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85)고수레와 하늘제사
【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85)고수레와 하늘제사
  • 조송원 기자 조송원 기자
  • 승인 2022.12.25 11:14
  • 업데이트 2022.12.31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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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 전에는 몸이 아프면, 어디에 사느냐가 대단히 중요했다. 유럽 지역에서는 지역 신부가 십중팔구 하느님을 화나게 했기 때문이라며, 건강을 되찾으려면 교회에 뭔가를 바치거나 성지 순례를 떠나거나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열심히 드려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아니면, 마을의 마녀는 환자에게 악마에 씌어 그렇다면서 자신이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검은 어린 수탉의 피를 뿌리면 나을 거라고 했을 수도 있다.

중동 지역에서는 고전적인 전통에 따라 배운 의사라면, 몸의 네 가지 체액이 균형을 잃었으니 적절한 식단과 고약한 냄새가 나는 물약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할지 모른다.

인도에서는 아유르베다 의술 전문가가 도샤(dosha)로 알려진 세 가지 신체 구성 요소들 사이의 균형에 관한 나름의 이론을 설명하고는 허브와 마사지, 요가 자세를 통한 치유법을 처방할 것이다.

중국의 의원, 시베리아의 샤면, 아프리카의 주술사, 아메리카 원주민의 치료사와 같이 모든 제국과 왕국, 부족에는 고유한 전통과 전문가가 있어서, 그들은 인간의 몸과 병의 본질에 대한 자기 나름의 견해를 신봉하고, 그에 입각한 다채로운 의식과 혼합물과 치료법을 제시했다.

이들 중 일부는 효과가 놀랍도록 좋았지만, 개중에는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 것도 있었다. 유럽과 중국,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의료 관행은 각각 달랐지만 유일한 공통점이 있었다. 어느 곳이나 어린이의 최소 3분의 1이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했으며, 평균 기대수명도 50세를 크게 밑돌았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에는 아플 때,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는 정도가 훨씬 줄었다. 토론토든 도쿄든 테헤란이든 텔아비브든, 비슷한 외관의 병원에 가서 동일한 의과대학에서 똑같은 과학이론을 배운 흰색 가운 차림의 의사를 만날 것이다.

(…) 1,000년 전만 해도 모든 문화는 우주와 우주의 근본 성분에 관한 자기 나름의 이야기가 있었다. 오늘날 세계 전역의 배운 사람들은 물질과 에너지, 시간과 공간에 관해 정확히 동일한 것을 믿는다. 가령, 이란과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보자. 문제는 물리학에 관한 이란과 북한의 견해가 이스라엘, 미국과 정확히 같다는 데 있다. 만약 이란과 북한이 E=MC²가 아니라 E=MC⁴라고 믿는다면, 이스라엘과 미국은 그 나라의 핵 프로그램에 추호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다른 종교와 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국가, 경제, 병원, 폭탄 만드는 법-에 관한 한 거의 모두가 동일한 문명에 속한다.」 -유발 하라리/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원래 ‘왕王’이라는 글자는 천天·지地·인人 삼위三位를 하나의 천도天道로 소통시키는 존재임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왕은 하늘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이었으며,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天子라 불리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는 제정일치 시대였다. 2500년 전 공자가 활동하던 춘추시대는 물론 그 이전부터 예와 법이 있었지만, 제사라는 종교적 의식이 가장 중요한 통치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예기』에서는 “무릇 인人을 다스리는 도는 예보다 긴요한 것이 없으며, 예에 오경이 있으나 제사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서경』의 「주서周書」를 보면 무왕이 힘쓴 세 가지는 첫째가 민民을 중히 여기는 것, 둘째가 먹이는 것, 셋째가 상례와 제례라고 했다.

이런 전통은 근세 이전까지 2000년 동안 이어져왔다. 따라서 중세까지는 서양이나 중국이나 조선 모두가 제사는 예와 법보다도 더 중요한 정치행위였다. 제사와 정치,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것은 근세 이후부터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예기』에 의하면 왕은 천명을 받은 천자이므로 유일하게 천제天祭를 지낼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이른바 왕권신수설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제후는 천제를 지낼 수 없고, 사직신社稷神과 조상신祖上神의 제사만 지낼 수 있었다.

