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화려한 변신⑩
열찬씨는 감사계장의 업무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고 영순씨는 미장원일로 정신이 없는 새 마침내 음력 5월이 닥쳤다. 15일이면 장인 홍상사의 진갑(進甲)날이 되는 것이었다.
음력설에 장인어른이 했다는 ‘사람의 명을 누가 아노? 내가 그 나이까지 살지, 말지?’ 라는 말이 자꾸만 맘에 걸린 열찬씨는 곰곰 생각 끝에 마침내 초청장 문안 하나를 작성했다.
000귀하
오는 6월 14일(음력 5월 보름)은 저희 아버님(홍덕수)님의 진갑(進甲)날입니다,
멀리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6.25때 부산에 정착한지 40년 동안 외롭고 힘든 가운데서 저희 5남매를 무난히 길러주신 알뜰한 보살핌에 보답코자 아래와 같이 간소한 잔치를 베풀고자 하오니 부디 참석하여주시기 바랍니다.
0. 일시 : 1992. 6. 19일) 12:00
0. 장소 : 연산로터리 해암그릴한식부페(한샘학원옆)
초청자 : 홍영순(가열찬), 홍영옥(정홍식), 홍영신(황경철), 홍갑인, 홍영아
누구 하나 진갑연의 비용을 보탤만한 형제는 없었지만 어쩌면 부산에 있는 자신의 옛 동료와 친구, 조기축구회회원들이면 그럭저럭 100석의 자리는 차고 음식 값 정도는 나올 것 같고 모자라면 자신이 일부 보탤 생각이었다.
그날 저녁 처갓집에 세 째 동서내외까지 오게 해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장인어른은
“내가 뭔 할 말이 있나? 그저 이서방 보기가 부끄럽네.”
하고는 세탁소아저씨와 장기를 두러 가고 저마다의 의견을 물어보는데 사리에 밝고 셈이 분명한 황서방네가
“형부는 일만 벌려놓고 돈이 모자라면 우짤 깁니까?”
항의를 했지만 영순씨가
“우짜든동 너거 형부가 알아서 한다 카이 너거는 단돈 한 푼이라도 너거 형편대로만 내면 될 것 아이가?”
가로 막으니 얼마 안 되지만 한 30만 원, 그러니까 황서방의 한 달 월급의 절반정도를 내기로 하고 장모 순란씨가 그 돈에 얼마를 보태어 당사자와 미국의 둘째를 뺀 자식들내외의 한복 여덟 벌을 마련키로 했다. 다행히 여름한복이라 그리 큰돈이 드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음 처가식구 외에 누구를 초청하고 얼마의 부조가 들어오든 식장비 일체는 열찬씨가 부담하기로 하고 마침내 진갑잔치가 확정되었다.
열찬씨는 아주 친한 고향친구 성해씨를 비롯하여 조기축구회원과 연산동의 옛 동료들과 막역한 단체원들, 서구청의 절친한 동료들과 시민과 시절 공과금요원모임의 회장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누구나 으레 하는 행사지만 자신이 감사계장이라는 어딘지 고압적인 자리에 있는 만큼 절대로 강제성이 없도록 아주 친한 사람들에게만 비밀히 초청장을 보냈다.
하객대표로 손재식 과장이 인사말씀을 하고 사회는 감사계 김남규 서무가 맡고 장로인 이장희 기획감사실장은 교회일로 빠지는 대신 자신의 축의금과 구청장의 화환을 보내왔다.
진갑잔치 당일은 연산로터리 가득히 초여름의 활기가 넘치는 화창한 날씨였다. 모두 한복으로 갈아입은 식구들이 열찬씨가 사무실에서 색종이를 둥글게 오려 써 온 <주인공 홍덕수, 아내 김순란, 장녀 홍영순, 큰사위 가열찬, 장남 홍갑인, 세 째 사위 황경철...>들의 이름표를 다니 차림새가 아주 그럴 듯 했다. 중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정석이와 슬비도 키가 훌쩍 자라 볼만했다. 세 째 영신씨의 아이 돌잡이 희정이도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재롱을 떨었다. 장모 순란씨를 닮아 세 딸들이 제가끔 닮은 듯 다른 듯 용모가 고와 모두들 선녀가 된 듯 한복차림이 날아갈듯 하다고 했다.
