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시대1-정치】 합의의 정치는 불가능한가? - 진시원
【시민시대1-정치】 합의의 정치는 불가능한가? - 진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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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1.11 07:15
  • 업데이트 2023.01.1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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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원 부산대학교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정치가 엉망이다. 양대 정당의 진영정치가 극에 달해 모든 것이 갈등이고 충돌이고 혐오다. 한국 정치가 제도화가 덜 되고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 정도가 더디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객관적인 판단이지만, 한국 정치가 이렇게 혐오와 배제의 정치로 점철되고 있는 상황을 우려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 나라 정치는 엉망인데, 극복 노력이 안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이런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 정치가 이리 끝 모를 정쟁으로 치닫고 싸움의 악순환에 빠져 있는 상황은 양당제의 문제와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 그리고 과도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문제와 낮은 시민의식의 문제 등에서 기인한다. 한국정치가 민주적이고 좋은 정치로 이행하려면 이런 네 가지 문제를 반드시 선결적으로 해소해야 한다.

첫째, 양당제의 문제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각각 보수와 진보를 대변하며 한국 정당체제를 양분하여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양당제는 우리 선거제도의 안 좋은 결과물이다. 기존의 선거제도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아니라 병립형 비례대표제였다.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으로 나누고, 지역구 의원은 소선거구 단순다수결로, 비례대표는 정당명부식으로 서로 독립적으로 선출해온 것이다.

이런 선거제도는 양당제와 친화적이지만, 한 표라도 더 얻으면 당선되는 단순다수결 제도라 지역구 선거에서 사표를 많이 생산하고 비례성과 대표성이 왜곡되는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특히 사표 문제는 심각했다. 주권자 국민들의 한 표는 모두 동등하게 소중하다. 그런데 많은 사표는 주권자 국민들의 표의 등가성이 훼손되는 기본적으로 비민주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민주당과 정의당 주도로 지난한 패스트 트랙 과정을 거처 공직선거법을 개정한 결과, 우리나라에도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병립형 비례대표제처럼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을 서로 분리해서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계해서 선출하는 방식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정당의 전국 득표율과 의회 의석률을 일치시키는 것이 기본이다. 즉, 정당의 전국 득표율에 맞춰 의회 의석을 먼저 배분한 다음, 지역구 당선자에게 우선 의석을 배분하고 남는 의석을 비례대표 명부순대로 채워나가는 방식이다. 이런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사표를 줄이고 비례성과 대표성을 더 많이 확보하는 장점이 있으며 다당제와 친화적이다. 정당 득표율과 의회 의석률을 맞추는 방식이니 당연히 소수정당도 의회 의석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 결과 양당제가 아닌 다당제와 친화적인 선거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공직선거법 개정에서 만들어진 선거제도는 ‘캡을 씌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였다. 제대로 된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아니라 기존의 지역구 의석수를 거의 유지하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한 것이고, 그것도 다시 캡을 씌워 병립형 비례대표제도 일부 유지시킨 것이다.

결국 애초부터 제대로 된 비례대표제가 아니라 누더기 비례대표제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위성정당 설립금지 조항을 법에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양대 정당이 모두 위성정당을 만들었고, 그 결과 정의당을 비롯한 소수정당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민주당과 소수 정당들이 합의해서 기획했던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본래 취지가 완전히 무산된 것이다. 배가 산으로 가버린 것인데 그 결과는 돌고 돌아 다시 양당제의 재공고화였다.

하지만 양당제는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그리 적합한 정당체제가 아니다. 다원주의 사회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간의 다양한 가치와 지향이 함께 공존하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양대 정당이 이들 시민들의 수없이 많고 다양한 선호와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기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시민들의 다양한 가치와 지향을 반영하는 다당제가 양당제보다 낫다. 한마디로 양당제는 시민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단지 2개의 박스 안에 모두 구겨 넣는 정당체제인 것이다. 양당제는 이제 한국정치에서 사라질 때가 되었다. 다당제로의 전환은 민주화 이후 다원화 된 한국사회가 가야할 정치적인 길이다. 양당제는 퇴행의 길이고 다당제는 전진하는 길인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양당제보다 다당제 하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다양한 가치와 지향이 더 민주적으로 정치에 수렴될 수 있다.

국회와 양대 정당은 2024년 4월 10일, 22대 총선이 다가오기 전에 공직선거법을 다시 개정해서 제대로 된 온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주권자 국민들의 사표를 줄이고, 주권자 국민들의 다양한 선호와 가치를 보다 더 민주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다당제를 만들어야 한다.

다당제가 만들어지면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다수 정당이 등장하기 어려워지고, 그 결과 정당 간 합종연횡과 연정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당 간 협력과 연정 가능성이 높아지면 정당 간 대화와 합의와 포함의 정치가 활성화되는 ‘합의 민주주의’가 실현될 가능성도 따라서 높아진다.

