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291)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10장 교통사고④
대하소설 「신불산」(291)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10장 교통사고④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10.31 07:05
  • 업데이트 2022.10.30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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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교통사고④

그런가 하면 열찬씨의 네 누님은 각자의 사정에 맞게 갖가지 형태로 무언가를 들고 왔는데 신평의 갑찬씨는 주로 도토리묵이나 메밀묵을 가져와 온 병실에 돌리는 바람에 묵누님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김해의 순찬씨는 딸기, 토마토, 단감, 사과등 주로 제철의 과일을 들고 왔지만 메밀묵을 쑤어올 때도 많았다. 반면 손끝이 야무친 금찬씨는 뼈가 붙는 데나 골병이 든 데는 개고기가 좋다면서 수육이나 보신탕을 들고 왔고 영순씨의 부탁으로 비용을 받아가 개소주를 달여 오기도 했고 마지막 덕찬씨는 참기름, 깨소금, 검은 콩, 팥 같은 곡식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슬쩍슬쩍 영순씨에게 돈을 한 푼씩을 찔러주고 가는 모양이었다.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위로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참이나 늘어놓다 툭툭 털고 일어서는 황당한 문병객도 있었는데 그 대표가 바로 고향선배 백창호 계장이었다. 평소부터 말이건 행동거지건 막힘이 없고 늘 당당한 그는 특유의 톤이 높고 울렁울렁한 목소리로 

“열찬이 자네는 그 좋은 글재주 가지고 문학에 대한 꿈을 접었는가?”로 시작해서 자신은 스무 살이 넘어 문학에 눈을 떠 사십 넘어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지만 어느 듯 부산문단의 중진이자 중심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문학이 뭐 별 것인가, 누구나 의욕을 가지고 자신 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바로 문학이라고 자랑이 늘어졌다. 
 
열찬씨가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보아도 삼남면시절의 백창호씨는 능숙한 일처리와 막힘없는 말솜씨로 임시직이 아깝다는 소리를 듣던 활달한 공무원이었지 조용히 책을 읽거나 꼼꼼하게 무슨 일에 천착하거나 심각한 고뇌를 하는 문학이나 철학하고는 도무지 연상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물론 친형이 경찰서장을 지내는 것으로 보아 머리가 뛰어날 수도 있지만 임시직에서 정식공무원이 되는 시험에 늘 고전하던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납득하기가 힘든 일이었다.

그는 지금 한국문단의 조류가 일간신문의 신춘문예나 <현대문학>의 추천을 거친 소수의 엘리트 귀족문인들만 횡행하고 진정으로 문학을 좋아하거나 문학의 열정을 불태우는 대부분의 지망생, 특히 지방의 문학도들에겐 너무나 완강하게 입성이나 동화(同化)를 거부하는 동맥경화처럼 경색된 실정이라며 자신이 부산이라는 지역성을 대표하면서도 그런 소외받는 지망생들을 등단시킬 문예지창간을 구상하고 있다면서 조만간 훌륭한 원로문인들을 추천문인으로 구성해 곧 창간을 선언할 것이라고 큰 소리를 탕탕 쳤다.
 

당시의 열찬씨는 낮에는 주로 책을 읽었지만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간간이 대학노트에 연필로 짧은 수필이나 시를 일기처럼 끌쩍거렸는데 그 중에서 열차를 타고 영주의 큰댁으로 제사를 지내려 오가며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는 형제간의 갈등과 그 스산한 마음을 피력한

 떠도는 길목에서

 어디를 가야할 지를 잊어버리고
 이대로 다시는 못 올 것만 같은 느낌에
 지하도를 건너다 육교를 오르다 
 문득 나는 
 미아가 됩니다.

 새들이 날아가는 하늘의 길은
 보이지 않아도 사랑의 길이지만
 내 앞에 펼쳐진 남은 삶은
 가늠할 수 없는 불안의 연속
 당신을 향해 가는 내 마음의 길은  
 무지개로 놓여 진 꿈의 길이지만 
 해가 뜨면 허공으로 남는 환상입니다.

