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죽은 자와 산 자⑧
그렇게 하는 일 없이 꾸벅꾸벅 졸며 세월이나 죽이면서 열찬씨의 마음은 왠지 알지 모를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무료한 오후 아무 의미도 관심도 없는 공람문서를 읽다가 창밖의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면 왠지 서글픈 생각, 뭔지는 몰라도 이건 아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는 것인가 회의가 들는 것이었다.
일부러 창밖으로 나와 다시 피우기 시작한지 1년이 된 담배를 뻐끔거리며 따뜻한 햇살이 부서지며 비닐로 만든 조화처럼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팔손이의 잎가지가 과연 여덟 개인지 세어보다 어둑한 사무실로 돌아와 다시 상념에 빠지고 그런 깊은 상념에서 깨어날 때 깊은 물속에 허우적거릴 때 떠다니는 물방울이나 기포처럼 웅웅거리며 귓가를 파고드는 수런거림이 아득한 낭떠러지로 그를 떨어뜨리는 것만 같아 괜히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아, 이 근거도 없는 불안과 절망감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교통사고와 다리절단의 절체절망의 위기에서 그저 요행이나 바라던 어둡고 불안한 기대와 무방비의 버팀으로 살아남은 내게 또다시 이런 칙칙한 공포가 엄습하는 것은 왜 일까, 아직도 내게는 더 이상의 불행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조바심이 남은 것일까? 온갖 상념에 빠진 그는 한순간에 문득 영주의 어머니가 돌아간 이후 제사 때마다 왕복하는 차창가의 시꺼먼 어둠에서 엄습하던 알 수 없던 공포, 새파란 강물이나 수수밭, 나란하게 줄을 지은 비닐하우스나 수염이 하얀 염소나 빈 들판을 가로지르는 아이들과 아이들을 쫒는 강아지들의 질주에서 번져오던 불안감이 바로 미구에 닥쳐올 교통사고, 식물인간과 다리절단의 엄습한 불행을 예고한, 아니 그 불행의 그림자를 자신의 무의식이 예감한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등단 시 <떠도는 길목에서>의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쓸쓸한 배경과 톤이 되어 추천자 이석 시인마저도 ‘가열찬 시인의 감성은 참으로 특이하다. 어디선지 모르게 베어나는 알 수 없는 외롭고 쓸쓸한 서러움과 불안함이...’ 의 심사평이 나온 것인지도 몰랐다. 아아, 그랬구나. 저 어둠의 동굴처럼 시꺼먼 불안과 불행이 서서히 다가오면 자신도 모르게 온몸으로 그 어둡고 엄습한 미래를 자각하는 것이구나, 그랬었구나!
그렇다면 그 절체절명의 위기가 극복되고 한가하기보다는 무료한 안일에 빠진 지금의 내가 이렇게 불안한 것은 왜일까? 단지 33%의 합격률을 가진 3배수의 사무관시험,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 그 시험의 승패 때문일까, 오랫동안 곰곰 생각하던 그는 마침내 자신을 에워싼 그 불안의 정체를 조금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우선 가장 큰 우려는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 한 낯선 직장에서 절름발이 부상병이 되어 오직 살아남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친 것이 더러 성공하고 더러 실패하며 때로는 찬사를 받고 전진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지만 수많은 경쟁자를 양산해 늘 질시와 견제의 눈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아이들은 점점 자라 내년이면 하나는 대학생이 되고 하나는 고등학생이 되는데 천신만고 끝에 주택공사의 아파트 하나를 마련한 것 외에는 여전이 박봉의 공무원에다 영순씨의 미장원마저도 그만 두어 학비마련의 길이 아득한 것도 문제였다.
