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360)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7장 고독한 천재의 죽음⑤
대하소설 「신불산」(360)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7장 고독한 천재의 죽음⑤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01.15 07:05
  • 업데이트 2023.01.14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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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독한 천재의 죽음⑤

영주시에서도 가장 가난한 달동네 영주3동 뒤새마을의 밋밋하게 솟았다가 휘움하게 돌아서 풍기방향으로 가는 국도에 못 미쳐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 숨은 듯이 자리 잡은 영주화장장으로 시신이 운구(運柩)되었다. 가난하고 힘겨운 성장기를 보낸 언양을 피해 숨다시피 찾아온 영주땅에서 죽음을 맞아 다시 영주에서도 숨다시피 돌아앉은 화장터로 일찬씨의 육신이 지상에서의 마지막을 머물게 된 것이었다.

근 3년을 앓아서인지 미망인도 아들딸과 사위도 거의 울지 않고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묵묵히 화장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고 단지 평소 시아버지가 너무 무서워 한 번도 고개를 들어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며느리 상미엄마가 숨을 죽인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고 영순씨가 물기가 촉촉이 백찬씨가 조용히 화장장 옆 나무그늘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혼자 한참 울고나올 모양이었다.

비록 한 평생을 지지고 볶았을망정 미우나 고우나 바로 손위 누나로서 귀한 남동생에 대한 사랑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것인지 이제 원망을 지나 미련에 가까운 아쉬움을 가득히 담아 관을 싣고 들어간 가마 앞에서 순찬씨는 시종일관 혼자 중얼중얼 기도를 올리다 간혹 할렐루야를 외쳐 문상 온 뒤새마을 여자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약간 떨어져 완전히 들리지는 않지만 이제는 그 기도가 대충 어떻게 하느님아버지를 부르고 우리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한 구세주 예수님을 보내고 또 오늘 부름을 받은 어린 양이 어떠어떠한 잘못이 있어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사 그 죄를 사하여 주고 영원히 빛나는 영광의 나라로 받아줄 것을 우리 주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쯤을, 그 대략의 줄거리 안에 고인이 어떻게 가난한 유년을 보내고 병마에 시달렸으며 이런저런 갈등과 인간적 고뇌 속에서 살아왔는지 생애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음을 능히 짐작하며 조용히 눈을 감고 간간이 귓속을 파고드는 몇 마디의 기도 말을 음미하던 열찬씨는 마침내 가마 속에서 되돌아오는 하얗게 바랜 유골을 바라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비록 오래 앓기는 했지만 그렇게 한 평생 고집으로 일관하던 독재자, 성인이 된 이후 단 한 순간도 너그러운 형이기 보다는 무자비한 압제자이던 일찬씨의 유골, 특히 해골 부분은 너무나 조그맣고 정갈한 모습으로 하얗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긴 대젓가락으로 상주들과 친척들이 뼛조각을 하나씩 수습하여 화장장직원이 절구에 갈아 상자에 담아오자 우현이가 유골함을 들고 그 앞에 휴가 온 정석이가 사진을 들고 앞장을 섰다.

영주에서 안동을 거쳐 칠곡, 대구, 영천, 경주를 지나 언양에 도착하는 근 세 시간 반을 처음에는 나지막한 회심곡이 울렸지만 기도에 방해가 된다고 우상숭배의 음악을 끄라는 순찬씨의 항의로 장의차운전수가 꺼버리고 단 한 사람의 신도 금찬씨을 거느린 가순찬권사의 광신적인 기도도 끝이 나자 장의차는 아직도 중간중간 빨간 사과가 오롱조롱 매달린 고즈넉한 늦가을의 들판을 달려 멀리서 보면 마치 오붓한 나들이라도 가는 것만 같았다.

