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261)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6장 세상에 눈뜨다②
대하소설 「신불산」(261)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6장 세상에 눈뜨다②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09.27 09:07
  • 업데이트 2022.09.27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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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세상에 눈뜨다②

이제 마지막 남은 유일한 대책이 바로 난관수술이었다. 성적이 오르지 않아 자칫하면 특별대책보고를 할 위기에 몰린 열찬씨는 고심 끝에 자기또래인 양정의 사촌처형을 설득해 시술병원으로 지정된 산부인과로 끌고 가는데 성공했다. 이미 아이가 셋이나 되는 데다 시도 때도 없이 아이가 서서 여러 번 중절수술을 받던 터라 제부의 절박한 사정을 듣고 흔쾌히 승낙을 한 것이었다. 주소가 달랐지만 실적을 위해 주민등록까지 연산4동으로 옮기면서 마침내 첫 난관수술에 성공을 한 것이었다.

첫 수술의 성공으로 열찬씨의 작전에 탄력이 붙었다. 굳이 멀리 나가 두리번거릴 것이 아니라 가까운 데서부터 대상자를 찾는 방법이었다.

우선 젊은 통반장과 청년회원의 아내도 훑었고 부녀회원이나 동사무소의 여직원도 예외가 없었다. 그렇게 한두 명의 수술자가 나오면서 어느 듯 연산4동의 가족계획실적이 위험수위를 벗어나 상위권으로 치솟았다.

당시의 동장은 사직동 토박이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학을 나온 학사장교 출신으로 예비군중대장을 거친 아주 반듯하고 과묵한 엘리트였는데 자신으로서는 여성들 앞에서 말도 꺼내기 뭣한 난관수술을 슬슬 끌어내는 열찬씨가 너무나 신기하고도 고마운 모양으로 때로는 고생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렇게 통반장, 부녀회원, 동직원중 자녀가 둘 이상이 있는 여성들은 모조리 열찬씨에 의해 산부인과에서 나온 엠뷸런스를 타고 나서 더 이상 대상자가 없자 다음으로 눈을 돌린 곳은 연산조기축구회원 중 또래들의 부인이었다.

유리집의 윤사장, 꽃집의 이사장, 설비집의 김사장의 아내가 동시에 봉고차를 타면서부터 회원들의 아내들이 줄줄이 봉고차에 실리는 신세가 되고 부인네들 사이에 동사무소 이열찬 주사를 만나면 남자건 여자건 단번에 불알을 까인다는 우스개가 돌기도 했다.

 

동별 경쟁이 심하다보니 어느 동 할 것 없이 개발위원회나 관내 유지의 도움을 얻어 난관수술을 받는 사람들에겐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하는 원리로 소고기를 넣고 미역국을 끓여주는 셈치고 미역과 쌀을 사주다가 나중에는 돈 1,2만 원씩을 주기도 했는데 연산4동에는 아주 큰 물류업체, 그러니까 생필품의 도매상과 창고가 있어 찬조를 받아 특별히 10kg 설탕 한 포대씩을 더 지급하니 살림꾼 아낙들에게 얼마나 달콤한 유혹이었을까?

마침내 연산4동의 실적이 선두권으로 진입할 때쯤 동장과 열찬씨는 가족계획사업 유공자로 표창도 받았고 골목길에 둘러앉아 열무를 다듬거나 더위를 식히는 아낙네들이 지나가는 열찬씨를 보면 그 놈의 설탕 한 봉지에 넘어가서 불알을 떼였다고 농담을 하며 웃었다.

한 번 시작하면 미련하도록 밀어붙이는 성격의 열찬씨는 이제 한 술 더 떠서 통, 반 별로 아이가 둘 이상이 되는 가임여성의 명단을 빼고 그 중에서 세 번째 아이를 밴 임산부를 찾아가 분만과 동시에 난관수술을 하면 입원비 전체를 무료로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물론 이미 관내의 K산부인과와 이미 약조가 되어있었다. 산부인과 측으로는 난관수술 한 건당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이 엄청 나오므로 그까짓 분만 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동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는 말만 들리면 방금 진찰을 하거나 수술을 하다가도 원장이 직접 ‘아, 아주사님, 예, 예.’하고 굽실거리는 것은 물론 가끔 가다 술대접을 하거나 저녁 값을 따로 주기도 하는 판이었다.

