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328)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15장 꿈꾸는 율도국⑧
대하소설 「신불산」(328)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15장 꿈꾸는 율도국⑧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12.09 11:09
  • 업데이트 2022.12.09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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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꿈꾸는 율도국⑧

만물박사로 통하는 해암선생은 항구다방멤버 중에서 제일 유식한 노인네이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실없는 와이담(음담패설)전문의 늙은 백수(白首)였다.

가끔은 젊은 시절에 배를 타던 이야기나 대동아 전쟁 때 사이판전투 이야기 같은 실감나는 이야기도 했지만 부산, 거제 간에 자기 배가 아니면 다닐 수가 없었다는 진작 망해버린 사업 이야기며 고향에서 면장을 지냈다거나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왕년의 연예인들을 여럿이 편력했다는 하나같이 허황하고 실속 없는 이야기꾼이었지만 좌석을 끌어가는 격의 없는 유머감각만은 탁월했다.

자기의 호(號) 해암(海巖)은 갯바위라는 뜻인데 섬사람인 자기의 고향 바다가 그리워서 붙인 것이 아니라 갯바위에는 조개가 많이 붙어 여자에게 인기 있으라고 지은 호라면서 웃기기도 했다. 일공(一孔)선생의 일공도 해암이 지어 준 호였다.   왜 하필 일공이냐 하니 사람이 한 우물을 파듯이 한 여자만 열중하란 뜻이라고 했다. 여보시오, 사내가 어찌 평생 한 여자만 열중하나니까, 하루 밤에 한 여자씩만 열중하라면서 그 호랑이 눈썹의 큰 얼굴 가득히 껄껄 웃기도 했다. 

저나 나나 참 허우대만 멀쩡했지 너무도 실속 없이 살다 가는구나 생각하면서

“해암, 해암선생 계시오?”

열린 대문을 밀고 마루에 올라서니 영감은 담배 문 입가를 실룩거리며 뭔가 열심히 붓글씨 쓰고 있었다.

“아, 일공선생 오셨오. 그 좀 앉으시오. 금방 끝날 것이요.”

부도(不渡)의 渡자를 끝내고 허리를 편다.

엔간히도 하마담의 빚에 시달리는구나 싶어 유심히 살피던 일공이 아무래도 문구가 낯설어서

“아니, 오조삼광이 무슨 뜻이요?”

물으니

“천하의 일공이 오조삼광(五鳥三光)을 모르시다니, 오조는 고도리요, 삼광은 광삼점이지.”

허허, 실소를 금치 못하며

“그러면 그 쌍피초설(雙皮初泄)은 무어요?”

“쌍피를 탐내다가 첫 설사를 한 거지.”
“그럼 삼고부도(三高不渡)는?”
“쓰리고를 당하면 부도내고 마는 거지.”
“........”

그러고 보니 고스톱을 쳐본지도 꽤나 오래 되었다. 항구다방 내실에서는 오후만 되면 만만찮은 이자 놀이로 먹고 노는 것이 주 일과인 일공, 해암, 희망사진관, 중국집 등의 사내들이 고스톱 판을 벌리고 마칠 때면 술잔씩이나 했다. 

어쩌다 지나가는 동장이나 파출소장에게 점잖게 한턱내면 세상에서 제일 팔자 좋은 분들이라는 치사도 들었다. 

그 좋은 고스톱을 못 해본지가 얼마나 되는가. 하마담이라는 작은 여자 하나의 영향력이 이렇게도 크단 말인가.

 

둘이서 치는 고스톱만큼 맥 빠지고 멋쩍은 일도 없다. 광 파는 재미도 합의쇼당하는 스릴도 없으니 꼭 김빠진 맥주 맛이었다. 하는 둥 마는 둥 댓 판이나 쳤을까?

“아부지!”

해암의 수양딸이 눈이 찢어져서 들이닥쳤다. 필시 하마담에게 돈 떼인 소문을 듣고 온 게지. 객지에서 만난 우동집 작은마누라한테 얹혀사는 주제에 몇 천 만원 돈까지 끌어다 떼었으니 이제 보통 심상찮은 난리가 벌어질 것 같은 생각에 일공은 황급히 신발을 찾아 꿰었다.

