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327)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15장 꿈꾸는 율도국⑦
대하소설 「신불산」(327)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15장 꿈꾸는 율도국⑦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12.08 11:23
  • 업데이트 2022.12.08 1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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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꿈꾸는 율도국⑦

오후가 되어서야 돈 떼인 사람들의 윤곽이 대충 밝혀지고 채권단을 구성하고 하마담의 행방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좌중의 제일 연장자인 예순 다섯의 해암이 카운터에 앉아 편지지를 펼치고

0.항구세탁소 구팔식 금2천만 원
0.평화사진관 엄일상 금2천만 원
0.구두수선 천일평 금9백만 원
0.건물주 양씨 금5 천만
............

한참 써 내려가는데

“아이고, 내 돈!”

활어 상가에서 리어카 커피 행상을 하는 길다방 뚱보 마담 이 고함을 지르며 들어오더니 탁자를 잡고 쓰러진다.

“천 삼 백! 천 삼 백! 아이고 내 돈 천 삼 백!”

천 삼 백! 소리가 갈아 앉기도 전에 보험회사 전 여사가 나타났다. 바람둥이 용 회장의 아내인 그녀는 마을에서 제일 억척스런 여자로 알려져 있었다. 보험회사 사원으로 자녀 셋을 대학 시켜 출가시킨 여장부며 전국에서도 연간 계약고가 가장 높아 회사의 보험 여왕을 수차 차지하여 영업 소장이 되어 있었다. 자기 돈은 물론 보험회사 돈을 월 1푼 남짓으로 빌려 3부 5리로 놓은 돈이 1억2천이나 된다고 했다.

한 번 억대가 나오니 억대 넘은 빚쟁이도 몇 명이나 쏟아졌다. 실향민인 단추 공장 팽사장, 창고업자 갈 회장에다 회춘루의 중국인 육 서방까지 억대 넘게 떼였다.

 

마침내 새마을금고 상무, 동사무소 사무장과 직원 두 명, 파출소 차석 박경장까지 무려 40명, 17억 원이 넘은 채권단이 구성되고 대표자를 뽑기로 했다.

제일 먼저 지목된 연장자 해암선생은 우물우물 나이를 핑계 대더니 볼펜을 손에 쥔 채 화장실에 간다면서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갔다. 일공선생도, 평화사진관 주인인 바르게살기위원회 엄일상 위원도 우물쭈물 빠져나가더니 남자들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항구다방 하마담이 수십 억대의 돈을 떼먹고 도망갔다는 소문은 마을에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다.

생선 좌판, 과일 노점 할 것 없이 영세 상인들의 호주머니를 이 잡듯이 훑어가서 시장 골목이 울음바다, 욕지거리 판이 된 것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돈 떼인 집마다 부부싸움이 극성스레 벌어진다는 것이었다.

이건 단순히 돈을 떼이어서 싸우는 것하고는 경우가 좀 달랐다. 집집이 사내의 멱살을 틀어진 아낙들은 그 야시 같은 하 마담이 돈을 빌리려고 무슨 짓인들 못 했을 것이냐고 다그쳤다. 공교롭게 남자들에게 돈을 빌릴 때는 버스 세 정류소 거리인 송도 해수욕장의 횟집에서 회 한 접시씩을 대접했다는데 그 깜찍한 년이 어디 생선의 속살만 대접했겠냐고 다그치면 남자들은 아무 대꾸도 못했다. 그래서 채권단대표를 어느 남자도 맡으려 않는 것도 뭔가 단단히 코가 걸렸다는 것이었다.

동사무소에서 열리는 각종 위원회의 모임에 성원 미달 사태가 속출했다. 소액 빚쟁이들은 나와서 하 마담을 한없이 욕했지만 원로급인 아무개 회장님들은 평소 하 마담에게 아버지, 아버지 소리를 들은 것이 무슨 속내가 있었다고 의심받을까 봐 하나같이 바깥출입을 삼가고, 더러는 자리 펴고 드러누웠다는 소문도 퍼졌다.