<홍덕수선생 진갑연>이라고 쓴 플래카드 아래 제법 그럴듯한 잔치 상에는 비록 모조품이 대부분이었지만 유과와 과일과 생선이 거창하게 잘 차려져 있었고 대추, 알밤을 비롯한 일부는 실물이라 술안주로도 쓸 수 있어보였다.
말끔한 옥색 한복으로 갈아입은 장인어른 홍덕수씨는 플래카드 아래 큰상 앞에 앉아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대견하고 흔감한지 연신 벌쭉벌쭉 웃다 스스로도 민망한지 입을 가리기도 했다.
행사진행을 맡은 김남규씨가 마이크를 점검하는 사이 연산조기축구회의 회원들을 필두로 열찬씨의 고향친구와 처가가 되는 양정의 김씨네를 비롯하여 하객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해 어느 새 자리가 반이나 찼는데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무려 서른 명이 넘는 공과금 검침요원들이 들이닥쳤다.
마흔 여덟 명 중에 서른이 넘으면 2/3가 넘는 셈인데 그들은 전 상관이 감사계장이라는 요직이라기보다는 같이 근무하던 시절 <노털카징띠오>로 벌주를 마시고 을숙도 고수부지에서 축구를 하고 산업시찰 중에 경주의 파출소에서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그 진진한 인정을 생각하여 회장 단 한 사람에게 연락했음에도 그렇게나 많이 참석한 모양이었다.
평소 신중한 김남규씨가 차분하게 분위기를 잡아 개회를 선언하고 맏이인 영순씨 내외부터 가족단위로 차례로 술을 올리고 절을 해 막내까지 순서가 끝나고 처가의 조카와 손자들 2,30명이 합동으로 인사를 하고 손재식 과장이
“저는 가열찬계장과 같이 일하는 손재식과장입니다. 우리 가계장님이 직장에서 일만 잘 하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장인어른의 진갑연까지 맏사위로서 성대하게 치르는 것을 보고 정말 감탄했습니다. 장인어른 되시는 홍덕수선생님의 진갑연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축사를 하고 열찬씨가 답사를 한 뒤 자식들과 손자들이 합창을 하러 도열하고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동산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 놓은 새끼 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노래를 시작하자 말자 가슴이 울렁거리며 걷잡을 수 없이 울컥해진 열찬씨가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는며 문득 제대로 된 환갑상도 못 받아본 아버지어머니를 떠올리며 코를 훌쩍이자 전체에 분위기가 전염되었는지 마침내 <아빠가 매어놓은>이 나오자 말자 기어이 영순씨가 훅, 울음을 터뜨리자 영신이, 영아 두 딸도 눈물이 흥건했다.
젊은 날의 홍덕수씨가 세 딸만 있던 시절 술이 취해 들어오면 잠든 딸들을 깨워 부르게 한 노래였기 때문이었다. 순간 짝짝짝 우레 같은 박수소리가 공과금요원들의 테이블에서 터지면서 좌중이 술렁거리고 휘익 휘파람을 불거나 “잘 한다!”, “힘내라!”라는 함성도 들렸다.
가족사진을 찍은 뒤 노래방기기를 털어 주인공내외와 열찬씨를 비롯해 자녀들의 노래를 시작하는데 신명이 많은 조기축구회원들이 나와서 디스코를 추기시작하자 질세라 공과금요원들 서른 명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스테이지가 북새통이 되고 조기회원들이 주인공을 목말태우자 검침원들이 사위인 열찬이에게 장모님을 업게 하고 열찬씨까지 한꺼번에 목말을 태우고 빙빙 돌았다.