망자의 유언대로 유골을 자신이 언양중학교를 다닐 때 건너던 뚝다리 가에 뿌려주기로 했지만 그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객지로 떠난 지가 이미 35년이나 되어 이미 울산이란 커다란 공업도시의 한 귀퉁이 서울산이 되어 반듯하게 직강공사가 되고 고속도로의 다릿발이 괴물처럼 버티고선 강가에 징검다리가 있을 리가 없었다. 언양읍내에 살면서 매일이다시피 갱빈을 지나다니는 상찬씨와 의논하여 옛 소전껄이 있던 넓은 공터에 차를 대고 고속고로 다릿발을 한참 지나 교각 아래를 흘러온 강물이 이루어진 제법 넓은 웅덩이를 이루다 약간의 경사면을 만나 햇볕에 하얗게 반사되며 부서지는 여울목에 일찬씨의 유골을 뿌리게 하고

“형님, 잘 가이소. 이제 만사 기 죽지도 망설이지도 숨어살지도 한탄하거나 원망하지도 말고 그저 물이 흘러가듯이 편안하게 지내소. 부디 잘 가이소.”

비로소 눈가가 뜨뜻해져 재빨리 손바닥으로 훔치고 둑 위로 올라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의젓하고 든든한 자세로 내려다보는 신불산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열찬씨가

“자, 갑시다. 차로 한 5분이면 저녁 먹을 식당이 나옵니다.”

어쩌다 수백관이라고 불리는 장례 또는 집안의 대표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실감하며 동부리의 어느 불고기 집으로 안내했다. 아무리 장례라 하지만 멀리 영주에서 와 준 문상객들에게 소문으로만 듣던 언양불고기를 맛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밑반찬이 들어오고 고기가 구워지기 전에 열찬씨가 여러 문상객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미망인 김해댁, 상주 우현씨의 인사를 시키고 비로소 자리에 앉아 술잔을 돌리기 시작할 때였다.

“작은 아부지!”

옆자리의 우현씨가 빤히 올려다보며 불렀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키가 180Cm가 넘어 제 할아버지처럼 크고 어깨도 벌어지고 얼굴윤곽도 뚜렷한 장사(壯士)의 풍모지만 어딘지 우수에 잠기고 겁에 질린 방금이라도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질 것만 같은 애절하고도 호소력 짙은 눈빛이었다.

“와?”

혹시 장례 후 상사의 뒷정리에 대해서 묻는가 싶어 되묻는데

“잔 아부지,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공무원 체질이 아닌 것 같심더.”

“그 기 무신 말이고? 이적지 몇 년이나 잘 댕기 놓고. 와, 일이 힘들더나?”

“아임니더. 일이 힘들기보다는 교도관이란 직업 자체가 제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요. 이건 뭐 제가 재소자를 감시하기보다는 제 자신이 교도소의 높다란 철조망 안에 수감된 것 같아서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갓난애 때부터 너무나 성격이 동떨어진 세 사람, 아버지와 어머니와 할머니가 마치 삼국지처럼 정립하여 으르렁거리고 수시로 고성이 오가고 기물이 파손되고 지붕에 불을 지르기까지 하는 난장판 속에서 자라며 너무나 엄격하고 무서운 국어선생 아버지에게 억눌리며 머리 좋은 집안의 장손으로 엄청난 기대감에 시달리며 그럭저럭 고등학교입학 때까지는 과연 교사아들로서의 우등생, 모범생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2학년이 되면서 급격히 성적이 떨어지고 말수가 적어지고 사람을 만나거나 눈을 맞추는 것을 겁을 내어 마침내 어머니 김해댁의 손에 이끌려 내과, 정신과, 수양시설을 전전하다 못 해 기도의 효험이 좋다는 암자를 찾아 제를 올리다 못 해 굿판까지 벌이며 황급히 팔아온 언양의 논밭 값을 다 날린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끝끝내 완치하지 못 하고 정상인도 비정상인도 아닌 멀쩡하면서도 어딘가 우울하고 불안한 가장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이 우째 모두 제 직업과 적성이 맞을 수가 있을까? 태권도 국가대표가 태권도장을 차리거나 바둑유단자가 기원을 차리는 것처럼 자신의 취미와 직업이 맞아 떨어지면 가장 행복한 평생을 살 것 같지만 그마저도 현실세계에서는 일방적으로 넉넉한 수입이 확보된다는 보장이 없다고 하지 않나?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가장, 아니 사내들은 그 대부분이 그저 먹고살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취미나 소질과는 전혀 동떨어진 바닥에서 허덕이기 일쑤이며 취미와 직업과 수입이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단 10%도 안 된다고 하지 않나? 우선 이 삼촌만 보아도 당초 소설가나 국어교사가 되려던 사람이 그 갑갑하고 딱딱한 행정공무원으로서 벌써 30년이나 썩어가고 있지? 그렇지만 스무 살 어린 나이에 객지에 나와 누구하나 돈 한 푼, 말 한마디 도와주지 않는 복마전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잖아? 니도 이제 조금만 참으면 공무원으로 적응도 하고 승진을 하여 직책과 업무도 조금씩 나아지며 자리를 잡아가겠지. 안 그래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힘든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아무 내색 말고 견뎌봐.”