당시에는 하루에 한 두 건을 하는 것은 물론 하루에 무려 다섯 건을 올린 경우도 있어 어떤 때는 이웃의 안락동에 있는 산부인과의 봉고차를 부르는 경우도 있어 산부인과 의사들 사이에 연산4동 가족계획담당 이모주사는 과히 산부인과의 구세주라는 말이 돈다고도 했다. 그렇게 하루에 여러 명의 임산부를 산부인과에 보내면 집에 남은 아이들이 문제가 되는데 아이가 하나인 경우에는 아내 영순씨가 아이어미가 집에 올 때까지 맡아주었지만 수술자가 여럿이거나 아이가 많을 때는 부녀회장과 회원들까지 동원되기도 했다.

ⓒ서상균

그렇게 만사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어느 날 의사를 만나 안부삼아 이야기를 나누다 저녁이나 술이라도 한 잔 먹으려는 심산으로 연산로터리의 산부인과에 들렀던 열찬씨는 그만 문전에서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다.

분만 수술 중에 갑자기 임부 하나가 죽어 병원의 접수대 앞에 돗자리를 깔고 가족들이 내 아내, 내 며느리, 내 딸을 살려달라고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었는데 거기 걸린 사망자의 사진이 지난 금요일 자신이 난관절제를 권장, 직접 봉고차에 태워 보낸 아낙이었던 것이었다.

갑자기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으로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가까스로 사무실로 돌아와 냉수를 들이켜도 열찬씨의 가슴은 좀체 진정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열찬씨는 다시 난관수술을 입 밖에 내지도 않았고 산부인과 간판만 눈에 띄어도 가슴이 울렁거려 가족계획사업은 졸지에 개점휴업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한 두어 달이 지나가자 다시 연산4동의 가족계획실적이 바닥권으로 추락, 동장이 열찬씨를 불러 저녁을 사주면서 그냥 고생 많다고만 되풀이하는 것이 보통 심각한 압력, 소리 없는 은근한 압력이 아니었다.

 

고심 끝에 열찬씨의 작전이 다시 정관수술 쪽으로 변경되었다. 기세가 꺾인 열찬씨로서는 이제 선두권이 문제가 아니라 최하위 권으로 몰려 특별대책보고를 않는 것만이 목표였다. 가장 좋은 방향은 가족계획담당을 그만 두는 것이었지만 한번 재미를 본 동장, 사무장은 전혀 그럴 기미가 없었다. 조기축구회원을 자세히 살펴보니 마침 두 명의 대상자가 나타났다. 하나는 신광전기철물점을 하는 서규환이란 동갑친구고 하나는 유성서점을 운영하는 송상식이라는 두 살 많은 친구였다. 어느 날 오후 억세고 포기를 모르는 친구 때문에 도살장에 소 끌려가듯 주춤주춤 연산로터리의 부산시립병원의 외과수술실로 끌려온 두 친구가 시술신청서를 작성하고 누가 먼저 수술대에 오를지 의논을 하는 중이었다.

마침 커튼으로 칸막이를 친 옆 침대에서 한창 수술중인지 자지러지는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저 먼 전라도 땅, 김대중대통령의 고향인 신안군 하의도에서 단신으로 부산에 들어와 연산로터리에 번듯한 서점을 운영하고 조기축구회와 마을청년회의 회원이 되기까지 사교술과 돈벌이와 근검절약 같은 살아남기 기술 중에 무엇보다도 눈치 보기에 이골이 난 상식씨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자기는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에 갔다 온다면서 밖으로 나갔다.

