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시대12-수필】 파도 - 권대근
【시민시대12-수필】 파도 - 권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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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2.26 14:58
  • 업데이트 2022.12.26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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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도 채워도 끝없는 갈증, 
산다는 것은 언제나 저토록 처절한 몸부림인 것을. 

보랏빛 침대에 누워 밤새 뒤척이는 파도와 씨름을 했다. 전국에서 모인 수필작가들과 함께 세미나 행사를 치루고 바다가 바로 보이는 호텔의 지정된 방에 홀로 몸을 뉘었다.

격렬한 몸짓에 지레 지친 바위들이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고스란히 당하고 있다. 미친 듯 곤장을 쳐대는 파도의 꼬리에 감겨 하얗게 거품을 문다. 소리를 내지르는 이나 입을 앙 다물고 참는 이나 격정으로 점철된 삶의 한 자락을 베어 물고 시간을 죽이고 자신을 죽인다.

살고 싶다. 나의 의지대로 뜨겁게 살고 싶다. 파도의 날 선 목청에 나도 바위가 되어 온 몸의 세포들을 곤두세운 채 내 삶을 닦달하였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뿐이다. 처음 보는 문인들과 동행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내 목소리를 죽여야 됨을 나는 잘 안다. 글을 쓰는 사람은 표현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가슴 속에 품은 것이 많아 토해 놓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절실한 눈빛을 가진 사람들이다.

펜으로 상징되는 날카로운 칼을 집어든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펜이 되고, 그 이름을 단 글이 그 사람이 된다. 이름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가시밭길이 그들의 삶의 노정이다. 그저 길이 있기에 가야만 하는 고행자, 순례자, 방랑자가 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 파도를 넘어야 하는 사람들이 문인이다. 술잔에 거친 열정을 토한 어떤 수필가는 방바닥에서 잠이 들고, 분위기에 따라 술에 잘 취하지 않는 나는 한겨울 해운대에서 파도가 되어 하얀 모래를 핥으며 삶의 열정을 포효하고 말았다.

고교 시절의 흔적을 간직한 해운대 바다와 나는 인연이 깊다.

대학을 졸업하고 암울했던 시대의 그림자로부터 멀리 벗어나려고 찾아온 곳도 해운대였다. 수필 강좌를 개설하고 낭만적인 제자들과 인생과 사랑을 논하던 곳도 이 자리, 여기가 아니었던가. 이런저런 추억을 되씹으며 파도의 포효를 보고 있었다. 네 시경 파도의 항복을 받았다.

바람은 먼 바다를 돌아나가 해운대의 물자락을 놓아주었다. 한결 편안해진 숨결로 파도는 바위의 멍든 몸을 토닥이고 있었다. 이 틈을 놓칠세라 파도의 약해진 세력을 감지한 내 속의 자아가 머리를 흔들어댔다.

쉬고 싶다. 뜬 눈으로 새운 밤들을 돌려받고 싶다. 남들처럼 시간을 풀어놓고 안락한 밤을 보내고 싶다. 청각을 잃을 정도로 파도 소리에 쓸려 다니던 정신을 수습하고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파도는 여전히 흔들리며 무시무시한 파랑을 일으켜 내 의식을 압도하였다. 구겨진 하얀 원고지들을 공중에 집어 올렸다가 흩뿌리기도 하고 손가락에 감아 휘돌리기도 하였다. 내 몸은 그 손가락 끝에 감기기도 하고 또 공중으로 붕 떴다가 수면으로 철썩 떨어지기도 하였는데 어느새 보면 파도와 직접 대면하고 서 있었다. 거대한 바다를 배경으로 필름 한 롤이 수직으로 펼쳐져서 말려 올라갔다. 커트마다 새겨진 어쭙잖은 내 글의 제목들이 꽁무니에 괄호를 달고 있다.

괄호 채우기가 내게 주어진 과제라도 되는 것이었을까. 네임펜이 살아 있는 것일까. 동그라미를 그리려는 의지와 달리 괄호 속에는 가세표가, 어떤 것은 세모가 점멸하였다. 파도가 내 불쌍한 성적표를 흔들어댔다. 빌딩의 세로로 단 플래카드가 태풍에 한 순간 확 찢어져 내리듯 검은 필름이 나를 덮쳤다. 요동치다 찢어진 필름 틈새로 밖이 보였다. 몇 년이나 들고 있어 누더기가 다 된 미완성의 내 수필들을 파도가 흔들어댔다. 문학평론 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한 동안 수필과는 너무 멀어져있었던 탓이리라.

수필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거울 하나 장치하는 것이다. 독자가 얼마간의 상상을 섞어 내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허락하는 일이다. 자신의 다채로운 내면 풍경을 진솔하게 보여주어야 하고, 향수 냄새가 나든 비누 냄새가 나든 자신의 체취를 독자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글이 아닌가.

그게 어디 쉬운 일이랴. 하늘이 보고 있고 세상이 보고 있는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상으로 세상 한가운데 서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한때 청동거울을 윤이 나도록 닦아대던 윤동주를 본받고 싶어 밤을 샌 적도 많았다.

‘글이 그 사람이다.’라는 버폰의 말에 적극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 나의 거울은 부옇게 흐려져 있고 그 흐림 뒤편에 나는 묘하게 숨어 있다. 진솔한 나의 반성을 촉구하러 파도는 꿈길에까지 따라 왔던 것일까.

파도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어중간한 자리에서 어중간한 노력으로 어중간한 도리만 논하다가 이젠 그조차 게을리 하는 내 가련한 의식이여. 놓지 않으려거든 아귀에 피가 맺히도록 꼭 잡아야 하리. 날카로운 시선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칼날이 백짓장처럼 얇아지도록 벼리려거든 어찌 해야 할 것인가.

‘수필도 안 쓰는데, 당신이 수필가 맞아?’ 귀를 막았다. 신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파도는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었다. 내 안에서 용암처럼 유연하게 흐르며 폐부를 긁어대는 그 소리에 묶여 버렸다. 어느새 도망치기를 포기하고 내 의식은 그 신음新音을 찾아 함께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혼수로부터 깨어나 창을 열었다. 나와의 동침을 부정이라도 하듯 파도는 긴 해안선을 핥으며 내게 눈을 주지 않았다. 푸른 보랏빛 기운이 창으로 흘러들어왔다. 보랏빛이불 탓도 커튼 탓도 아니었다. 오묘한 색깔이 새벽 분위기에 일조하는 바 없음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찰싹이는 해조음과 찬 공기, 서슬 퍼렇던 간밤의 짭쪼롬한 바닷바람이 만들어낸 에너지 탓이리라. 으르렁거리는 파도의 혓바닥에 휘둘려 내 휴식의 밤은 자유롭지 못했다. 타고르의 기탄잘리가 잔잔한 파도의 음률에 실려 일렁거렸다. 

‘태양을 수놓은 초록빛 어둠의 안식이 조금씩 내 가슴을 덮었습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여행하는가를 잊어버렸고 싸움 없이 그늘과 노래의 미로에 내 마음을 맡겼습니다.’

방을 나섰다. 내 의식을 깨우는 새로운 소리와 맞대면하리라. 가열한 채찍 하나 손에 들고 아래로 내달았다.

 

권대근 수필가

◇ 권대근

▷수필가, 문학평론가
▷월간 <동양문학> 등단 후 <경북신문>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저서 <수필은 사기다> <현대수필문예창작론> 등 18권
▷부산수필문학상, 부산펜문학상 외,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회장, 한국문학세계화위원회 위원장, 대신대학원대학교 문학언어치료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