이야기 그만 하고 조카 밥 먹이라고 영순씨가 옆구리를 찌르며 눈을 흘기도록 길게 설명했지만

“예, 그렇기는 하겠지만 아무래도 저는 체질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것 같심더. 이렇게 게속 시달리다가는 정신이 돌아버릴 것만 같심더.”

애처롭게 쳐다보는 걸

“야가 시방 무신 소리를 하는 기고? 오늘이 어떤 날인데 누 앞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기고?”

열찬씨가 일부러 눈에 힘을 주자 슬며시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마침내 식사가 끝나고 언양과 부산, 울산사람들이 처지고 영주사람들만 장의차에 오르는 걸 일일이 전송하는 열찬씨와 백찬씨의 옆에 섰던 우현씨가

“잔아부지, 아무래도 주식이나 재테크를 하는 것이 교도관보다는 나을 것 같심더.”

다시 이야기를 꺼내는 걸

“야 좀 봐라? 니가 무슨 돈이 있노? 그까짓 3년짜리 9급공무원 퇴직금이 얼마나 된다고?”

하얗게 눈을 흘기자

“아부지 퇴직수당이 3,4천만 원은 넘는답니더. 연금공단과 의료보험에서 위로금도 나오고. 또 영주에 집도 있고...”

그 와중에 언제 그런 것까지 다 알아봤는지 기가 찬데

“잔아부지, 그래 아이소.”

꾸뻑 절을 하고 마지막으로 장의차에 오르더니 문을 닫았다.

연산동 집으로 들어온 열찬씨가 소파에 길게 누웠다. 노곤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하고 뭔가 불안하기도 하고 전체 적으로 뒷골이 뻐근하며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보소!‘

집에 도착하자말자 무슨 먼지라도 털어내듯 샤워부터 시작한 영순씨가 빨간 토끼눈이 되어 나오더니

“와 이래 가슴이 콩닥거리며 숨이 막혀 갑갑한지 모르겠네. 당신은 괜찮능교?”

빤히 쳐다보는 걸

“나도 좀 허전하고 찝찝하기는 해. 차차 시간이 지나가면 괜찮겠지. 거 냉장고에 맥주 있는지 찾아봐.”

하며 일어서니 금방 영순씨가 식탁위에 맥주 세 병과 마른안주를 차렸다. 슬비는 부산에 닿자말자 친구를 만나러 가고 혼자 컴퓨터를 검색하는 정석이를 부르자 자기도 곧 친구를 만나러 간다면서 두 분이나 오손도손 마시라더니 금방 집을 나갔다.

“보소. 당신은 괜찮능교?”

이튿날 눈을 뜨자말자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영순씨가 물었다.

“와? 나는 너무 되서 정신 모르고 잤다.”

“저런? 같은 형제인데도 남자들은 와 저래 무심할꼬? 나는 밤새 한숨도 못 잤심더.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누가 자꾸 옆구리를 찌르거나 잡아당기는 것처럼 온몸이 배기다기 설핏 잠이 들었다하면 아주버님이 당신에게 삿대질을 하고 고함을 지르거나 침침하게 어두운 곳에서 자꾸만 손짓을 하고 부르는 것 같아서...”