또 있었다. 바로 눈앞에 닥친 가장 절박한 문제, 바로 사무관시험의 당락이었다. 만약 합격하여 젊은 목민관이 되면 그런 영광이 없겠지만 다섯 명의 동료가 합격하면 자신은 그날부로 그들의 수하가 되기도 하지만 이제 젊은 나이에서 요직에서 물려난 한갓 늙다리계장이 되어 중도 속도 아닌 어정잡이가 되어 눈칫밥을 먹어야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곰곰 생각하다 보니 자신의 가슴속 깊이 아니 뇌리 깊숙이 똬리를 튼 아주 오랜 슬픔의 두 뭉텅이를 찾아내었다.
그 하나는 대학을 중퇴하고 소설가와 국어선생의 꿈을 포기한 문학적 좌절이었고 또 하나는 가을날 오후 코스모스가 가득 핀 언덕이나 오솔길을 가득히 배회하는 잠자리 날개 끝에 걸린 가는 숨소리나 안타까운 탄식 같은 연연한 그리움과 회한 바로 잃어버린 첫사랑 순영씨에 대한 그리움, 이제 어떻게도 풀 수 없고 누구에게도 한탄할 수 없는 아쉬움과 절망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일곱 살 때부터 아버지가 만들어준 조그만 지게로 솔잎을 긁어 지고 오면서 시작한 농사일과 나무하기,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시작한 오랜 공무원생활, 제대직후 단 사흘을 쉬고 바로 복직한, 날마다 저녁밥이 걱정되던 늘 쪼들리던 객지생활과 가난한 가족의 틈바구니에서 단 하루도 만족하거나 평온하지도 못 한 채 교통사고의 절망을 겪어내며 근근이 이어온 반생에서 문득 찾아온 이 무위도식에 가까운 평온과 안일이 두려운 것이었다. 뭔가 바쁘고 뭔가 아쉬우면서 뭔가 힘들고 꼬여서 이리저리 허덕여야만 살아가는 것 같고 그래저래 하루하루를 넘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 쉬던 정신없이 바쁜 일상, 그 혼란과 피로를 벗어난 것이 새로운 혼란과 불안을 몰고 온 것이었다.
또 있었다. 얼마 안 돼는 논이었지만 대부부분의 논들이 봇물도 논물도 대지 못 하고 그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에만 의존하는 천수(天水)답이라 단 한 해라도 마음 편하게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고 풍성한 수확도 거둘 수가 없어 무언가 늘 불안하고 아쉬운 마음바탕이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겨우 300평 남짓한 오룡골 논은 덕천고개를 넘어가는 신작로의 오른쪽 아래와 왼쪽 위의 두 곳으로 떨어져 있었고 위쪽의 200평은 논배미수가 무려 열두 매미가 되어 가장 작은 논배미는 겨우 서너 평의 크기인데 그나마 높다란 언덕위에 걸린 <들은치기>라 두텁게 논두렁을 만들지 않으면 금방 물이 빠져 도저히 모를 심을 수가 없는 판이었다.
5월말 경 비로소 넉넉하게 봄비가 내리면 물길이라고는 여상 뒤의 비스듬한 언덕바지에서 국도를 끼고 흐르는 자갈투성이의 좁은 도랑뿐이라 자동차가 다닐 때마다 튀어 오르는 자갈이 깔리고 뿌연 먼지가 가득한 수면에 휘발유찌꺼기에서 퍼져나가는 자줏빛 무지개가 둥둥 뜨는 물을 받아 소도 못 들어가 쟁기질도 못 하는 좁은 바닥의 보리를 베어낸 그루터기를 삽으로 뒤집어 오래오래 발로 밟아 만든 얼마 안 되는 뻘로 ㄷ자형의 논두렁을 바르기 시작하면 장에서 갈치나 가재미 또는 고무신을 사들고 지나가던 촌로들이
“봐라! 학생아, 그래 논두럼 다 찍어 바르면 모심을 땅이 어디 있겠노? 차라리 메물이나 육도(陸稻)를 심든지.”
