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시대11-이 달의 책】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시민시대11-이 달의 책】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 시민시대1 시민시대1
  • 승인 2022.11.21 19:03
  • 업데이트 2022.11.24 10: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과 관장
화제의 책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를 해설하는 유튜브 '밑줄책방' [밑줄책방 캡처]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나는 종종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뭐가 됐든 너희들이 정말 하고 싶은 얘길 써봐. 개떡같이 말하고 써두 선생님은 찰떡같이 알아들을테니”

내가 꽤 괜찮은 선생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비평문학관에서 글을 쓰는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나는 새삼스레 ‘개떡같이 말해두 찰떡같이 알아듣는’, 소위 가르치는 자의 윤리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영민한 독자들은 이미 알아차렸을 테지만 유튜브가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 대한 이 책의 대답은 한마디로 ‘No!’이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미디어환경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기존의 읽기와 쓰기, 나아가 총체적인 의미의 리터러시가 어떤 변동을 겪으며 진화하는지를 고찰한다. 언어와 페다고지. 언어와 삶이 맺는 관계는 20대 이른 나이부터 지금까지 페미니즘을 공부해온 나에게 연구과제이자 삶의 숙제이기도 했다. 지난한 세월동안 내가 익혔던 여성주의 언어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감각과 자기재현의 기술을 선물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성우와 엄기호는 내가 아는 한, 리터러시 분야의 한국 최고 전문가들이다. 특히 이들은 기존의 문해력 개념이 가진 한계와 문제점을 살피는 것에서 출발해 이미 우리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멀티미디어가 특정 계층의 권력도구로서가 아닌, 관계와 맥락을 품는 공공의 인프라로 만들어갈 수 있는 방도에 대해 고민한다.

지난 코비드 사태에서도 드러났듯이 텍스트의 쇠퇴는 이미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어린 초등학생들을 포함해서 학령기에 있는 대다수의 아이들이 영상을 보면서 공부한다. 여러 매체를 통해서도 전해진 바와 같이 영상을 통한 정보접근의 비율이 문자매체를 압도하고 있다. 이미 아이들에겐 책이 아니라 유튜브가 지식의 제1원천이 되었다. 세계를 선도(?)하는 미국의 2018년판 <<뉴욕타임스>>가 발행한 특집기사의 제목은 ‘탈 텍스트 미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Post-text Future]였다.

지금까지 인간의 발화행동[speech act]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어왔다. 말글이 삶에서 하는 역할에 관하여 이론적 틀을 제공한 영국의 언어철학자 오스틴J. L. Austin에 의하면 상당수 발화의 경우 전통적인 방식의 평가, 소위 참과 거짓이라는 두 가지 잣대로만 이분할 수 없다.

그가 제안한 발화행동이라는 개념은 말과 행동이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음을 전제한다. ‘그저 말일 뿐인 말’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인종, 계급, 성sexuality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모순과 차별을 사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젠더 역시 이런 사유에 빚지고 있다. 페미니스트 버틀러Judith Butler의 수행성 개념은 오스틴의 “언어를 발화하는 것이 곧 행위이다”와 궤를 같이 한다.

인간의 발화행위에 문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일단 문자는 흔적없이 허공에 흩어졌을 말을 반영구적으로 재생한다. 당대의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사라질 처지의 ‘말’과는 달리 문자를 통해 기록된 ‘글들’은 여기저기 흔적을 남긴다. 이제 ‘말’은 ‘글’이 되어 누군가의 기록이 되고, 그렇게 기록된 문자들은 인간의 삶과 소통방식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다.

문자의 등장과 그것을 도구로 ‘기록’이라는 것이 가능하게 되자 더 이상 물리적인 거리도, 시대의 장벽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자문명의 팽창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이들은 누구나 타인의 삶에 접속할 수 있게, 자신의 생각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세기 전화와 라디오, TV의 보급은 음성과 영상의 실시간 송출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을 만들어냈으며, 20세기 후반 인터넷과 모바일, 클라우드 혁명은 이러한 변화를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끌면서 공히 매체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 할 만한 시대가 도래 한다.