딱한 건 형제간, 숙질간, 심지어 부자간에도 나란히 돈을 빌려주어 부자간이 동서간이 되었다는 웃지 못 할 소문까지 떠돌았다. 파출소 차석이 채권단명부에서 자기 이름은 빼 주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소문은 절정에 달했다. 하 마담의 치마폭을 거쳐 간 경찰관의 숫자가 엔간한 기동대 하나를 만들고도 남는다느니 지금은 출세해서 타지 경찰서장을 지내는 아무개 서장도 동서순서에 든다는 실없는 소문까지 퍼졌다. 심지어 마을에서 돈 많다는 이유로 군사정권 때 마을 대표 대의원으로 뽑혀서 서울의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고 온 점잖은 아무개 회장님도 단골로 거론되었다.

죄 없는 동장, 파출소장이 남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평소 지역유지 행세를 하며 가끔 기관장들에게 점심을 사고 술을 대접한 하 마담이 그들인들 가만 두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또 눈이 똥그랗고 말투가 쌀쌀맞은 동사무소 사무장은 연금대출을 3천만 원이나 받아서 몽땅 날린 지라 월급 때 대출금을 갚으면 쌀팔 돈도 남지 않아 아내가 싸움 끝에 가출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모두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는 젊은 동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하마담사건으로 마을 분위기도 어수선하고 인원동원이 힘들어 일주일 뒤로 예정된 동민체육대회를 무기 연기한다는 것이었다.

백여 명의 채권자에 부채총액이 30억이 넘어서면서 마침내 하 마담의 채권자 명부가 망신동 동서명부며 망신동에서 그 명부에 이름 석 자를 올리지 못한 사내는 불출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구서동 처제로부터 형부만 믿고 맡긴 돈이 이자는 고사하고 본전까지 떼이게 되었다는 항의전화가 왔다. 은행 다니는 딸의 적금 탄 돈을 싸움 끝에 금리 높은 일공에게 맡겼으니 처제의 입장도 알만은 했다. 잇따라 일공은 새벽시장에 생선장사를 나가는 아내에게 혼이 났다. 말은 않았지만 막내 딸년도 볼이 부어서 출근했다. 사윗감인 동사무소 탁주사 보기도 말이 아닌데 혹시 그 녀석은 돈이나 떼이지 않았는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나서 송수화기를 드니 숨소리만 들려오고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혼선이거나 접선불량인가 싶어 한참이나 기다리던 그는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어

“여보세요, 여보세요!”

송수화기 속으로 빠져 들어가듯 바싹 다가앉으며

“하,하 하마담이제? 말해봐라, 말!”

버럭 소리 지르자 전화가 뚝 끊어졌다. 눈앞이 어질어질 돌면서 하 마담의 얼굴과 일 억 삼천 돈 뭉치가 핑핑 돌아가는데

“여보세요!”

또 전화가 오더니 이번엔 들자말자 뚝 끊어졌다. 담배를 다시 빼어 물고 한 시간이나 기다려도 이제 다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딱히 갈 곳도 할 일도 없었다. 평생을 건들건들 살아왔지만 요즘처럼 무위도식하기가 부담스러운 일은 처음이었다. 대체로 풍족했던 부모와 생활력 강한 아내 덕에 고생 모르고 살아온 일공은 환갑진갑이 다 지난 지금도 얼굴은 주름살 하나 없이 쉰도 안 되어 보이는 동안(童顔)이었다.

억지로 편해도 편한 게 제일이라 했던가.

40대 중반 들어 하는 일없이 왔다 갔다 술 먹고 놀기 좋고 적당한 대우받는 동사무소의 새마을지도자로서 처음 만났을 때 해암선생은 일공더러 타고난 선골(仙骨)이라고 하면서 여복 하나는 대단한 귀공자 상이라고 했다.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 어느 여잔가 스스로 찾아와 치마를 들어주고 먹여 살려주는 팔자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대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그 어렵던 50년대 보릿고개에 면에서 유일하게 고등학교를 다녀 인근 마을 처녀들의 선망의 대상으로 지내왔다. 그래서인지 아무 망설임이나 어려움도 없이 여러 명의 여학생이나 마을 처녀들을 뒷동산이나 달밤의 보리밭에서 쉽사리 접할 수 있었고 그가 눈길을 주어서 싫다는 여자는 별로 없었다. 중매결혼이기는 해도 무던한 아내를 만나 자식도 남만큼 낳고 살림살이 어려움도 별로 모르고 살았다.