모조리 동서간이 되었다는 소문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사내란 사내는 모두 꼬리를 사리는 바람에 하마담의 채권단구성과 사기죄고발은 시장 통의 몇몇 노점상들에 의해서 결성되어 보험회사 전여사가 대표자가 되었다.

후진포 경찰서에 접수된 고발장에 의해 하마담의 행방이 추적되었지만 큰돈 떼먹고 도망간 여자가 쉽사리 포착될 리도 없었다. 모두가 앙큼하게 계획된 사기라며 분개했고 혹시 부녀처럼 지내던 일공과 무슨 관련이 있거나 최소한 연락이라도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통에 일공만 죽을 맛이었다.

한 가지 소득이 있었다면 천애고아 노처녀로 알려진 하마담에게 버젓이 남편과 자식이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었다.

신통하게도 남편은 건너편 젓갈회사 총무과장으로 있다 두 달 전에 그만두고 종적을 감춘 키 크고 핸섬한 삼십대의 총각과장 김삼두였다. 

서방이야 그렇다 치고 십여 년 다방을 비운 일이 없는 하마담이 언제 아들까지 낳았느냐는 것은 한 5년 전 이산가족 찾기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유행하던 때 제 생모를 찾느라고 한 보름 가게를 비우고 다닌 일이 있었는데 그 앙큼한 년이 낳는 달이 되도록 배를 가제로 동여매고 숨기다가 서방의 고향에 가서 아이를 낳아서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온 것이라고 했다.
 떠밀리다시피 일공과 해암이 영천 어디인가의 하마담의 남편 집을 찾아가서 부채를 해결하는 일을 떠맡게 되었다. 길게 몸을 사리면 같이 공모한 것으로 의심받을까 봐 울며 겨자 먹기로 맡은 것이었다.

 첫차로 동해남부선을 타고 영천역에 내려서 버스로 몇 십리를 들어가서 내리니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좁고 긴 골짜기였고 운전사가 가르쳐 준 마을은 건너편 산모롱이에 붙은 서너 집의 초가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손바닥만 한 동네였다.

꼬불꼬불한 들길을 한참이나 걸어가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가자는 해암의 말에 둘은 도랑가에 주저앉았다. 인기척에 깜짝 놀라 폴짝 뛰어가는 개구리의 발밑에 뱀딸기가 발갛게 익어 가고 탐스럽고 붉은 과육에는 불개미가 새까맣게 붙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엉겅퀴의 자줏빛 꽃에 풍뎅이 한 마리가 꿀을 따고 있었다. 소의 혀끝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몸을 가시로 중무장한 엉겅퀴 꽃이 빨대 긴 벌 나비나 곤충을 유혹하여 가루받이를 하기 위해 저리도 고운 꽃과 다디단 꿀을 마련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토끼풀이 늙어 누렇게 바래고 새콩은 깍지를 맺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새콩 줄기를 바라보다 어느새 

(그래도 그년이 직접 제 입으로 말하기가 민망해 전화를 해놓고 여러 번 끊었지만 그렇다면 편지라도 한 번 할 것이 아닌가. 어떤 사정, 어떤 꿍심이 있더라도 적어도 10년이 넘도록 부모자식같이 지낸 내게 그럴 수는 없지.)

깊은 상념에 파묻히는데 작은 색소폰처럼 금방이라도 뿌왕, 음악을 터뜨릴 것 같은 제비꽃 꽃잎 속의 촘촘한 갈색 점을 바라보던 해암이 빙긋이 웃더니 슬며시 옆구리를 질러왔다.