매체의 다양화는 단순하게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간을 구획하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정보채널을 변화시키고, 사용하는 감각의 비율을 변화시킨다.” 이것은 “세계를 인식하고 지식을 구성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관계맺기의 양상을 구성하는 방식의 거대한 변화”를 추동한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읽고, 추락하고 있[다고 판단되는]는 문해력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한 목소리로 우려하는 문해력의 저하에 대한 저자들의 시각도 새롭다. 글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통칭하여 근대인]은 리터러시와 관련해서 겪고 있는 변동이 위기로 인식될 터지만,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중세인들이 말의 세계에서 글의 세계로 바뀌어간다는 것 자체에 위기감이 들었을 상황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위기감은 ‘주체성’에도 커다란 변화를 야기시킨다. 유튜브 채팅 기능으로 영상을 보면서 소통하는 세대인 지금의 아이들이 텍스트 중심의 문해력이 기초가 되었던 기성세대와 소통이든 삶의 방식이든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리터러시를 정의하는 권력을 문제삼아야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시대에 따라 리터러시의 개념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문학과 학식’이, 중세에는 ‘라틴어’가, 근대 이후에는 ‘모국어’가 리터러시 개념의 핵심이었다.

리터러시 역시 불변의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지극히 역사적인 산물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들은 한국사회가 여전히 텍스트 중심의 문해력을 기준으로 젊은 세대의 문해력을 부족하다고 개탄하는 모양새를 오히려 우려한다. 실제로 많은 이들, 특히 시험체제 바깥에선 더 이상 문자 텍스트가 주류가 아니다. 그들에게 텍스트는 시험을 위해 읽는 도구일 뿐이고, 교양을 쌓기 위해서나 하물며 자기성찰을 위해 참조하는 자료도 텍스트가 아니라 동영상이다.

텍스트 읽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고 쓰는 행위는 말을 하거나 영상을 보는 것과는 달리 인간의 사유하는 역량을 비약적으로 전환시켰음을 이 책은 상기시킨다.

문제는 텍스트라는 매체, 읽기와 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의미한 장점에 비해 그것의 구체적인 방법, 이를테면 글쓰기를 위해 생각을 확장하는 방법, 글의 구조와 내용을 다루는 전략, 글쓰기에 대한 태도와 윤리 등에 대해 우리는 거의 배워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문제삼는다. 리터러시 교육과 관련해서, 텍스트 중심의 교육을 이끌어온 세대에 대한 책임과 기존 리터러시 교육의 과오에 대한 검토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러한 변동에 대한 전사회적 차원의 성찰의 시기이기도 하다.

삶에 복무하는 리터러시를 향하여

저자들은 리터러시가 삶에 복무해야 한다는 것, 또한 그것이 개인의 역량을 넘어 공동체로 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글과 책이 어떤 특정 시기, 어떤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몸이었고, 그 몸에 새겨진 무늬였으며, 몸의 변신수단이었다. 그 변신수단으로서의 리터러시가 내포하는 의미와 가치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리터러시란 변신의 역량이다. 다양한 존재를 만날 때마다 그 다양한 존재에 걸맞게 자신을 변신해 드러내고 계시할 수 있는 역량이며, 그를 통해 개인과 개인들이 적절하게 관계를 맺으며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을 헤쳐가는 역량”이 바로 *리터러시이다. 
----------------------------------------------------------------------------
*리터러시literacy는 문식성, 문해력 등으로 번역되어 사용되기도 하는데, ‘글을 배워 알고 더 나아가 이를 활용하여 지식과 정보에 접근하고 이를 분석, 평가, 소통하며 개인과 사회의 문제나 과제를 해결하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본고에서는 총칭하여 리터러시로 표기하였다.

 

이진서
이진서

◇이진서

▷부산대, 이화여대, 영국 워릭대(University of Warwick)에서 수학했다.
▷지금은 김해에 둥지를 튼 고석규 비평문학관에서 비평적 글쓰기에 대한 실험들을 해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