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308)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12장 죽은 자와 산 자⑦
대하소설 「신불산」(308)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12장 죽은 자와 산 자⑦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11.17 06:50
  • 업데이트 2022.11.16 1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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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죽은 자와 산 자⑦

이튿날 속을 달래라며 귀찬씨가 콩나물을 넣고 달걀을 푼 북어 국을 끓여주었지만 입천장이 깔깔해 먹는 시늉만 하고 집을 나섰다.

서울법학원에 도착해 고사장인 혜화여고까지 학원버스로 이동하는데 열찬씨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하며 뒤쪽에서 누군가

“어떤 사람이 시험 치는 날 이럴게 술을 먹고 홍시냄새를 풍기는가? 정신상태가 글렀다. 도대체 어디서 온 누구지?”

낮게 속삭이자 온 차안의 시선들이 일제히 열찬씨를 향했다. 옆자리의 복지계장이 민망한지 옆구리를 찌르면서

“화상아 어지간히 처 묵지? 이라다가 부산사람 전부 가부시끼 망신하겠다.”

하고 비죽이 웃는데

“씨발, 몸도 아프고 공부도 못 한 내가 걸릴 택도 없고 그저 촌놈이 한양 와서 서울 술이나 양껏 묵고 가는 거지 뭐.”

열찬씨는 배 째라는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윽고 고사장에 도착해 민망해서 차마 고개도 못 들고 버스에서 내리는데

“이 계장, 이열찬 계장!”

머리가 허연 시민과의 최선웅 계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니가 내 바로 뒷자리더라. 점심때 우리 철민이가 초밥을 사가지고 한 시까지 온다 카더라. 자네 몫까지 2인분 시켰으니 어데 가지 말고 내캉 같이 밥 묵자.”

“예, 고맙심더.”

비록 평생을 커피와 바둑과 고스톱에 탕진했지만 이제 퇴직이 임박한 시점에서 몇 번이나 떨어진 사무관시험의 마지막 찬스가 얼마나 절박할까, 만약 경쟁이 단둘이서 2:1경쟁이라면 한 해 늦을 셈 치고 양보라도 할 심정이었지만 다섯 자리를 놓고 열다섯이 겨루니 그럴 수도 없는 처지였다. 속속 도착한 동료이자 경쟁자 열다섯이 돌아가면서 서로 시험 잘 보라는 덕담을 하고 고사장으로 들어갔다.

 

문제지를 받아든 열찬씨의 눈앞이 까맣게 흐려지더니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간혹 들어본 이야기도 있었지만 보지도 듣지도 못한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여태 고생한 것이 아까워 볼펜을 굴려서 요행수라도 노릴 참으로 조용히 눈을 감고 가슴을 진정시키자 마침내 목욕탕의 욕조 안에서 다섯 과목 교재의 목차를 외우던 생각이 나 수험과목의 목차를 찬찬이 더듬어보고 다시 문제지를 읽으니 그럭저럭 칸을 매울 수가 있었다.

최선웅 계장 덕분에 전국의 수 천 명 수험생 중에 가장 그럴듯한 초밥점심을 먹고 오후시험까지 치르고 서로 시험 잘 쳤느냐 주고받으며 학교를 나서는데 길을 걷는 행인들이 표정이 뭔가 당황하고 들뜨고 거리가 붕붕 뜨는 느낌이었다. 그 때 뒤에 걸어오는 한 수험생이

“하마터면 시험이고 사무관이고 끝장이 날 뻔했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김일성이 죽었다는 뉴스가 나와서 나라 전체가 비상이 걸리고 사무관시험이 취소나 연기되는 줄 알아서 조마조마 한 마음을 달래며 차마 입 밖에 말도 못 꺼냈지.”

하는 것이었다.

