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83)오직 ‘홀로서기’
【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83)오직 ‘홀로서기’
  • 조송원 기자 조송원 기자
  • 승인 2022.12.20 10:25
  • 업데이트 2022.12.22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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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수행승이 찾아와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 가장 절박한 곳이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스님께서 꼭 가르쳐 주십시오.” 선禪에서 ‘가장 절박한 곳’이란 해탈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수행승은 지금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청한 것이다. 그런데 조주는 말없이 일어서 나가려 하였다. 수행승이 물었다.

“스님,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십니까?”

“난 지금 소변이 급하다네. 생각해 보게나, 나는 이런 사소한 일도 내 자신이 직접 하는데 말일세.”

스스로 수행하여 얻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고 해탈이 아닌가. 수저는 아무리 국그릇 속에 담겨 있어도 국 맛을 알지 못한다. 황차 국을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국 맛을 어떻게 전해줄 수 있겠는가. -홍여운/강을 건넜으면 나룻배는 버리게나-

#2. 지금 그대는 말하기를, “공자께서는 시서와 예악과 만물에 밝으니, 천자가 될 만하다”고 한다. 이것은 남의 장부帳簿를 보고, 자기를 부자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묵자/공맹-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 마주칠 때마다 인사말처럼 전도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저들은 어떤 근거로 저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 ‘믿는다’는 의미가 뭘까? 주일날 교회에 나가 헌금하는 일일까? 예수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 거창히는 인류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희생을 감내했다고 한다. 말은 새털처럼 가볍다. 교회에 나가고 헌금하는 일 역시 가볍다. 희생은 무겁다. 가벼움은 무거움을 실을 수가 없다. 희생을 전제하지 않은 말은 ‘믿음’의 표현으로는 너무 가볍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은 한 점 오류가 없는 진리의 말씀이다’라는 <성경 무오류설>을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예수나 사도 바울의 말하고 쓴 그대로 읽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고대 사회에서 책을 복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한 번에 한 단어씩 한 자 한자 손으로 베끼는 것이었다. 초기 기독교 문서들은 구두점이 없는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소문자와 대문자마저도 구분하지 않았다. 게다가 단어와 단어 사이를 띄어 쓰지 않고 모두 붙여 썼다. 그들에게는 철자 검색 프로그램은 말할 것도 없고, 사전도 없었다. 이 더디고 힘겨운 작업 과정에 실수가 없을 수가 없었다.

더 나아가 이 사본들은 그 당시의 문화적, 교리적, 정치적, 사회적 논쟁에 깊이 영향을 받은 필사자들에 의해 필사되었다. 이는 현존하는 사본들에 의도적인 변개變改가 많을 수 있다는 개연성을 말해준다.

역사의 기나긴 세월 동안 필사자들이 성서를 베끼고 또 베끼는 과정에서 사본들 사이에 차이가 생겨났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을 이문異文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이문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 놀랍게도 수만 군데나 된다. 신약성서에 있는 낱말의 수보다 이문의 수가 더 많을 정도다.(바트 어만·민경식/성경 왜곡의 역사)

나아가 <성경 무오류설>을 넘어서서, 기독교 교리에 갇히지 않고, 성경이 쓰인 시대상황을 이해하고, 현실에 걸맞은 유연한 해석이 필요하다.

“지금 가서 아말렉 족속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殄滅하되, 남자와 여자와 어린이와 젖 먹는 간난아이와 소와 양과 약대와 나귀를 남김없이 쳐 죽이라 하셨나이다.”(사무엘상 15장 3절)

‘젖먹이까지 남김없이 무참히 도륙하라’가 진정 하나님의 명령일 수 있는가? 이뿐 아니다. 『구약』에는 남녀를 차별하고 이방인을 가차 없이 죽이는 이야기가 많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성경은 2000~3000년 전 고대인들의 기록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약소국으로서 생존을 위해 주변 민족과 크고 작은 전쟁을 늘 겪으며 살았다. 고대라는 시대적 한계, 또 그들이 처한 특수한 환경에서 그들이 인식한 신은 자기 민족을 지켜주는 신, 원수를 물리쳐 주는 수호신의 범주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진정 살리는 종교로 현실에서 작용하려면, 성경의 문자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타 종교뿐 아니라, 우리 삶 전체가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曾我蛇足 Soga Jasoku
임제 의현(臨濟 義玄) 초상. 曾我蛇足(Soga Jasoku) 그림 [위키피디아]

살불살조 살모살부!(殺佛殺祖 殺母殺父) 당나라 선승 임제 의현이 갈파한 법문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여라. 만나는 이마다 문득 죽여라. 그가 부모일지라도 죽이고, 처자권속이라 해도 죽여라.”

왜? ‘홀로 서라’는 것이다. 수행도 인생살이도 힘들고 고달프고 괴롭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 그러나 인생살이도 깨달음도 철저히 홀로 서기여서, 그 무엇에도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