“아니 해암은 날아가는 새 뭐라도 봤소? 이 죽을 지경에 속도 참 좋소.”
“그게 아니라 모처럼 이렇게 대자연속에 나오니 세상이 참 묘한 것이란 생각이 든단 말씀이요. 자, 일공 꽃들이 왜 이렇게 붉고 둥글고 또 오목한지 아시오. 그건 세상 모든 꽃들이 인간에게 귀히 여겨짐은 그게 꼭 그걸 닮았단 말씀이야.”
“그게 그거라니요?”
“자, 일공 꽃이란 꽃은 모두 여자를 닮았거나 여자를 연상시키거나 하는 거지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의 그 깊은 곳처럼 둥글고 깊숙하고 빨갛고 또 그 냄새를 연상시키는 향을 풍기지요.”

에이, 저 놈의 유식도. 아는 게 병이라고 걸려도 더러운 병에 걸린 영감이라고 생각하는데

“다알리아나 장미를 보세요, 그 붉고 오돌토돌한 꽃잎에서 뭔가 느껴지지 않나요? 또 동양란이나 백합, 이 제비꽃을 보세요. 대롱 형으로 생긴 꽃은 여성의 평면구도가 아닌 입체구도 특히 그 구조와 깊이를 연상시키지요. 참으로 신통한 것은 이 오목한 꽃 우물 속의 볼록한 돌기와 그 꼭대기에 찍힌 갈색 점이지요. 보세요, 신의 걸작이야, 걸작!”

“제발 그만둡시다.”
“그게 아니지 인간세상 모두가 음양의 이치지요. 굳이 꽃뿐이 아니라 그릇들을 보세요. 쟁반, 접시, 주발 할 것 없이 모든 둥근 그릇은 여성을 상징하지요. 또 술병, 간장 병, 식초병, 소금 통은 남성을 상징하지요. 아무리 뛰어난 디자이너나 도공이라도 사각이나 오각의 식기를 만들어 내도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의 잠재의식과 본능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거지요. 실로 재미있는 것은 타원형의 그릇 속을 젓가락으로 휘젓는 남성, 대롱 같은 소금 병이나 소주병으로 체액같 은 내용물을 쏟아 내는 모습을 보는 일이지. 일공은 그럴 때 뭔가 느껴지지 않나요?”
“자, 갑시다.”

시작했다 하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끊기 위해 일공이 일어섰다. 그전 같으면 재미있고 신기하던 이야기가 이젠 흥미도 없었다.

 

물어물어 겨우 찾아간 집은 마당에 잡초가 우거지고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지붕 뒤에 손이 안간 대밭과 감나무 그늘이 짙어 금방 귀신이라도 나올 듯이 괴괴하고 적막했다.

“계십니까, 주인 계십니까?”

누런 한지로 바른 토방 문안에서 뱉은 기침 소리가 나더니 빠끔히 문이 열리며 머리가 허옇게 센 노파의 주름진 얼굴이 나타났다.

“저어 저...”

섬뜩해서 망설이는데 노파의 등 뒤에서 다섯 살쯤 되는 사내아이 하나가 나왔다.

“...어!”

일공과 해암의 눈이 동시에 번쩍 빛났다. 아이의 눈초리와 약간 들리고 단정한 콧마루가 영락없이 하마담을 닮은 거였다.

“아가, 엄마 어데 갔노?”
“그 년은 와 또 찾소? 그 년만 찾으면 나도 밑구멍을 째뿔끼요. 아이고, 아이고, 금 쪽 같은 내 자식 병신 맨들고 부모 형제 모조리 깡통 채우고 아이고, 아이고!”

노파가 아우성을 지르자 할매, 할매! 소리 지르며 아이도 따라 울었다. 차마 멋쩍어 그냥 섰는데 아이 고모라는 몸빼차림의 중년 아낙이 나타나 

“아이고, 그 년 말도 마소. 우리도 찾고 있소.”

하고 운을 뗀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댁 논밭이며 선산은 물론 시누이네 농협 융자금까지 떼돈 번다고 다 가져가서 집집이 몇 천만 원씩 이곳에서도 3억 가까이 절단을 냈다고 했다.

거꾸로 혹시 그쪽에서 소재를 알게 되면 제발 연락이라도 해 달라는 부탁까지 받고 일공과 해암은 발을 돌렸다. 심약한 일공은 아이에게 천 원짜리 몇 장을 쥐어 주었다.

