수술이 한갓 아이가 되는 재료공급을 중단하는 것임에 비해 난관수술을 아예 생산시설 즉 아이 공장 그 자체를 파괴해버리는 보다 원천적인 대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젊고 멀쩡한 사내가 골목골목을 누비며 어찌 낯선 여자들을 잡고 난관을 수술하라고 권장할 수가 있으랴? 하는 수 없이 보건소를 통해 강제로 배부되는 피임약을 통별로 강제로 배정하여 약값을 받는 거도 한두 번이라 관내의 약방에 돌아다니며 사정사정해서 잘 팔리지도 않은 피임약을 맡기고 무슨 찬조 받듯 약값을 받아도 점수가 미미한지라 다음은 정관수술로 눈을 돌려야 했다.

그 정관수술이라는 것은 사태가 그렇게 심해지기 전에 예비군교육장에서 정관수술만 받으면 하루든 이틀이던 당해교육을 면제해준다는 조건으로 보건소 앰뷸런스를 대동한 보건소아가씨들이 한꺼번에 대여섯 명씩 실어 나른 지가 벌써 몇 년이나 되어 많은 젊은이들의 정관이 이미 잘려나가 그 대상이 극히 적었다. 심지어 담당자인 열찬씨 자신도 이미 보건소로 끌려가서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이제 마지막 남은 유일한 대책이 바로 난관수술이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