특히 천자는 자기 시조의 묘당제사에 천제를 합사合祀하는 대제大祭 즉 체禘를 올렸다. 이때 천제의 위패는 서남방에 동향으로, 시조의 위패는 동북방에 남향으로 안치한다. 이것은 자기 시조가 천제天帝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왕의 천제天祭 독점은 제후국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는 그 반대로 갔다. 고려를 멸하고 새 나라를 세운 조선은 중국을 범하지 않고 섬겨야 한다는 명분으로 스스로 제후국임을 인정하고 천제를 폐지했다. 그때부터 조선은 하늘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러다가 서양 선교사들이 야훼 하느님을 들고 들어오자, 일부 백성들은 이에 자극을 받아 하느님 제사를 다시 부활하려고 했고, 또 일부는 야훼를 제사하기도 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이를 서교西敎가 조상제사를 폐지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탄압하게 된 것이다. 당시 유교는 조상제사를 기본으로 하는 종교였으며, 또한 이것이 왕권을 지지해 주는 유일한 이념이었으므로, 조상제사의 폐지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85)고수레와 하늘제사
천제 [단군자손TV] 캡처

조상제사는 하늘제사보다 늦게 시작된 듯하다. 수렵 또는 유목을 위주로 하고 농업은 화전火田 정도의 보조수단에 불과했던 부족국가 초기에는 천제天祭만 지냈으나, 본격적인 농업시대로 접어들면서 조상제사가 시작되었다.

「공자께서는 비록 간소한 식사와 나물국뿐이라도
고수레를 하여 반드시 재계하듯 했다.」 -논어/향당8-

「군주를 모시고 식사를 할 때는
군주가 고수레를 한 후 먼저 시식을 했다.」 -논어/향당13-

「환웅 천황이 사람들의 거처가 거의 완성되고
만물이 각각 자기의 처소를 얻음에
고수레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임무를 관장하게 하시고
그 직분을 주곡이라 했다.」 -환단고기/신시본기3-

유목민족은 대체로 전쟁의 신을 숭배하는 데 비해, 농경사회는 비와 풍요의 신을 숭배했다. 또한 서양에서는 풍요의 신으로 여신을 숭배하고, 아랍 지역에서는 비와 물의 신을 숭배하는 데 비해, 중국과 조선에서는 농사를 가르쳤다는 농신農神이 따로 있었다. 신농씨와 고시씨는 농신으로 추앙되는데, 모두 남신男神이다. 그리고 이들 농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고수레’라고 하는 독특한 제사가 있다.

고수레란 우리 고유의 풍습으로 밥을 먹기 전에 그 일부를 덜어 농신에게 제祭를 올려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밥을 먹기 전에 기도를 하는 서양 기독교인들의 풍습과 비슷하다. 그런데 기도의 대상이 다르다. 서양에서는 천신에게 감사하는 기도지만, 고수레는 농신인 고시씨 단군에게 감사하는 의식이다.

조선시대는 중국을 따라서 왕의 주관으로 농신인 신농씨를 제사했다. 그 장소는 지금도 전농동典農洞이라 부르는데, 서울 청량리 밖에 있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여전히 ‘고수레’를 행하고 있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고수레는 환웅 천황의 곡식을 담당하는 신하였다가 후에 단군이 되었으며, 염제 신농씨와 황제 헌원씨는 모두 그의 방계 자손이라고 한다. 그리고 단군왕검의 곡식 담당 신하도 그 이름이 고시高矢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지금은 고수레 제사의 대상인 고시씨 단군은 잊어버리고, 그냥 풍년을 기원하며 새들과 들짐승에게 먹이를 주는 풍습으로 남아있다.

우리 조상들은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하늘제사와 조상제사, 농신에 대한 제사를 받들어왔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이 전래되어 우리의 제사를 미신이라고 매도하고, 그들의 예배와 미사만이 참된 제사라고 가르침으로써, 우리 조상들의 전통을 훼손하고 모독했다.

이제 천주교에서는 이를 공식적으로 사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조상제사를 모독한 것에 대한 사죄일 뿐, 하늘제사에 대한 것은 아니다. 이제 기독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개천절을 명절로 인정하고, 기념미사를 드림으로써 하느님은 한 분뿐이며 다 같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계속>

*이 글은 묵점 기세춘 선생의 『동양고전산책1』에 크게 힘입었음을 밝힙니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