다들 나이가 많아 환갑이 다 된 공과금요원들이 자기보다도 나이가 어린 순란씨에게도 예사로 장모님! 소리를 연발하자 순란씨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렇게 북새통이 벌어지자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기에는 연산동이 아니라 부산천지에 따를 자가 없다고 자부하던 축구회원들이 자신들보다 나이 많은 검침원들의 기세에 눌려 슬그머니 빠져버리니 마침내 스테이지는 공과금요원들이 독차지가 되고 그 한 가운데 최재덕씨는 그의 환각상태에 빠진 사람처럼 땀범벅이 되어 허우적거렸고 점잖은 손재식 과장도 마이크를 잡고 <나그네 설움>과 <대지의 항구>를 불렀다.
그 사이 처가 친척과 열찬씨 친구들을 비롯한 하객들이 대부분 돌아가자 열찬씨는 접수받은 부조를 정리한 처남과 황 서방과 함께 카운터에 가서 비용을 지불했는데 다행히 십여 만 원이 남았다.
하객들을 다 보내고 양정의 집으로 돌아가니 외삼촌들을 비롯한 형제들과 조카, 장모의 4촌, 6촌들이 좁은 처갓집의 두 방은 물론 골목어귀 큰 외가의 2층 방 세 곳에 빼곡히 모여 있었다. 급한 데로 남은 돈으로 과일과 맥주를 사 상을 차리고 닭을 다섯 마리나 사서 무와 고춧가루를 넣고 국물을 넉넉하게 잡아 닭볶음을 준비하고 밥을 해 방방이 둘러 앉아 저녁을 먹는데 열찬씨가 대표로 인사를 하러 다니자
“이 서방이 어데서 그래 좋은 잔치를 배워 왔노? 우리는 그래 잔치도 못 해본 것이 억울하고 홍 서방이 붋어 죽겠네.”
하며 부러워했고 소방차를 모는 사촌처남으로 영순씨의 오빠라 촌수는 손위이지만 열찬씨보다 한 살 아래의 헌범씨가
“우리 재매가 엘리트공무원인줄은 알지만 능력이 그 정돈 줄은 몰랐어요. 정말 대단해요. 내 인자사 영순이가 시집 잘 간 줄 알았어요.”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과자 집을 운영하던 세 째 삼촌의 맏이인 그는 장사가 잘 되어 풍족하게 사는 것은 물론 당시 모든 아이들의 선망인 과자를 실컷 먹는 호사를 누렸지만 불행히도 계가 터지는 바람에 생모가 가출을 하고 새엄마 밑에서 외롭게 자랐다.
고종사촌 동생 영순씨를 끔찍이 아꼈는데 어느 날 문득 시집을 간다는 영순씨의 신랑 열찬씨를 보고 저 덩치도 조그맣고 새까만 얼굴조차 볼 것이 없고 직업마저 아무도 딸을 안 준다는 동 서기한테 무얼 보고 예쁘고 착한 영순이가 시집을 가는지, 동생이 너무 아깝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을 흘렸고 얼마동안 열찬씨와 아는 척도 않고 지낸 사람이었다.
집에 까지 온 손님들도 다 돌아가자 이제 본 식구들만 남아 한복을 정리하며 짐을 챙기는데
“다들 고맙고도 고생 많았다. 그라고 내 이 서방 자네가 아니라면 우짤 뿐 했을지 모르겠다. 자네 덕에 내 체면을 한 번 크게 세웠네. 맨날 날 38따라지라고 놀리며 날 따돌리던 처남들한테 저거는 몇 년이 걸려도 못 살 만큼 오늘 크게 한턱 낸 거 아이가? 내 인자사 죽어도 한이 없데이.”
하고 치하를 하는데 그 표정이 너무 비장하다 싶은데
“보소! 잘 나가가다 삼천포라 카디마는 가서방한테 그냥 욕받다, 고맙다 하면 될 일로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말은 다 뭥교? 마 좋으면 그냥 좋은 거지 호강에 받쳐 똥 사는 겅교?”
장모님이 바로 반박하는데
“몰라. 이렇게 좋은 날에 와 자꾸 눈물이 나는지 내사 마 모리겠다.”
하며 장인어른이 눈물을 훔쳤다.
“장인어른, 오늘이 문제가 아니라 칠순 때는 더 멋지게 채려드릴 테니 그리 알고 울지 마이소.”
달래는 열찬씨의 마음도 왠지 개운치 못했다.
이튿날이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