하면서 혀를 껄껄 차기도 했는데 간신히 물을 잡으면 마르기전에 벼락치기로 모를 심어야하므로 명촌댁과 금찬씨, 덕찬씨 세 모녀가 허겁지겁 모를 심는 동안 열찬씨는 한참이나 떨어진 마을 앞의 갈배기논의 못자리에서 모치미를 져다 나른다고 혼쭐이 나곤했다. 그렇게 저물게 모를 심고 딸딸딸 개구리가 두 번째 울기 시작하는 어둠 속에서 손을 씻고 삿갓을 쓰면 또 한 배미의 논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 열찬씨가 가장 신경이 쓰인 것은 자동차바퀴에 튕기어 작업 중에 간간이 날아오는 자갈이나 숨이 턱턱 막히도록 겹겹이 쌓인 먼지, 보리를 벨 때 철없는 아베크족들이 남긴 요상한 흔적과 옷 조각도 아닌 것이었는데 그건 학교를 마치자말자 논을 매거나 나락을 베는 열찬씨를 느긋하게 하교하는 동급생친구들, 그보다는 혹시 지나갈지도 모르는 순영씨가 볼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었다.
또 같은 천수답이라도 비교적 물이 흔한 진장골짝 서 마지기는 웬만해서는 제 자리에 못자리를 할 수 있었지만 땅이 질어 모를 심거나 논을 맬 때 수시로 넉넉하게 피를 빨고 통통하게 배가 불러 자루처럼 축 늘어진 거머리를 떼어내기 바빴고 겨우 거머리를 떼어내고 나면 등을 사정없이 공격하는 쉬파리에 시달려야만 했고 그 무엇보다도 가을걷이가 끝나면 도조를 받으러오는 외삼촌이 싫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고생고생하며 지켜온 논밭이 정작 병든 아버지대신 농사를 지은 자신에게 단 한 뼘도 돌아오지 않은 것은 물론 혹시라도 동생들에게 빼앗길까 허겁지겁 팔아간 형수 김해댁 때문에 이제 단 한 뼘도 남지 않고 생가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만 것이었다.
아버지제사를 지내러 가서 생가가 팔렸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고 참담한 마음을 달랠 수 없어 고향의 흙이라도 한 줌 가져가자고 바께스에 담아온 박태기콩나무는 셋방살이 처지에 어디에고 심을 땅이 없어 남의 집 연탄창고 귀퉁이에 처박혀 그 잦은 이삿짐을 따라 다니다 어느 순간 없어지고 말았다. 그 흙 한 줌을 가슴에 보듬고 언젠가 내 이 땅에 돌아오리, 그리하여 유복자의 한평생을 머슴살이와 소작농에 봄마다 양식이 떨어지는 절량(絶糧)농가로 논두럼아재비로 불리는 땅강아지처럼 흙에 묻혀 살면서도 단 한 번도 일등상답을 부쳐보지도 못 하고 단 한 해도 발이 시리도록 넉넉히 모를 내어보지 못한 아버지보다는 더 넓은 땅을 사고 더 좋은 집을 짓고 신불산이 아득한 내 고향 버든으로 돌아가려는 그 서럽고 처량하며 오기어린 꿈, 고향으로 돌아가고 흙으로 돌아가려는 꿈마저 너무나 아득하여 이러다가 등허리에 송곳하나 꼽을 만큼 단 한 평의 내 땅도 가져보지 못 하고 이 낯선 도시의 소시민으로 늙어 어느 경노당의 초췌한 노인이 되어 생을 마칠 것만 같은 두려움이었다.
어쨌든 마음을 잡고 다시 행정학을 비롯한 사무관시험서를 읽어볼까 생각해도 비록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해도 아직 발표가 나지 않았다는 생각에 쉽사리 손에 책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눈데 띈 것이 백창호 과장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등단한 잡지 <문예시대>였다. 비록 시인이 될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시인으로 불리게 된 이상 어느 정도 수준의 시도 써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우선 잡지에 실린 남의 시는 물론 자신의 시까지 찬찬히 반복해서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노트와 연필을 사와서 무언가 끄적거리기 시작했는데 한 일주일이 지나자 마침내 조금씩 가락이 잡혀갔다.