김일성, 아 김일성이가 죽다니. 오늘이 기껏 사무관이 되나 마나의 자신보다는 남북한 7천만 동포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날이고 그 북새통 속에서 무사히 시험을 치른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역에 도착해서 새마을 표를 끊고 난 일행들이 오뎅과 소주 따위를 파는 포장마차에 들려

“죽은 독재자를 위해 건배!”

“남북통일을 위해 건배!”

“우리의 사무관합격을 위해 건배!”

안도의 한숨과 함께 비로소 개운한 마음으로 술잔을 들었다.

 

집으로 향하는 새마을호를 타고 내려오면서 러시아 코뮤니스트의 사주를 받아 반만년 민족사의 가장 큰 아픔인 동족상잔의 6.25를 일으켜 수백만의 생명을 앗아간 독재자의 죽음을 맞아 ‘아, 마침내 분단과 냉정의 원흉이 죽었구나!’ 하는 통쾌함 보다는 길가다 발견한 죽은 뱀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 하듯이 뭔가 켕기는 불안한 마음을 금치 못 하고 조용히 숨죽인 일반승객과 달리 수험생 일동은 또 다른 곤혹에 시달리고 있었다.

뜻밖에도 시험문제가 너무 생소하고 엉뚱해 누구도 자신이 몇 점이나 받았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막스 베버가 관료주의이론에서 설파했듯이 설령 한 나라가 찬탈되거나 몰락되어 바뀌거나 정권이 교체되어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신중하고 수동적이며 눈치껏 시류(時流)에 영합하는 관료들의 행태처럼 지방행정직 공무원의 5급 승진시험이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바뀌지 않던 5지선다와 OX형의 약간 어렵고 적당히 혼란스럽지만 그럭저럭 풀만한 출제경향이 무슨 이윤지 도무지 들어본 일도 없는 생소한 형태로 바뀌어 그동안 기출문제만 달달 외우면 되었던 늙은 응시생들을 황당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몇몇의 응시생들이 그 중에서도 가장 생소한 지역개발론의 문제와 다섯 개의 답을 놓고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은 어떻게 틀린 것인지 설왕설래하다 결론이 나는 순간 환히 웃거나 얼굴을 찌푸리며 일희일비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열찬씨는 대화에 끼어들 수도 없는 것이 그런 문항이 있었는지 그래서 무얼 선택했는지조차 기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통로를 지나가는데 같은 또래의 새마을계 박주영 계장이 따라 나오더니 화장실 문 앞에서 목발을 받아주며

“먼저 갔다 오소. 일보고 맥주나 한잔 합시다.”

하더니 식당 칸으로 이끌어 술잔을 부딪치며

“늘 푼수 없는 영감쟁이들 이야기 들을 필요도 없소. 아무 생각 없이 기출문제나 달달 외우는 저 영감들이야 매번 시험 전에는 백점, 시험 치면 90점, 발표나면 빵점자리들 아니오? 또 저 어른들이 설령 시험에 걸린다한들 골목대장이나 하며 술이나 마실 텐데 서구행정이나 지역사회에 무슨 보탬이 되겠소. 우리 가형이나 나처럼 창의력이나 추진력 배짱이나 포부도 호연지기(浩然之氣)도 없이 그저 가재나 끼나 고동처럼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하면서 경남 고성군 영현면이란 두메산골에서 가난하게 자라던 이야기, 젊어 술이 만취되면 이 세상이 다 제 것 같아 길가의 전봇대가 자신에게 굽실거리지 않는다고 밤새 주먹질을 해 손잔등이 걸레쪽이 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당초의 3배수에 들지도 못 했던 우리 둘이 시험에 붙어 저 타성에 젖은 영감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자면서.

 

수험생들이 복귀한 월요일. 오랜만에 안부를 묻는 아침인사에서부터 간부회의를 마친 과장들이 주관하는 계장회의를 거쳐 점심시간을 지나자 구청의 실과마다 누구는 시험을 잘 치고 누구는 또 망쳤으며 누구는 아무 생각 없이 들러리만 서고 왔다는 소문들이 이어지고 구내식당과 인근의 다방과 생맥주집까지 화제가 퍼져나갔다.

