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325)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15장 꿈꾸는 율도국⑤
대하소설 「신불산」(325)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15장 꿈꾸는 율도국⑤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12.05 11:24
  • 업데이트 2022.12.05 11: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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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꿈꾸는 율도국⑤

1996년 5월 어느 일요일. 무르녹는 봄의 막바지에 마흔여섯의 가열찬 동장은 관광버스를 빌려 동정자문위원회의 부부관광에 나섰다. 서수양씨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병진파출소장과 7형제 중에서 가장 입이 험한 정현조 방위협의회장도 동행하기로 했다.

충무쇼핑 앞에서 차가 출발하고 참석자부부를 차례로 소개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대부분이 7,80대인 동정자문위원들이 이제 겨우 마흔이 넘은 동장사모님 영순씨가 너무나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감포 기림사를 목적지로 한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고 술판이 벌어지자 병권을 잡는다며 먼저 술병을 들고 돌아가며 술을 권하던 정현조씨가 

“이건 뭐 동장만 애기동장인 줄 알았는데 아주머니는 햇병아리도 아닌 달걀일세.”

묘하게 비위를 긁으며

“자, 아가씨도 한 잔 하세요.”

영순씨에게 권하자 이어 서수양씨, 이병진 소장도 덩달아 술을 권하며

“우리의 위대한 동장사모님!”
“너무 너무 예쁜 우리 제수씨!”

일부러 술에 취한 척 무례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하더니 기림사관광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완전히 술에 취해

“저 새파랗게 어린 햇병아리동장쯤은 한칼에 날려버린다!”
“젊은 자식이 동장이면 다야. 아주 싸가지가 없어!”
“마누라가 아깝다. 저 형편없는 새끼한테 무얼 믿고 시집왔을까?”

저들끼리 주고받는 척 온갖 험담들을 쏟아내며 열찬씨의 부아를 돋우었다. 열찬씨가 대들기라도 하면 합세해서 모욕을 주고 온 동네와 마을에 소문을 퍼뜨릴 심산이었다.

마치 자신의 딸 같다거나 시집간 딸 보다 열 살 이상 적다거나 하면서 나란히 팔짱을 끼고 기림사를 구경하며 어느새 친해진 70넘은 부인네들에 둘러싸여 앉아있으면서도 일촉즉발의 분위기에 놀라고 긴장하다 못해 부들부들 떨면서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영순씨를 보는 순간

“보소. 당신네들 좀 조용히들 안 할 거요? 동네 어른들 모시고 와서 뭐하는 꼴들이요? 술을 묵으면 묵었지 어데 똥궁가리로 처묵었나?”

마침내 열찬씨가 바닥에 술잔을 던지며 일어나는데

“보소, 동장님.”

7형제 중에서 가장 원만한 안만종 동정자무위원장이 어깨를 잡고 도로 앉히면서

“조금만 더 참으소. 저 사람들이 내 친구지만 술만 묵으면 개가 된다 아이요?”

통사정을 하는데

“가동장, 지금 동장이 흥분하면 진다. 저 사람들이 일부러 내자(內子) 앞에 모욕을 줄라고 시비(是非)초청하는 거다.”

가내공업으로 선풍기공장을 운영하는 여든넷의 박상일 자문위원이 귀에 대고 속삭이는데

“보소! 기사님 잠시 차 좀 대이소!”

양초공장을 하는 여든두 살의 김원홍 위원이 기사에게 다가가 억지로 차를 세우게 하고

“보소, 이 사람들아! 당신들이 우째 마을유지고 동정자문위원이고 파출소장이고? 이 시건머리라고 털끝만큼도 없는 사람들아!”

철사처럼 빼빼마른 몸매 어디에서 그런 고성이 나오는지 대갈일성호통을 치더니

“내 젊은 동장은 둘째 치고 사모님보기 민망해서 앉아있을 수가 없네. 보소, 서수양 위원, 전렴조 회장, 이병진 소장, 당신네들은 당신부인이나 자식이 보는 앞에 이런 모욕을 당하면 좋겠소? 당신들 우리 가동장 사람 잘 만난 줄 아소. 내 비록 이렇게 늙었지만 내라면 당신들 벌써 배에 칼이 들어갔을 거요. 당신들은 벌써 죽어도 몇 번 죽을 짓을 했단 말이요!”

차안이 숙연해지자

“이병진 소장, 당신이 말끝마다 동장님 목을 뗀다고 난린데 내가 보니 정작 모가지가 날아갈 사람은 동장이 아니고 당신이네. 당신 일개 순사가 우째 마을의 어른인 관장에게 막말을 한단 말이요? 내가 이런 말을 안 할라고 했는데 치안본부의 김선일 치안감이 내 조카라는 사실을 당신은 알기나 하오? 오늘 있었던 일을 내가 연락해 내일 당장 당신 목을 떼면 당신은 무슨 대책은 있소?”

이병진 소장이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 가내공업으로 양초공장을 하는 김원홍 의원은 본래 통영 출신으로 유명한 초정 김상옥 시조시인과 죽마고우로서 학식이나 인품이 매우 고매하며 평소에 조용조용한 성품이었는데 뜻밖에도 대노를 한 것이었다. 

깜짝 놀란 안만종 위원장이 차내의 안내마이크를 잡고 오늘 이 불미스러운 일이 오직 위원장인 자신의 불찰에 기인한 것이니 모든 것을 자신에게 질책해달라며 김원홍 위원을 자리에 앉히고 아무튼 사람이 술을 먹으면 개가 된다고 서수양 위원이나 정현조 회장, 이박진 소장이 평소에 다 좋은 사람들인데 어지 술이 시킨 일이지 사람이 한 일이겠냐며 무마하고 다시 차를 출발시키려고 하는데

“안 돼!”