 

영천역에서 기차시간을 기다리면서 저녁 겸 반주로 소주를 두 병이나 했건만 해암선생은 열차를 타자마자 또 기왕 가는 살림이라면서 맥주를 다섯 병이나 시켰다.

술 생각도 없고 해서 마시는 시늉만 하는데 어느새 얼굴빛이 검붉어진 해암이

“역시 천하의 하마담이야. 영천이 거양(巨陽)의 고장인 걸 어찌 알았을까? 허 참, 영천 대말ㅈ이라, 대말...”

혼자 중얼대더니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그 채권단명부가 동서명단이라는데 기왕 망신들은 한 것이고 그래 일공께서는 하마담하고 재미는 좀 보셨소?”

뜬금없이 물었다. 일공이 기가 막혀

“아니, 사람의 탈을 쓰고, 그 늙어 가면서 창피하지도 않소?”
“무슨 소리! 일공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말도 못 들어보았소? 성이 인간의 본성이고 기본이치라면 그게 바로 대도이니 어떤 제한도 걸림도 없다는 거지. 그럼 일공은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요?”
“그럼 해암선생은?”
“물론이지. 내 비록 돈 몇 천 날렸지만 천하의 여걸을 섭렵한 거지, 말하자면 천만 원짜리 비싼 외도를 한 셈이지요.”
“에이, 그만 둡시다.”
“무슨 굶어 죽을 점잔씩이나, 아니 씨가 마를 말씀을. 대인은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는 법, 예로부터 왕은 흉이 없다는 말을 못 들었소? 당 현종이 며느리 양옥환의 치마폭에 빠졌다고 당대에 누가 따지기라도 했단 말이요? 어차피 성이란 상음아니면 하음이 그 이치요.”
“참 많이도 아시오. 상음이라니?”
“그게 남성 상위의 체위이야기가 아니라 성애대상의 신분 문제지요. 옛날 왕족들은 동서양 예외 없이 소위 혈통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이모, 고모, 심지어 친누나하고도 혼인을 했고 그것이 화랑세기나 이집트의 고문서, 심지어 구약성경에도 공공연히 기록되어 있다오. 그게 바로 상음(上淫)이라는 건데 신라시대에 대유행을 했지요. 진골, 성골 운운하면서. 그리고 그 반대가 하음(下淫)이라는 말이야 불문가지인 것이고... 그러니까 성희의 으뜸인 바로 남자의 하음과 여자의 상음을 통하여 남성이 가진 신분과 재화가 여성이 가진 젊음과 성적매력과 교환되어 희비와 갈등이 교차되는 다채로운 인간사, 즉 성문화를 조성해 왔지요. 노년의 내가 아버지, 아버지하고 부르는 하마담과 접촉한 것도 스스럼없이 하음을 즐긴 지극히 정상적인 삶의 양식, 오히려 걸림 없이 대도를 실천한 생활양식이고 상음을 행한 하마담도 그 상음이 생존의 방편이라면 그 역시 대도일 수밖에 없지요.”
“자 술이나 듭시다.”

애써 말을 끊는데 

“그 자웅동체(雌雄同體)란 말을 들어봤소? 예를 들면 지렁이나 가리비처럼 한 몸 속에 암수가 다 갖춰진 동물을 말하는데 그게 번식하기에는 가장 간편한 삶의 방식이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식물인 은행나무도 암수가 있는 판에 아무 자극도 재미도 없이 단조롭고 무미한 삶의 형식이 아니겠소? 허긴 자웅동체의 생물만 산다면 결혼이라는 번잡한 절차나 짝사랑, 동반자살, 상사병 같은 것이 없겠지만 그 또한 얼마나 삭막한 일이겠소? 결국 고등동물이라는 인간의 모든 문화와 제도는 종족번식을 위한 성애의 상대방을, 특히 남성이 여성을 접촉하는 기회를 골고루 갖게 하려는 시도겠지만 현대의 복잡한 제도는 기회균등보다는 새로운 과점과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으며 도덕이란 굴레로 제약받고 죄악시되면서 자꾸만 왜곡되어 가고 있지요. 그 많은 제약으로부터 성의 기회를 찾으려는 시도가 더러 불륜이나 사련, 변태로 지탄받기도 하지만 그건 인간, 특히 남자가 감수해야하는 매우 부당한 불이익이며 문화적인 시행착오일 뿐이지요. 자유자재로 짝짓기를 하는 새나 곤충이 간통이나 변태로 몰리는 것을 보았소?  일공, 우리의 이 영천행을 부끄러워 맙시다. 우리가 남자인 죄,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인 죄업일 뿐이요.”
“........”