 어느 길모퉁이 전봇대에서
 너덜거리는 구인광고나
 맨홀 위를 굴러가는 나뭇잎을 보면서
 어딘지 모르고 가고 있는 이 길이
 이제 되돌아올 데 마자 없다는 생각에 
 언뜻 가슴이 미어집니다.

 가로로 세로로 또 빗금으로
 전선은 길을 내고 밭을 갈지만
 달도 잘 뜨지 않는 이 회색의 공간에서
 당신의 얼굴을 떠올리기는 너무 벅찹니다.

 간간이 찾아와 전선위에 울고 가는 
 바람소리를 듣다 어느 듯 
 내가 바람소리가 되고 맙니다.
 
완성된 시를 보고 연방

“좋아, 아주 좋아! 역시 솜씨가 조금도 죽지 않았구먼!”

찬탄을 늘어놓다가

 

 제방 길을 갑니다.
 밋밋한 강물을 따라 무심히
 둑길을 따라 흐르듯 내가 갑니다.
 철망에 담긴 돌들은 소리 내지 않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돌 틈에서 꽃이 피고
 달개비 꽃 열매가 익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모퉁이엔가 패랭이꽃이 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새가 울고 모래바람이 일 때
 패랭이꽃의 꽃말은 안타까움이었습니다. 
 당신을 처음 사랑하는 소년 적에는
 들국화가 당신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모래톱에 낄룩낄룩 울어대는 
 물새소리가
 당신의 목소리 같다고 생각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자갈 틈에서 찾아낸 쬐끄맣고 점 박힌 물새알의 촉감은 
 당신의 안온한 온기였습니다.
 
 염소를 매어둔 제방 둑에 십일월이 오면
 들풀은 적갈색 주검으로 남고
 적갈색 주검으로...
 주검으로...
 
아직 미완성의 시를 큰소리로 읽어보다 볼펜으로 밑줄을 죽죽 그으며 

“완성시키면 이게 더 좋겠군!”

하다가 

 

 보라색, 선홍색 당국화는 너무 흔한 원색이라
 어느 곳 처녀들의 옷감이나 수실로도 쓰지 않지만
 그 진하디 진한 색상의 우울이
 조금씩 묻어나
 연분홍 진 자주 빛 물빛구름의
 코스모스에 옮아
 가을의 산길은 온통 안타까움으로 물들여
 여름을 따라가는 고추잠자리의 나래 짓을
 자꾸만 멈추게 합니다.

 베어낸 그루터기 하나에서도
 잎 떨어진 가지 하나하나에도
 혹은 부엽토로 자리 잡아 형체를 잃기 시작하는 낙엽에도
 우리 좋은 시절의 메아리가 조금씩 묻어 있습니다. 
 단풍나무 잎새에도.

하는 부분에는 전체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마지막 단풍나무 잎새에도 라는 구절이 참 좋아 마치 노래가사의 후렴처럼 감칠맛이 있잖아?”
 

하더니 대학노트를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정리만 하면 당장 시인으로 등단해도 되겠네.”
 

하면서 병실을 나가는 것을

“형님, 전 소설가지망생이잖아요? 시는 심심풀이로 쓴 신세타령입니다. 두고 가이소.”

말려도

“까재나 기나 고동이나 시인이나 소설가나 그 기 그 거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가버렸다.

 

김남규씨의 병세는 나날이 호전되어 목발을 짚는다는 것을 빼면 별 불편이 없었지만 열찬씨의 다리는 한 달이 지나도 도무지 진척이 없이 어쩌다 오른 쪽 발바닥이 땅에 닿기라도 하면 고압선에 감전된 듯 찌릿찌릿했다. 담당의사에게 이야기해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뼈에서 진액이 나와 금방 붙을 것이라는 막연한 이야기뿐이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