둘째, 과도한 대통령 집중제, 즉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을 통해 절대적인 승자독식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니 대통령 선거가 양대 정당의 사생결단식 선거가 되지 않을 수 없고, 이기거나 지더라도 양대 정당은 서로 승복하기 어려워진다. 서로 상대 정당을 끌어내려야 다음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구조 아래서 양당 간의 협치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여당 대통령은 제왕적 권력을 배타적으로 행사하고, 야당은 대통령과 여당을 무조건 발목잡고 늘어지는 후진 정치가 지속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후진적인 정치 상황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더욱 악화된다. 대통령이 소속한 여당이 국회 소수 정당이 되면, 거대 야당과 사사건건 갈등하고 충돌하는 정치가 더 심화되는 것이다. 대통령제는 대통령도 국민이 직접 선출한 정당성을 지니고, 국회의원도 국민이 직접 선출한 정당성을 지닌다. 따라서 대통령제를 ‘이원적 정당성 체제’라 부른다. 대통령도 국민이 내어준 권력의 정당성이 있고, 거대 야당도 국민이 내어준 권력의 정당성이 있으니, 서로 갈등하고 충돌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소야대 상황은 주권자 국민들이 만든 것이고, 여소야대 상황에서 양대 정당 간의 정쟁은 더욱 가속화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도 안정적이고 관리 가능한 온전한 권력을 행사하기 어렵다. 과도한 제왕적 대통령제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합의를 통한 헌법 개정으로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대통령 4년 연임제로 가거나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총리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안도 있고, 아예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로의 전환도 진지하게 검토해야만 한다.

셋째, 과도한 이데올로기 투쟁 문제다. 보수와 진보 간의 사생결단식 갈등은 한국정치를 해하는 대표적인 부정적 요인이다. 이데올로기는 어떠한 철학과 원칙과 원리를 믿고 따름으로써 개인이나 국가 공동체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일종의 신념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단순한 믿음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동과 실천 및 정책과 권력을 추동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의 정치적인 힘은 끝없이 증폭된다.

보수 정당과 진보 정당은 보수 철학과 진보 철학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런 자세는 정당 정치에서 필요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철학과 원칙만이 절대 진리라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애초에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신념이나 믿음이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틀릴 수도 있고 융통성 없는 아주 경직된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종교 갈등처럼 이데올로기 갈등이 심화되면, 경직된 이데올로기는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데올로기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이데올로기 그 자체보다 실용주의를 함께 강조하는 정치문화도 우리에겐 필요하다.

경직된 이데올로기는 갈등과 차이와 혐오만을 조장하고 공고화한다. 예컨대, 지역주의, 반공주의, 국가중심주의, 사대주의, 시장지상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등과 같은 과도한 이데올로기는 객관성과 균형 감각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 반드시 실용주의로 순화되어야 한다. 실용성을 상실한 이데올로기 정치는 항상 과도하고 위험할 가능성이 높다. 이제 우리 정치문화도 이데올로기와 실용성을 균형감 있게 추구하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넷째, 낮은 시민 의식과 인권에 대한 더 낮은 인식 문제다. 인권은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인간의 존엄성 실현은 자유와 평등과 인권을 모두 필요로 한다. 인권은 한 마디로 만인이 동등하게 소중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데 동등하게 소중한 사람들 간에는 차별과 무시와 혐오가 허용될 수 없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우리 시민사회와 국가 공동체에서 인권의 중요성은 그리 폭넓게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인권 감수성은 상당히 낮다. 예컨대, 빈부격차와 지위와 권력의 유무에 따라 우리 국민들은 동등한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유전무죄와 유검무죄 그리고 무전유죄와 무검유죄라는 말은 이런 상황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빈자와 약자의 인권이 부자와 강자의 인권에 비해 폄훼되고 경시되고 무시되고 있다.

게다가 우리 정치는 보수와 진보로 양분되어 서로 무시하고 혐오하고 갈등하고 있다. 동등하게 소중한 시민들 간에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고 이해하고, 대화하고 설득하고 합의하고 절충하는 모습이 성숙한 민주시민의 자세다. 그런데 우리 정치문화는 그렇지 못하다. 더욱이 인권은 자연권이자 천부인권이고 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기본권이다.

진시원 교수
진시원 교수

그리고 인권은 차별과 무시와 혐오를 받지 않고 인갑답게 살 권리를 요구하고 관철할 수 있는 정치적 권리이기도 하다. 국적자이지만 사회적 약자도 자신의 인권을 다른 사회적 강자와 마찬가지로 국가로부터 등등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고, 무국적자도 그리고 타국민도 인권을 보장받을 정치적 권리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빈민도, 사회적 약자도, 소수자도, 불법체류자도, 북한주민도 모두 동등하게 소중한 인권을 누릴 정당한 천부인권과 정치적 권리를 지닌 것이다.

우리 국민들도 이제는 동등하게 소중한 시민들 간의 배려와 존중과 이해 그리고 대화와 설득과 합의와 절충의 정치문화를 체화하고 내재화해야 한다. 이게 다원화 된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민주시민의 바람직한 자세다. 진영 정치 안에서 서로 비난하고 혐오하고 미워하는 정치는 이제 제발 그만 해야 한다. 정말이지 망국병이다.

 

◇ 진시원 : ▷부산대학교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전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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