 

무일푼으로 작은댁에게서 쫓겨난 해암선생은 거제도로 본처를 찾아 떠나갔다. 일공에게도 민망하고 창피해 고개도 못 들 일이 벌어졌다. 며느리 둘, 사위 셋까지 모여서 일공선생을 벌주듯이 가운데 앉혀 놓고 가족회의가 열린 것이었다.

결혼비용이 거덜 난 막내딸은 형제자매가 십시일반 하여 가을에 예정대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남의 돈 끌어들인 3천 5백은 큰아들의 방 한 칸을 줄여 세놓고 다른 자식들 비상금을 털어 갚기로 했다. 이젠 월30만원씩 용돈을 드릴 테니 남의 길흉사나 찾아보고 경로당에서 바둑이나 두면서 소일하라는 큰아들의 말에

“차라리 애비 보고 죽어라 캐라. 내가 산송장이가?”

 뀐 놈이 성낸다고 도로 성깔을 부리고는 형님이라도 만나 보자고 지리산 밑의 고향마을을 오랜만에 찾아 나섰다.

모처럼 방문한 나이든 아우를 반기며 늙은 형은 선뜻 토종닭을 잡고 형수는 정성스레 상을 차렸다. 같이 자라던 시절의 이야기며 조카들과 손자들의 안부를 묻는 술자리가 즐거운 그의 형 앞에서 일공은 시종 예,예 건성으로 대꾸만 하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같이 자기가 집을 비운 날 하마담이 전화라도 해오면 정말 큰일이라는 방정맞은 생각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신통하게 그날 저녁 부산에서 전화가 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하마담의 전화가 아니었다.

빚쟁이들이 몰려왔다는 것이었다. 돈 문제는 아들이 나서서 자기가 책임지고 갚아 준다고 현금보관증을 써 주었지만 일공이 하마담과 같이 잠적했을 거라는 의심하며 아우성을 치는 데는 가족들도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마침 그 때  해암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오더니

“일공,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고맙긴요?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아니. 나는 사실 거제도에 조그만 고갯배도 있고 우리 장남이 지금 고기를 잡고 있지요. 물론 큰 할마이 조강지처도 있고.”
“안 그래도 나도 좀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그럼 지금 부인은요”
“아 그거사 멸치 배를 세 척이나 거느리고 한창 멸치를 좀 뜰 때 부둣가에서 제일 예쁜 다방 마담과 눈이 맞아...”
“...”
“거제도에도 남부민동에도 다들 미안하고 내가 머물 처지도 안 되고 하는데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마침 조금 전 거제도 우리 장남이 찾아와서...”
“찾아와서?”
“피차 80이 넘은 본할마시와 다시 합가하기로 했어요.  아들이 고집을 부리니까 아무소리를 안 하더랍니다. 원래부터 참 착한 사람이었으니까.” "아, 예.“ ”그래서 부산 할마이하고도 의논을 해서 내일 오후에 몸만 빠져나가는 것으로 하고 나중에 부산에 딸과 사위, 외손주가 제 어미 데리고 놀러도 오기도 하고 말입니다,“
“참 잘 됐네요. 그럼 출발하기 전에 한번 만나지요.”
“그럽시다. 내일 점심에 우리 가동장 모시고 참복이나 한 그릇 하면서 말입니다.
“아, 이렇게 우리시대가 끝나는가요?
“...”
 [대하소설 「신불산」 속의 단편소설 「구멍난 都市」 끝]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