김원홍 위원이 단호하게 거부하며 마이크를 빼앗고

“이건 뭐 사람 죽여 놓고 미안하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는 척 해서는 안 되지. 서 위원, 정 회장, 이 소장! 당신들 당장 이 동장하고 사모님께 사과하시오. 특히 이 소장 당신은 사과하는 태도를 봐서 내 기어이 목을 떼든지 말든지 할 거요.”

하면서 기어이 사과를 시키고 차가 출발하자 

“이제 술도 먹지 말고 이야기도 하지 말고 조용히 갑시다. 내 팔십이 넘도록 이렇게 경우 없는 사람과 정신없는 소풍은 처음이요. 내 우리 딸보다 젊은 동장님 사모님보기에 낯이 없소.”

기사에게 마이크를 건네주려다

“참, 도회수 구의원 당신은 지금 뭐하는 거요? 당신이 가동장의 측근행세로 가까스로 구의원이 된 거는 천하가 아는 일인데 동장이 저 지경으로 코너에 몰리는데 우째 말 한마디가 없소?”
 비수로 찌르자 도회수의원의 얼굴이 대추 빛으로 붉게 타오르더니 마침내 잿빛으로 사그라졌다.

“여러분, 나는 부산에 닿는 데로 내일 동정자문위원직을 사직할 거요. 여러분들도 알아서들 하십시오. 제 생각 같아서는 늙고 타성에 젖은 우리들이 물러서고 젊은 인재들이 발탁되어야 가열찬동장이나 남부민1동이 제대로 발전할 것 같소. 알아서들 하시오.”

마침내 노익장의 일장연설이 끝나고 침울(沈鬱)에 빠진 차가 청량한 바닷가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이었다. 낮의 찜찜한 기억을 씻어내듯 샤워를 한 열찬씨가 맥주 두 병을 식탁에 놓고 영순씨와 마주 앉았는데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서로 받으라고 눈짓을 하다 열찬씨가 수화기를 들었는데 도회수 의윈이었다.

“이 동장, 아까 버스에서 나온 말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화가 잔뜩 났는지 ‘우리 가동장님!’은 흔적도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아니, 내가 동장 당신 때문에 그런 수모를 당해도 되는 거란 말이요.”
“아니, 내가 뭘 어쨌단 말이요? 거야 김원홍 위원 말씀이기는 하지만 전혀 틀린 이야기도 아니고...”

서로 기분이 가라앉아 서로 좋은 말이 나올 처지가 아니었다.

“보소, 이 동장, 당신이 내게 이래 나와도 되는 거요?”
“아니, 내가 뭘 어쨌단 말이요? 그럼 당신은 내게 이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 거요?”
“뭐라꼬? 당신 진짜 말 다했나? 이 인간아!”
“뭐 인간이라고?”
“그래 이 천둥벌거숭이, 애송이 같은 인간아!”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영순씨가 또 울상이 되어 쳐다보는데 

“그건 그렇고 동장당신, 왜 하반기토목사업계획서를 안 보내는 거요?”
“답답하면 샘 판다고 와서 보면 되지. 내가 뭐 당신 부하요, 보고하는 것도 아니고?”
“뭐라고 이 새끼야!”

마침내 욕설이 튀어나오자

“보소, 도회수씨, 당신이 언제부터 구의원이라고 내 한테 오라 가라 지랄이요? 내가 뭐 당신 쫄따구요? 누구 덕에 구의원이 된 줄도 모르고.”
“뭐라고? 이 새끼야!”
“이 새끼, 저 새끼 하지마라 개새끼야. 듣는 새끼 기분 나쁘다!”

마침내 울산사람 서발 줄 욕까지 나오고 말았다.

“그래 이 새끼 니 그 가만 좀 있거라.”
“그래 오너라. 이 새끼야!”

수화기를 놓은 열찬씨가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그러나 죽을상이 되어 걱정하는 영순씨의 염려와 달리 그날 밤 도회수씨는 찾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간밤 꿈자리가 사나웠다고 제발 만사를 참고 하루를 잘 넘기라고 신신당부하는 영순씨와 작별하고 출근하는 길이었다. 2층 동장실로 가는 계단을 오르는데 

“보소, 이동장!”

도회수구의원이 새파라동동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잘 잤소? 나는 오는가 싶어 밤새도록 기다렸는데.”
“뭐요? 정말 당신이 날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거요?”
“내가 뭘 우쨌는데?”

정작 얼굴을 마주하니 당장 잡아먹으려던 기세는 어디가고 서로가 멋쩍고 민망한 모양이었다. 동장실 문을 열고 소파에 앉아 다시 서로 씩씩거리며 전의를 불태우는데 똑똑, 노크소리가 나며 홍태희씨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오자

“...”
“...”

둘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멋쩍은 미소를 띠우며 천천히 키피를 마시다

“보소, 이 동장, 당신 정말 이럴 거요?”
“아니, 당신은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이 나하고 가부시끼망신을 당해봐야 좋겠소?”

열찬씨가 픽 웃으니

“하긴 우리 둘이 싸워봤자 다 넘 좋은 일이지.”
“그래요. 서수양씨나 7형제 존 일만 되겠지.”

또 한참 침묵이 흐른 뒤

“이 동장!”

마침내 도회수씨가 어색한 미소를 띠우고 손을 내밀었다.

“서로 조금씩 참고 잘 합시다.”
“그래요. 초심을 잃지 말고.”

열찬씨도 일어나 손을 잡았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