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후 1시 25분, 고향 횡천역에 정확한 시각에 무궁화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종착역이 부전역이고, 내 목적지도 부산 부전동이다. 객차 내에 빈 좌석이 거의 없다. 1호차 59번 석, 자리를 찾아 앉았다. 요즘은 기차 승객이 많다. 예매해 두지 않으면 좌석 차지를 못한다. 적어도 1시간 이상 서서 가다가, 마산역 쯤에서야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지난 3월 무릎관절을 인공관절로 바꿨다. 4월 퇴원 후 한 달에 한 번씩, 그러다가 두 달에 한 번씩 수술 예후를 체크하러 병원에 들른다. 경과는 좋다. 전혀 부작용이 없다. 타고난 관절 기능의 70% 이상은 회복된 듯싶다. 현대 의학의 혜택을 온전히 누린다. 생일이 50년만 더 빨랐어도, 불편한 한 발로 제대로 된 삶을 꾸리지 못하고 고목처럼 스러져 갔을 것이다. 아버지는 60대에 돌아가셨다. 질병의 종류는 다르지만, 아버지보다 더 건강하고 장수하는 것은 아들이 별스레 잘나서가 아니라, 아버지보다 후대에 태어난 덕분일 뿐이다.
오후 4시 10분 부전역에 도착한다. 세흥병원은 걸어서 10분 거리다. 접수하고 엑스레이 찍고, 진료·상담하고, 진료비 내고, 처방전 받아 약까지 타고 나도 5시면 끝난다. 부전역에서 횡천역까지 돌아오는 기차는 6시 52분에 출발한다. 두 시간 가까이 시간이 빈다. 딱히 할 일이 없다.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부전역 근처 돼지국밥 집에 가서 저녁을 먹으며 소주 한 병을 즐긴다. 병원 나들이의 유일한 낙이다.
동곽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이른바 도는 어디에 있소?”
장자가 말했다. “없는 곳이 없소.”
동곽자가 말했다. “요약해 주시면 좋겠소.”
장자가 말했다. “도는 땅강아지와 개미에게 있소.”
동곽자가 말했다. “어찌 그처럼 낮은 것에 있단 말이오?”
장자가 말했다. “도는 돌피와 참피에 있소.”
동곽자가 말했다. “어찌 더욱 낮아지는 것이오?”
장자가 말했다. “도는 기와와 벽돌에도 있소.”
동곽자가 말했다. “어찌 더욱 심해지시오?”
장자가 말했다. “도는 똥과 오줌에도 있소.”
동곽자는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장자가 말했다. “그대의 질문은 원래 본질에 미치지 못한 것이었소.
시장 책임자가 시장 감시인에게 신발과 돼지 값을 묻는 것은
매번 아랫것들이 시장 상황을 더 잘 보여주기 때문이오.
그대는 미리 표준을 세워놓고 판단하지 말고
사물을 숨기지 말아야 하오.
지극한 도는 이와 같고
훌륭한 교훈도 역시 그런 것이오.” -장자/지북유-
6시 52분 부전발 기차는 9시 30분이면 고향역인 하동 횡천역에 도착한다. 집에 와서 옷 갈아입고 세수하고 책상 앞에 앉으면 밤 10시다. 그러니까 1시에 집을 나서서 10시까지 부산 병원 나들이에 9시간이 든다.
목적한 바의 병원 일은 1시간이 채 안 걸린다. 그리고 저녁 식사 넉넉잡아 1시간, 그러면 나머지 7시간은 뭔가? 기차 객실에서의 왕복 5시간과 역 대합실에서의 1시간, 줄잡아도 6시간은 ‘내 시간’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게 마음대로 안 된다. 읽을거리를 준비해 가도 잘 읽을 수가 없고, 생각을 하려고 해도 공력이 부족해 생각의 갈피가 잘 잡히지 않는다. 그냥 멍청히 허비해 버리는 시간이기 일쑤다.
‘도는 똥과 오줌에도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허비해 버리는 시간도 내 삶의 한 부분이다. 이 시간들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인생 자체를 허비하는 것이 아닐까? 도가 뭐 별 건가. 도가 똥과 오줌에도 있듯, 우리의 인생도 폼 나고 화려하고 떠들썩한 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사소하게 버려지는 자투리 시간에 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엄마는 90여 년 건강하게 사셨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글’을 띄엄띄엄 읽었다. 지식이나 재미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머리 녹슬지 않게 기름칠로 읽은 것 같다. 배운 게 있다. 10여 년 전, 대화 중에 엄마는 평생 ‘죽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화가 난다든지 어려울 때 입버릇처럼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을 곱게 보지 않았다. 싫든 궂든 살아있을 때 열심히 살 일을 생각해야지, 말이나따나 죽고 싶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 역시 ‘시간 보내기’란 말은 해 본 적이 없는 듯싶다. 종종 듣는다. ‘뭐뭐하면 시간 보내기에 참 좋다’는 둥의 이야기, 나는 하지 않는다. ‘그 시간’ 보내고 나면, 뭐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 시간은 자신의 인생에서 삭제되는가? 그 삭제된 시간만큼 누가 벌충해 주는가?
남는 문제가 있다. 어떤 난관이나 원치 않은 불행한 일이 닥치면, 그 해결에 올인한다. 그 문제 외는 인생이 없는 것처럼 만사를 제쳐버린다. 그 일을 해결한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불행한 일은 불행한 대로 평심平心을 유지하며, 인생을 향유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대단한 공력이 필요한데, 거기에 다다를 수 있을는지, 마음을 가다듬을 뿐이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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