어느 날은
끈질긴 사랑의 노래
그대,
눈물 글썽한 눈으로 날 보지 마
저 텅 빈 가을 들녘에 버티고선
난장이도꼬마리 풀 가시처럼 앙탈지게
날 잡지 마, 잡지 마
나는 이제 바람이고 싶어, 민들레꽃이고 싶어
솜털같이 가벼운 날개로 날아가고 싶어. 자꾸만
넓고 먼 곳으로 또 낯선 곳으로
계절도 지쳐버린 11월
저 찢어진 시간의 옷자락 펄럭이는 회색빛 골목 어스름에
이지러진 달처럼, 잠복한 괴한처럼
날 보지만, 보지 마
한나절이면 시들어버리는 나팔꽃처럼
그 빛나던 순간의 눈빛은 불씨가 되고
비수가 되고 앙금이 되고
그대로 바람의 넋이 되고 속살이 되고.
정작은 못 잊어 애태우는 마음이 가시인 것을
매양 나는
순아, 그날의 눈빛이 날 사로잡은 사슬이기나 한 듯
그리 안타까이 서성이며 또 해가 저무는데
그대, 이 끈질긴 사랑노래속의 그대여
이제 그 눈물 글썽한 눈으로 날 보지 마
보지 마.
등단 시, <떠도는 길목에서>와 비슷한 톤이기는 했지만 훨씬 구체적이고 뚜렷한 절망의 가락으로 잃어버린 순영씨와 첫사랑을 한탄하다 또 어느 날은
수인(囚人)
비속에 핀 동백꽃이 섬찟하다.
떨어진 꽃잎처럼 선연한 입술, 검은 갈래머리
한 번도 바로 보지 못했던, 전류처럼 찌릿해오던
눈동자는
아지랑이 너머 물안개 너머
개울물 잦아지는 소리 너머 30년의 세월을 넘어
마마자국처럼 여직 남아있다. 문신처럼
아내가 세탁기를 끄고 있다. 나 보다
키가 큰 내 딸아이는 라면을 끓이고
사내아이가 TV볼륨을 높이는 무심상한
소시민의 하루에도 여전히
당신은 이명(耳鳴)처럼 따라오며 살아있다.
나는 채집당한 나비처럼 심장을 바늘에 찔리어 있다.
대중없는 봄비가 그치고 번듯이 하늘이 열려오고
으름 모들 새들이 날아가고 있다.
스모그까지 씻겨 내려가
저 윤기 나게 푸른 산 너머로
꿈길 같은 아늑한 곳으로 내가 간다 해도
아, 나는 여전히 수인이고 말 것인가, 당신의
눈동자와 망막 그 아스라한 그물에 걸린
나비처럼.-
원망과 탄식이 가득하면서도 단 한마디도 원망하지 못 하는 심정을 노래하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마음을 다잡아
조개껍질
당신을 사랑한 시절도 있었어요.
열사흘 달 고운 맵시
내 몸속에 더운 피 돌던 그 때는
당신만 생각해도 가슴이 뛰었어요.
달을 보고, 별을 먹어
바다처럼 가득히 품은 알을
먼 파도에 실어 보낸 뒤
마침내 속살까지 주어 버리고
이제 몸통 없는 나비가 되어
이 갯벌에 누웠어요.
더듬이가 없어
당신 곁으로 갈 순 없지만
바람 불고 달이 질 때 마다
조금씩 그리움을 담고
이제는 파도에 내맡긴 몸
당신을 사랑한 시절도 있었어요.-
비교적 담담한 체념으로 긴 이별의 시간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가면서 어느새 근 한 달을 끄는 지루한 장마가 오고 짧은 여름휴가 전후의 불볕더위가 식더니 어느 듯 귀뚜라미울음이 처량한 가을이 오고 하늘이 맑아졌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