옆 침대에서 수술을 받는 사람이 엄청난 흥감장이였던지 대범한 규환씨는 정관을 자르기 위해 힘껏 잡아당기는 순간의 찌릿한 통증과 전관을 절제하는 순간 따끔한 느낌밖에는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않고 수술을 마치고 내려와 바지를 갈아입으며 다음선수 상식씨를 찾을 때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보이지 않아 의사가 한번 찾아보라고 해서 열찬씨가 화장실에 가서 아무리 찾아도 흔적이 없었다. 매점과 휴게실에도 없었고 나무 뒤에 숨었나 싶어 정원을 뒤져도 역시였다. 수술 스케줄이 어긋난 의사는 메스를 들고 초조히 기다리는 판이라 병원에서는 구내방송으로 ‘송상식씨, 이 방송을 듣는 즉시 수술실로 들어오라.’는 방송이 나가다 이내 이러이러한 사람이 보이면 원무과로 연락해달라는 안내방송이 나갔다.

열찬씨 역시 동사무소로 연락해 동 전역에 전파되는 방송으로 송상식씨를 찾았지만 겁에 질린 그는 이미 꽁꽁 숨어버린 모양이었다.

마침내 담당의사에게 죄송하게 되었다고 사과를 하고 서규환씨와 병원을 나서 터벅터벅 연산로터리를 건너 연일시장에 접어들 때였다.

“어이, 규환아, 많이 아팠제?”

시장골목에서 헤헤 웃으며 상식씨가 나타났다. 그날부터 송상식씨는 불알 까다가 도망간 사람으로 소문이 나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달이 지나 돌을 갓 지난 상식씨의 딸이 재래식 화장실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또 한 6개월이 지나 상식씨의 아내가 배가 불렀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딸을 낳았다. 세상이치는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열찬씨는 그해 여름 그는 무려 6년이나 근무한 연산4동사무소에서 전근 명(命)을 받았다. 새 근무지는 전에 한번 근무한 적이 있는 연산1동사무소였다. 그러니까 스무 살이 되던 1970년 연산3동사무소에 발령을 받은 이후 연산1동과 4동을 거쳐 다시 연산1동으로 가게 되었으니 무려 15년 간이나 좁은 연산동바닥을 왔다리갔다리한 셈이었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연산1동은 전에 구획정리가 한창이던 허허벌판이 도로가 닦이고 건물이 들어서고 통반장들과 물구덩이의 붕어와 미꾸라지를 잡고 정석이를 낳아 키우던 변두리 토곡이 아니었다. 6년 사이에 수많은 양옥과 아파트가 들어서 반듯한 주택가가 되고 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어 연산1,8,9동으로 분동되고 기존의 연산1동은 연산로터리에서 안락동에 이르는 대한색소 3거리와 뒷거울로 불리던 자연부락, 이섭교다리주변의 다리끌 마을이 전부였지만 인구는 2만이 넘는 제법 큰 규모의 동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좀처럼 두 번 근무하기 힘들다는 그 연산1동사무소는 단지 행정구역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근무분위기가 엄청 변해 부임하는 열찬씨를 당황하게 했다. 우선 깨끗한 양옥으로 새로 지은 동사무소가 지금껏 자신이 근무해온 슬레이트집 한쪽 귀퉁이에 연탄아궁이가 있는 숙직실이 있고 화단 한 모서리에 연말의 종무식에 앞서 쓰레기와 묵은 서류를 태우는 소각장이 있는 구식 동사무소와 달랐다. 좁은 화단가운데에 국기게양대가 있는 낮은 담장 너머로 이웃집 마당이 훤히 바라보이기도 하고 또 이웃집 옥상에서 동사무소나 숙직실 안이 훤히 비쳐서 동사무소직원과 이웃 간에 특별한 스스럼이나 비밀도 없고 명절이나 생일 때 떡국이나 음식을 가져오거나 초청하기도 하는 그런 인정이 넘치는 분위기가 아닌 어딘가 위압적이고 으스스한 분위기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동사무소에 들어서자 건물보다도 더 싸늘한 공기가 그를 엄습했다. 나이 스물에 연산3동사무소에 발령받은 이래 연산동근무 어언 15년, 주민들뿐 아니라 구청에서 까지 연산동하면 의례 이열찬주사를 떠올릴 만큼 단 한 번도 연산동 밖을 떠나지 않은 연산동의 최고참 지킴이 열찬씨도 오싹한 느낌을 받을 만큼 그를 맞이하는 동료들의 눈길이 싸늘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당시의 연산1동사무소에는 열찬씨와 같은 직급인 7급 주사보가 세 명이나 있었는데 셋 다 입사나 7급 승진이 열찬씨보다 3년 이상이 늦은 공직의 후임이었는데 문제는 그들 중 둘이 열찬씨보다 나이가 한두 살 많은 것이었다.