당시 구청에는 구청의 행정 동향을 파악하고 정보를 수집한다는 명목으로 정보를 담당하는 형사가 매일 구청장실을 비롯한 각 실과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말이 동향파악이지 사실은 일제 때 민간을 사찰하며 식민지정책에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애국지사나 그 가족을 감시하던 순사들처럼 공무원들의 심기를 늘 불편하거나 불안하게 했다. 또 겉으로는 사양하는 척 하면서 점심이나 술대접을 받는데 별 스스럼이 없는 그야말로 너무 가까워도 멀어도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평소 사사건건 구정시책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시비를 걸며 가시 돋친 기사들 쓰는 출입기자와 함께 공무원들이 가장 꺼리는 성가신 존재였고 한편으로 옛날 산골마을의 방물장수나 소금장수처럼 여기저기의 새로운 정보나 동향을 전파하는 순기능도 있었다.

과히 구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15명 계장의 명운이 걸린 이번 시험의 결과나 예상은 당연히 그들의 관심을 끌었다. 따라서 그들도 뭔가를 파악하고 예견하는 정보의 유용성과 자신의 유능함을 과시하기 위해서 수첩에 15명의 명단을 쓰고 이름 뒤에 각 다섯 명씩 O. X와 △ 표시를 했는데 O는 합격예상, X는 탈락예상 △는 복병이었다. 시청에서부터 엘리트로 소문난 이승암 감사계장은 O에 속하고 이청희 예산계장과 김길탁 복지계장, 박주영 새마을계장은 복병인 △에 속했고 열찬씨는 X에 속했다. 시험 준비기간도 턱없이 짧은 데다 몸마저 성치 않았으니 합격은 고사하고라도 1차 시험 한 두 과목이라도 패스하면 그런 다행이 없다는 이야기였고 많은 구청직원들이 수긍하듯 열찬씨 자신도 이의가 없었다.

 

그들이 돌아온 주말에 대대적인 계장인사이동이 있었는데 그동안 근 3개월 자리를 비워 공백이 생긴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취지라고 했다. 뒤집어 말하자면 이미 사무관시험을 치러 곧 합격자 사무관이 되거나 불합격의 낙오자가 되더라도 이미 사무관 바람이 들어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응시자들을 비교적 업무의 중요도가 낮은 한직으로 보내고 언젠가의 응시를 위한 고과점수를 따기 위해 근무의욕이 넘치는 젊은 계장들을 일선에 배치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마흔 네 살, 40대 초반의 열찬씨도 도매금으로 고참계장으로 지목되어 세무과 세외수입계장으로 발령이 났다. 세외라는 이름처럼 그 닥 관심을 끌거나 비중이 있지도 않는 자리로 위로 과장이, 아래로 주무와 직원이 있어 그저 형식적인 결재 외에는 아무 할일도 없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과장 실에서 이런저런 한담과 함께 회의를 마치면 직원 셋을 모아 자신도 별 내용도 없는 회의를 하며 서로 수첩이나 끄적거리다가 과장실 테이블의 조간신문을 눈치껏 읽다가 점심을 먹고 식곤증으로 한참을 졸다가 외근을 달고 목욕탕에서 다리를 풀고 퇴근길엔 가끔 동료들과 횟집이나 생맥주집에서 술을 마시다 노래방에 들르기도 하면서 어느 새 무위도식, 하는 일 없이 적잖은 월급이나 타가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행정학 이론에서 좋게 말해서 조직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중복적 가외조직, 나쁘게 말해서 의사결정과 행정의 흐름을 지연시키는 동맥경화의 이중조직에 젊은 그가 똬리를 튼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일 없이 꾸벅꾸벅 졸며 세월이나 죽이면서 열찬씨의 마음은 왠지 알지 모를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