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66) 가을 단상
【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66) 가을 단상
  • 조송원 기자 조송원 기자
  • 승인 2022.10.07 15:30
  • 업데이트 2022.10.10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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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가을 풍경 [픽사베이]

가을을 실감한다. 생장수장(生長收藏)이라 했던가. ‘봄에 태어나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갈무리한다.’ 생명의 이치이다. 농경사회의 사람들은 이 천도天道에 순응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땀방울로 기르고, 가을에 기쁘게 거두고, 겨울에 갈무리로 아늑하게 지냈다.

현대사회의 생장수장 사이클은 철(계절)과는 무관하다. 이 사이클을 1년에 한 차례가 아니라, 대개 월 단위로 되풀이하며 바쁘게 살아간다. 더 부지런할지언정 아늑함 쉼의 시간을 아쉬워한다. 철을 몰라도 되니 어쩜 우리는 모두 ‘철부지不知’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뿌려야 거둔다’는 사실만은 변함없다. 하여 가을이 수확의 계절임은 분명하다.

가을의 실감은 사람마다 다를 터이다. 몸을 깨우려면 땀을 흘려야 한다. 늦게 자니 늦게 일어난다. 이불을 개고 나서 바로 자전거를 타고 들판을 한 바퀴 돈다. 땀이 밸락 말락 한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낫과 톱을 들고, 집 뒤의 묵정밭으로 간다. 고구마 몇 가마를 캐던 옥토가, 몇 년을 묵혔더니 잡풀 숲으로 변했다.

어렸을 적 몸에 밴 익숙한 낫질로 잡풀을 베어내고, 어느새 터 잡은 잡목들을 톱질로 잘라낸다. 묵힌 세월이 길다보니, 제대로 된 밭으로 되돌리는 작업은 진도가 느리다. 낫질과 톱질로 부지런을 떨다 보면, 이윽고 땀이 쏟아진다. 훔쳐내고 훔쳐내도 땀으로 눈이 시리다. 등짝에 런닝셔츠가 찰싹 달라붙는다. 이만하면 됐다, 작업을 마친다.

몸을 깨우는 일, 샤워로써 완성된다. 적어도 내 경우, 새벽 목욕탕의 목욕은 세수에 불과하다. 몸을 온전히 깨우지 못한다. 땀 흘린 후의 샤워라야 한다. 그리고 이 샤워로써 가을을 느낀다. 땀 흘린 후, 상수도를 틀어 물을 받으면서, 받아 놓은 큰 고무 물통의 물을 끼얹는다. 차다. 이제 막 받은 상수도 물보다 더 차다. 아하, 가을이 왔구나!

‘선풍기 살인’(fan death)을 믿는가?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밀폐된 방에서 선풍기를 켜고 자면, 방 안에 산소가 없어져서 죽을 수 있다고 믿는다.’ 전 세계에서 발견되는 미신들 중에서, 나름의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처럼 믿어지는 것을 ‘유사과학’(pseudo science)이라 한다. 세계적으로 회자되는 한국의 유사과학이 선풍기 살인이다.

왜 이런 미신이 한국에 널리 유포되고, ‘과학적’으로까지 믿게 되었을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잠을 자다가 사망한 사람이 있었는데 다른 원인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문을 닫고 선풍기를 켜고 잤다는 것이 사망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이 사실이 널리 알려져 ‘선풍기 살인’이란 미신이 생긴 것 같다. 아마 심근경색이나 뇌경색 혹은 토사물이 기도를 막아 사망한 것 같다. (‘김지학의 미리미리’/<미디어오늘> 2022.8.20.>)

이 세상사 인간사 그 어디에도 ‘원래 그런 것’은 없다. 그러나 미혹케 하는 ‘미신迷信’일지라도 너와 내가 함께 믿으면, 그 집단적 믿음 속에서 우리는 미신을 정당화한다. 집단적 믿음에 근거한 집단적 사고로써 ‘가리키는 손가락’이 기니 짧니 손곱이 많니 적니 한다. 고개 들어 가리키는 달을 쳐다보는, 그 작은 수고를 아낀다. 그래도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나와 같이 생각하니까 믿을 밖에는. 그러나 ‘온 놈이 온 말을 해도’ 손가락은 달이 아니다.

물이 차다. 가을이 온 것이다. 땔감을 준비해야 한다. 기온이 낮아지니 땀을 내려면 더 몸수고를 해야 한다. 그리고 샤워로 몸을 깨우기 위해 물을 끓여야 한다. 물을 끓이면 자연히 온돌은 달구어져, 서재를 덥힌다. 따뜻이 겨울을 날 수 있다. 다들 목욕탕에 가고, 기름보일러를 켠다. 그들의 당연한 일상이다. 땔감으로 물을 끓이고 서재를 덥히는 일 또한 나의 당연한 일상이다.

‘나’를 바라보는 ‘내 안의 나’로서 생각해본다. 고통(pain)과 괴로움(suffering)은 다르다. 고통은 육체적 경험이다. 찔리거나 부딪히면 아프다. 고통이다. 몸에 병이 들면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경험한다. 반면 괴로움은 고통뿐 아니라 쾌락 혹은 즐거움에 의해 일어나는 정신적 반작용이다.

몸이 아프면 고통스럽고 괴롭다. 그러나 고통스럽지만, 괴롭지는 않을 수 있다. 육체의 고통에다 정신적 괴로움까지 덧댈 필요야 있겠는가. 고통은 고통으로 끝내고, 정신적 괴로움으로까지 확장시키는 않는 내공을 쌓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게 무슨 소용이리요만.

쾌락의 가장 뚜렷한 속성은 지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은 순간적이다. 그래서 쾌락을 경험할 때는 그 쾌락이 강해지고 영원히 지속되길 바란다. 그러나 쾌락의 실체는 찰나이다. 한데 그 실체를 부정하고 즐거운 느낌을 계속 향유하려 하면, 사라지고 없는 즐거운 느낌에 애를 태우면, 괴롭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순간이 실체인 그 즐거운 느낌에 집착하여 괴로워했던가!

이 가을에 뭘 수확하랴. 망양지탄(望洋之嘆), 너르고 너른 바다 앞에서 자신의 초라함에 한탄한다는 말을 자주 떠올린다. 자신의 초라함을 인정하고, 바다 앞에 선다. 과연 탄식할 일인가. 보는 모를 달리하면, 죽을 때까지 알아가도 남을 만큼 너른 미지의 세계가 있다는 것, 차라리 꽉 찬 곳간처럼 든든하지 않은가.

가진 것 적고 철도 모르는 철부지임을 인정하고 나면, 너른 바다도 품을 수 있다는 자각이 이 가을의 결실이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