어차피 계급사회로서 아침마다 도장을 찍는 출근부마저도 동장사무장을 필두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서열대로 꽂고 모든 명부의 이름순, 회식에서 술잔이 돌아가는 순서마저도 고참 순인 판에 나이어린 선임이 달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열찬씨처럼 주로 동사무소에 근무한 사람들이 아니라 처음 입사해서 잠깐 동사무소에 근무하다 구청으로 옮긴 뒤 구청의 여러 과를 전전하며 생활해온 사람들이었다. 동사무소처럼 발로 뛰는 구질구질한 일이 아닌 사무실에 앉아서 상사의 지시를 받아 행정법규를 연구하거나 동사무소의 자료를 취합하는 전형적인 사무직으로서 하루 종일 상사의 눈치를 보다가 퇴근 후에까지 식당과 술집을 따라다니며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온 힘을 다 하여 동직원보다 빨리 승진을 한 사람들이었다. 승진직후라 잠깐 동사무소에 나와 있긴 하지만 동사무소의 업무보다는 구청의 동향에 귀를 기울이다 조그만 틈만 보이면 재빨리 다시 구청으로 들어가려는 눈치꾼에 요령꾼이니 투박하고 나이어린 고참을 반길 리가 없었다.

네 명의 7급 중에서 명색 고참인 자신만이 개밥의 도토리처럼 어울리지 못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열찬씨가 제일 힘든 부분은 그 세 사람의 매끈한 옷차림과 늘 화사한 웃음을 띠는 희고 부드러운 얼굴과 저들끼리만 속삭이는 나직한 말투였다. 늘 자신만이 소외당한다는 느낌은 아침에 출근하자 말자 마시는 모닝커피에서부터 출발되는데 특별한 일이 있어 누가 사주는 커피가 아니면 잘 마시지도 않은 열찬씨는 그들이 출근하자말자 국기계양이나 하기식 같은 무슨 큰 행사인양 치르는 모닝커피가 영 달갑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고참이라고 한 잔 돌아오는 커피도 무슨 숭늉처럼 벌컥벌컥 단숨에 마시고 나면 커피 잔을 들었다 놓았다 입에 대다 말다 또 담배를 피우다말다 야금야금 마시면서 배달 나온 다방레지와 뭐라고 농담을 주고받는 그 매끈한 사내들이 좀 체로 정이 들지 않았고 어쩌다가 자신이 커피 값이라도 내는 날에는 정말 생돈이라도 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오전을 보내면 또 하나의 스트레스가 따라오는데 바로 점심식사였다. 지금까지는 셋방을 동사무소 옆에 얻어 누가 점심을 사주는 날이 아니면 집에 가서 영순씨가 차려주는 밥을 먹던 습관이라 우선 날마다 밥을 사먹는다는 것도 뭐하지만 당장은 밥값이 문제가 되었다. 교통비를 아끼려고 쌍미천을 따라 걸어 내려와 뒷거울고갯길을 넘어 다니는 판에 한 끼에 버스토큰 다섯 개의 값인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는 분에 넘치는 사치에 낭비였던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몇 달이 지나자 열찬씨 역시 모닝커피와 점심매식에 익숙해지고 작업복이나 점퍼보다는 양복을 입고 머리를 자주 감아 빗고 거울을 보는 일이 잦아졌다. 결국 환경에 적응한 셈인데 아무리 로마에 가면 로마인이 되라고 하지만 시저가 쓴 <갈리아여행기>에 나오는 아직도 미개한 게르만인이나 그 때까지 역사의 전면에 나오지 않은 저 침침한 시베리아숲속의 슬라브인처럼 촌티가 가득한 그로서는 여간 성가신 과정이 아니었다.

그 셋 중에서 가장 열찬씨를 힘들게 한 사람은 바로 한 살 위의 권모란 친구였는데 어찌 된 셈인지 이 친구는 자신이 엄청 잘 나고 고귀한 사람이란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른 사람이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