도시로 와서 알량한 사업이라고 벌이면서 사교춤까지 배워서 주로 다방, 술집마담과 주색잡기로 지내는 동안에도 그의 아내는 한 번도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현이나 내색도 않았다. 끝내 사업을 망치고 룸펜으로 지내는 지금도 아내 스스로 비닐 앞치마를 입고 생선장사로 나설망정 남편 하나는 잘 받들고 불평 한 마디 없으니 참으로 신통한 일이었다.

갈매기세탁소 시절에는 이웃의 웬 젊은 여자가 자기 집 못을 쳐 달라면서 불러 놓고 제 스스로 일공의 품에 무너지며 참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제 남편보다 훨씬 나이 많은 일공선생을 쳐다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설렌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하 마담이다. 하긴 어떻게 보면 예외가 아니기도 하다. 십여 년 전인가 딱 한번 하마담이 안개 낀 송도 해수욕장의 횟집에서 술이 반쯤 취한 발그레한 얼굴로 야릇한 시선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는 이 애마저 이러면 안 되지 싶어 단호히 눈길을 돌렸다. 큰딸하고 비슷한 나이어서 아무래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또 그렇게 서로가 이성으로보다는 부녀 같이 지나는 것이 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하 마담마저도 다방에 새로운 아가씨가 들어오거나 빚돈이라도 소개해 성사가 되는 날엔 송도 횟집에 불러내서 푸짐한 술대접 끝에 슬그머니 아가씨를 떨어뜨리고 가 버리면 남은 아가씨들은 모두 거리낌없이 자신들의 젊은 성을 제공하였다. 그게 하 마담이 한껏 배려한 간접제공을 통한 대리만족의 접촉인지 타고난 그의 여복을 증명해주는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뒷맛은 매번 개운치가 못했다. 자신이란 한 인간은 그저 치마폭에서 흐물흐물 녹아서 사라져 갈 인생인가 싶어 곰곰 생각해 보면 여복이란 것도 무엇 하나 남기거나 이루어 가는 게 아닌 끝없는 소모와 허탈의 참으로 한심하고 저급한 행복일 뿐이었다.

조석으로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하던 항구다방마저 문을 닫고 나니 새삼 갈 곳마저 없었다. 혼자 아침 먹고 밥상 치우고 커피까지 끓여 마시고 담배도 두 대째나 피웠다.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는데 계단 아래서 구둣방 천영감이 잘숨잘숨 다리를 절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저 영감이 가게를 비우고 어디로 가는가 생각하다가 문득 자기가 소개해서 빌려준 돈 천만 원이 떠올라 황급히 신발을 신고 영감의 반대 방향인 산복도로로 튀었다.

 

마악 안개가 걷히는 항구에는 나란히 정박한 배들이 옹기종기 평화로웠다. 오징어 채낚기선의 집열등에 햇빛이 번쩍번쩍 반사되고 뚜우뚜우 뱃고동 소리도 정답게 들려왔다. 5월이라 천마산에서 뻐꾸기가 울고 아카시아 꽃도 피어 희뜩희뜩 빛났다. 연두색 새싹이 윤기가 반질반질한 사철나무 잎은 점차 초록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이 좋은 계절에 자신만이 한심하도록 무료하고 할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놀이터 시이소오에 걸터앉아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옳다구나 생각해 낸 것이 해암선생이었다. 그래 해암선생이나 만나 보자.

만물박사로 통하는 해암선생은 항구다방멤버 중에서 제일 유식한 노인네이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실없는 와이담(음담패설)전문의 늙은 백수(白首)였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