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시대11-에세이】 러브의 발견 - 림태주
【시민시대11-에세이】 러브의 발견 - 림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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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1.15 05:00
  • 업데이트 2022.11.16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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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태주 시인

“러브가 무엇이오?”

개화기 조선을 무대로 펼쳐지는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에는 러브를 모르는 여자 애신과 러브의 뜻을 잘 아는 남자 유진 초이가 등장한다.

“헌데 그건 왜 묻는 거요?”
“하고 싶어 그러오. 벼슬보다 좋은 거라 하더이다.”
“뭐,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헌데 혼자는 못하오. 함께 할 상대가 있어야 해서.”
“그럼 나랑 같이 하지 않겠소?”
“......”
“아녀자라 그러오? 내 총도 쏘는데.”
“총 쏘는 것보다 더 어렵고 그보다 더 위험하고 그보다 더 뜨거워야 하오.”

「미스터 선샤인」은 역사물인 듯 싶지만 ‘러브’를 여러 형태로 보여주는 멜로드라마다. 총 쏘는 것보다 어렵고 그보다 위험하고 그보다 뜨거워야 하는 일로 정의된 러브를 나는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이토록 황홀하고 진기한 ‘러브의 발명’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러브의 뜻을 몰랐기에, 그래서 러브가 무엇인지를 물었기에 가능하다.

우리는 사랑을 할 뿐 사랑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이미 사랑을 알고 있다고 믿으며 사랑한다. 정작 우리는 사랑의 의미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아는 것은 자서전적인 의미가 아니라 국어사전에 표기된 일반론의 정의일 뿐이다. 그렇게 배우고, 그게 정답이라고 믿어버리면 좀체 사전辭典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고정돼 버린다는 것은 생각의 죽음, 곧 언어의 죽음을 의미한다.

빈센트 반 고흐를 ‘태양의 화가’라고 부른다. 1888년, 그가 그린 「해바라기」는 강렬한 노란빛과 붓 터치, 화면의 질감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하다. 고흐가 처음부터 밝고 강렬한 색감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파리로 건너오기 전 네덜란드에 있을 때, 1885년에 그려진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라.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와 흙빛에 가까운 색채는 <해바라기>의 강렬한 색채와 완연히 다르다. 파리로 이주한 후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으로 네덜란드에 있을 때보다 훨씬 내면적이고 다채롭고 밝아진다.

당시 파리의 화가들은 가시적 세계의 ‘재현’을 넘어서 비가시적인 감정과 관념의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고흐가 존경하고 애증했던 동료 화가 고갱은 그에게 인상주의적 색채를 더 쓸 것을 권하며 남부로 가라고 말한다. 그의 충고에 따라 고흐는 프랑스 남부지역 아를로 가서 작업에 몰두한다. 만약 고흐가 남부로 가지 않았더라면, 태양이 이글거리는 듯한 <해바라기>도, 고흐 그림 중에 가장 미려한 청색이 쓰인 <꽃 피는 아몬드 나무>도 그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왜 고갱은 고흐에게 남부로 가라고 했을까? 나는 그 말을 ‘빛을 찾아 떠나라!’는 말로 해석한다. 이 말은 사실적인 피사체가 아니라 당신 안의 정념, 그 감정의‘의미’를 찾으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이탈리아 예술가, 피에르 만초니는 1961년 <예술가의 똥>이라는 통조림 캔 작품을 선보인다. 캔 표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예술가의 똥, 정량 30그램, 신선하게 보존됨, 1961년 5월에 생산되어 저장됨.’

만초니는 한 달 동안 이런 통조림 90개를 제작해 각각 에디션 넘버를 붙인 뒤 진품임을 보증하는 서명을 남겼다. 현재 이 통조림은 한 캔에 억 원 단위로 거래되고 있다. 만초니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술가라는 존재가 우상화되거나, 상술이 판치는 미술시장의 부조함을 조롱하려고 했다. 같은 해에 만초니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컬렉터가 작가에게 친밀한 무언가, 정말 개인적인 무언가를 원한다면, 여기 예술가가 직접 싼 똥이 있다. 이 똥이야말로 진정한 작가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배설 행위를 포장해 마케팅하고 브랜드화해 창의적인 활동으로 재탄생시켰다. 아무도 모른다. 캔 속에 정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만초니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냈고, 사람들은 그 의미를 비싼 값에 사고판다. 

이보다 더한 사례도 있다. 영국 작가 마틴 크리드는 2000년에 「작품 No.227 계속해서 켜졌다 꺼졌다 하는 조명」이라는 작품을 발표해 영국 최고 권위의 현대미술상인 터너상을 받았다. 제목이 알려주듯이 이 작품은 전시장 안의 조명이 5초간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한다.

본질적으로 이 작업에는 어떤 내용물도 없다. 작가는 무엇을 더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공간에 간단한 설비만 갖추어 관람객이 스스로 의미를 생각해보도록 했다고 한다. 크리드는 세상에 잉여물을 만들어내는 일 없이 예술활동을 하는 방법을 찾으려는 생각에서 나온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전통적 예술 관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런 ‘아이디어’ 혹은‘개념’이 예술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남성용 소변기에 ‘R. Mutt’라고 사인해 1917년 뉴욕 독립미술가전에 출품한 마르셀 뒤샹이 “어떤 형태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주창한 이래 현대미술은 갈고닦은 작가의 ‘솜씨’가 아니라 하나의‘제안’, 하나의 ‘개념’, 하나의 ‘의미’를 예술로 보라고 말하고 있다.       

‘Like’와 ‘Love’의 차이는 좋아함의 강도일까?

나는 이 둘을 우연과 필연으로 구분해서 쓴다. 바다나 꽃을 좋아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아도 될 때, 즉 그냥 좋거나 기분에 따라 좋을 때는 라이크를 쓴다.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때만 나는 러브를 쓴다. 그 필연은 나 혼자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흔하지 않고 가볍지 않고 집중을 요구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다면 단순하지 않은 필연성과 시공간적 근거를 발견했다는 소리다. 그 이유는 나의 쓸모와 존재감, 사람다움의 의미에 근접했다는 걸 말한다. 그래서 러브는 끊임없이 신화를 만들어내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지어내고 끊임없이 궁금해한다.

이 마음, 이 변죽, 이 사물, 이 시간, 이 언어, 이 몸짓, 이 징후, 이 연결이 무얼 의미하는지. 해석하고 부정하고 수용하고 추구하고 상상한다. 까닭에 나의 러브는 그 의미를 찾는 질문들에 대한 내 일생의 응답이다.

나는 러브를 사유하고 러브를 하고 러브를 쓴다. 이 말은 곧 내 삶이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과연 그 의미란 것이 삶의 실전에서 얼마나 쓸모 있는 것일까? 러브를 할 것인가, 러브를 생각할 것인가의 질문이 무의미하듯이 글을 쓸 것인가, 글쓰기를 사유할 것인가도 무의하다. 왜냐하면 러브를 하지 않으면 러브의 사유는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쓰기를 사유할 뿐 실제로 쓰지 않으면 삶의 시간은 축적되지 않고 휘발해버린다.

쓴다는 것은 기록한다는 것이고 기록은 맹렬하고 정밀하게 지금을 타격한다는 것이다. 살아있음을 순간순간 느끼려면 쓰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쓴다는 것은 질문하는 것이고 생각하는 것이고 의미를 찾는 것이고 빛을 만나는 일체의 종합이다. 그러므로 실존에서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대는 러브를 하오?”

림태주 시인

◇ 림태주 시인 :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이다. 출판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관계의 물리학』, 『그리움의 문장들』, 『그토록 붉은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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