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도 피부색, 배경 또는 종교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미워하게끔 배운다. 미워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사랑하는 것도 가르칠 수 있지 않겠는가. 사랑은 미움보다 더 자연스레 사람 가슴에 다가온다” -넬슨 만델라-
넬슨 만델라가 2013년 향년 95세로 영면했을 때, ‘세기의 장례식’이 열렸다. 인류 역사에서 그처럼 폭넓은 사랑과 존경을 받은 정치인은 없었다. 장례식에는 70여 개국의 국가 정상과 수십 명의 전직 정상이 참여했다.
1990년 2월 11일 만델라가 빅터 버스터 교도소에서 풀려났을 때,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27년, 그 긴 세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출소 후 24년 동안 보여준 그의 화해의 정치는 기적이었고, 감동 그 자체였다.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이 남긴 증오와 폭력이 너무 어두웠기에, 만델라가 보여준 용서와 화해의 정치는 더욱 빛났다.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성숙한 인간”이라는 앙드레 말로의 찬사는 넬슨 만델라의 인간됨을 집약한다. 장례식에 참석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우분투(Ubuntu) 정신이야말로 만델라가 우리 모두에게 준 소중한 정신이다”며 만델라의 철학을 요약했다. ‘우분투’는 ‘인간은 서로 얽혀 있다’는 뜻의 남아프리카 어이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다른 사람을 통해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철학이 담긴 말이다.
尋隱者不遇(심은자불우)
賈島(가도)
松下問童子(송하문동자) 소나무 아래서 동자에게 물으니,
師採藥去(언사채약거) “스승님은 약초 캐러 가셨어요.
只在此山中(지재차산중) 지금 이 산속에 계시긴 한데,
雲深不知處(운심부지처) 구름이 짙어 어디 계신지 모르겠어요.”
제목이 ‘은자隱者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이다. 은자는 속세를 떠난 사람이다. 한데 왜 그를 찾아 갔을까? 우리는 은둔자를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다. 은둔자가 인생의 어떤 ‘진리의 담지자’ 쯤으로 우상화한다. 그리고 일반 사회생활과 산속의 생활 사이에 빗금을 치고 속俗/성聖으로 구별 짓기도 한다. 착각이다. 현실이 괴롭더라도, 현실을 떠난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이 시를 쓴 가도(779~843)가 살았던 당나라의 인구는 약 5,000만 명이었다. 2021년중국 인구는 14억 명을 넘는다. 가도가 찾아간 은자는 어쨌건 그 당시에는 시끄러운 세상을 벗어나 산속에서 조용한 자신만의 삶을 구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현대는? 곤란하다. 어쩜 그 은자는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사람일 수도 있다.
한 부동산 개발업자가 은자의 움막집을 포함해 전체 산을 관광지로 개발했다. 애당초 불가능한 사업을 개발업자는 정부에 막강한 로비를 펼쳐 사업권을 따냈다. 자연의 고요함은 관광객들의 소음으로 저자거리를 방불케 되었다. 자연과 생태계는 파괴됐고, 수원지水源池는 오염됐다. 물론 은자도 움막집에서 쫓겨났다.
저 밑에 있는 마을에서는 상수도가 오염되어 생활이 피폐해졌다. 원상복구를 위해 개발업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개발업자는 막대한 자금력으로 기라성 같은 변호인단을 구성해서 방어한다. 환경규제를 강화하는 입법은 로비스트를 동원해 사전에 차단한다. 이런 상황에서 은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한 것인가!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율이 만들어진 시기는 도둑질이라는 행동이 내 손으로 직접 남의 물건을 물리적으로 가져가는 것을 뜻할 때였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산 전체를 강탈해가는 개발업자들에게 ‘산 강도죄’를 물을 수 있을까? ‘개발’이니 ‘발전’이니 하면서 차라리 그들을 미화한다. 그 업체에 투자한 자본가들은 희희낙락해 하고, 그 업체의 주식을 가진 소시민들은 주가가 올랐다며 즐거워한다. 이 소시민들은 자신들이 ‘산 강도죄’의 공범임을 추호도 의식하지 못한다.
은자는 존재할 수 없다. 아무 사회적 효용가치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이 짜여있는 방식이 너무 복잡하다는 사실이다. 그 방식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의 무지’ 속에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알려고 애쓰는 사람은 진실을 알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돼 있는 현실이다. 특히 세계 경제 시스템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대신해 쉴 새 없이 도둑질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상황을 피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개인의 삶을 개인의 의지로만 결정할 수 없는 ‘체제 내의 존재’이다. 이 체제의 틀을 짜는 직업인이 정치가이다. 우리를 대신해 우리 삶의 틀을 짜는 대리인인 정치가를 제대로 뽑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자칫 우리가 표를 준 정치가, 특히 대통령이 우리의 삶,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개발업자의 뒷배일 수도 있다. 일단 표를 주고 난 뒤에는 물릴 수도 없고, 후회해도 별무소용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정치가나 정치 일반에 관한 정보를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들의 말이나 이미지는 종종 실체와는 전연 딴판이다. 하여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전문가가 언론이고 기자들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조직에는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 쓰레기 언론이니 ‘기레기’니 하고 욕하는 것은 뱀의 행태나 뱀의 말만 들은 탓이다. 제 얼굴에 침 뱉는 꼴이다.
정보를 생산하는 데는 꽤 많은 비용이 든다. 그러므로 믿을 만한 정보를 얻으려면, 그에 합당한 만큼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공짜로 얻은 정보의 품질을 논하는 것은, 도둑이 훔친 지갑 속에 돈이 많니 적니, 불평하는 것과 같다.
세상은 서로 얽혀 있고, 너와 나 우리 그리고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과도 서로 얽혀있다. 이 세상의 짜임새는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으로 알아낼 도리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다. 그래서 믿을 만한 대리인인 정치가가 필요하다. 믿을 만한 정치가를 뽑기 위해 믿을 만한 정보가 필요하다. 공짜로 제공되는 정보는 대부분 세뇌가 목적이다. 합당한 만큼의 돈과 에너지를 지불해서 얻는 정보여야 옳은 선택에 도움이 된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혹 당신은 당신의 시간과 에너지와 비용을 들여 생산한 정보를 공짜로 제공해 본 적이 있는가?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