“너무 애통해서 그런가? 차츰 나아지겠지. 다 마음먹기 나름 아닌가?”

다독거리며 아침을 먹는데 영순씨는 통 밥에 손을 대지 않 김칫국물만 찔끔거리더니 이내 숟가락을 놓았다.

“오늘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푹 자!. 뭐하면 새로 나왔다는 그 황토방이란 데 가서 피로나 풀고 오든지.”

이러고 서울에서 친구를 만나보고 바로 귀대한다는 정석이와 함께 집을 나왔는데

“보소. 당신은 괜찮능교?”

이튿날 자리에서 일어나자말자 여전히 빨간 토끼눈으로 영순씨가 다시 물었다.

“와? 또 잠을 못 잤나? 나는 피곤해서 정신없이 잤는데...”

“여보,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잠도 잠이지만 가슴이 울렁거려 터질 것만 같다. 또 자꾸 온몸이 깊이도 모를 어두운 수렁으로 빠질 것만 같다.”

“그라면 우짜겠노? 마음으로 이겨내야지. 아니면 오늘 신경정신과에 가보든지.”

“그기 아이고 어데 조용한 바닷가에 가서 빌어주었으면. 아무래도 아주버님이 너무 허무하게 돌아가셔서 이승에 아쉬움이 많은 것 같은 생각도 들고...”

“그래. 당신을 착하다, 예쁘다 커디마는 아직도 안 놓아주는 모양이지. 그러면 내가 내일 하루 휴가를 내고 올 테니까 기장쪽 조용한 바닷가로 가서 빌어주자. 삼색과일이랑 명태랑 향과 초, 제주도 준비하고.”

“알았어요.”

 

이튿날 준비한 제수를 차에 싣고 열찬씨내외는 동해남부선을 끼고 푸른 파도가 철썩이는 기장해변 향했다. 전에 무심회라는 모임에서 야유회를 나오면서 송정에서 연화리와 대변항을 빙 돌아 일광을 지나 특별히 누가 공원이라고 지정하지는 않았지만 해안도로 밑의 언덕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자갈이 깔린 해변에 용의 머리처럼 높고 우뚝하며 긴 꼬리를 거느린 울퉁불퉁한 바위가 여럿 바다에서 육지로 상륙이라도 할 듯 쳐다보고 깎아지른 절벽에 파도가 부딪혀 핥고 가면 크고 작은 바위에 붙은 파래와 미역, 모자반이 너불거리고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은 자갈바닥에 조그만 게와 갯강구가 황급히 숨고 물에 젖은 해국의 통통하고 낮은 줄기에서 기적처럼 노란 꽃송이가 얼굴을 내밀어 드문드문 구경꾼이 찾아오고 젊은이들이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기도 해 언제부턴가 <자연발생공원>이라 불리는 장소를 더듬기 시작했다.

일광역을 지난 승용차가 바닷가로 길을 잡아 주말마다 손님이 길게 줄을 서는 유명한 찐빵집을 지나 이천마을과 한국유리를 지나 이동항을 돌아 커다란 소나무가 늘어선 해안가를 돌자 마침내 눈에 익은 풍경이 펼쳐져 차를 세웠다.

평일이라 한적한 바닷가의 그중 웅장하고 긴 바위 턱에 촛불을 켜고 향을 켜고 삼색과일과 명태를 진설하고 제주 막걸리를 종이컵에 붓고 맥주도 한잔 따랐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신발에 물방울이 튀었지만 개의치 않고 절을 한 열찬씨가 “형님, 한 잔 하시고 다 잊어뿌이소. 평소에 아끼던 제수씨도 이제 그만 놓아 주이소. 오늘 저녁부터 저 사람 편하게 잠을 좀 자게 해주이소.”

영순씨에게 절을 하라고 하자 손을 흔들어 사양을 하면서 남은 막걸리를 부어서 바다에 뿌리며

“아주버님, 그만 다 잊어뿌고 좋게 가이소.”

영순씨 눈에 또 물기가 비쳤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