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361)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7장 고독한 천재의 죽음⑥
대하소설 「신불산」(361)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7장 고독한 천재의 죽음⑥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01.16 07:10
  • 업데이트 2023.01.15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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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독한 천재의 죽음⑥
- 아침마당출연

“자, 한잔 무라. 인자 속이 좀 후련하나?”

바닷가로 철수해 술상을 벌인 열찬씨가 맥주를 조금 부어 건네주자 

“글쎄요. 가슴이 좀 뚫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뭔가 좀 편안한 것 같기도 하고.”
“거 봐라. 모두가 제 마음먹기에 달린 거지. 인자 다 잊어뿌라. 형님도 그래 알고 더는 안 나타날 끼다. 가다가 시원한 복국이나 먹고 갈까?”
“그라든지.”

모처럼 부부가 마주 보며 편안하게 웃는데 순간 열찬씨의 옆구리에 매단 삐삐가 요란하게 울었다. 일광역 못 미쳐 대복이라는 커다란 복국 집에 자리를 잡고 사무실에 급한 일이 있나싶어 전화를 돌려보니 뜻밖에도 KBS 방송국의 PD였다. 
 

모레 금요일의 <아침마당> 생방송 출연준비는 잘 하고 있냐는 말에 집안에 상이 생겨 지금 그럴 처지가 아니라고 해도 한번 잡힌 스케줄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뭣하면 내일 두 분이 방송국으로 잠깐 와서 어떤 복장으로 어떤 포맷으로 줄거리를 잡아 무슨 이야기를 할 지 설명을 들으면 대충 갈피를 잡게 되니 아무 걱정 말고 출연을 하라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사양을 해도 보통사람들에게는 일생에 한 번도 오지 않은 아주 대단하고 뜻 깊은 기회를 왜 포기하느냐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절대로 안하겠다고 연신 팔을 저어보이는 영순씨를 못 본 척 마침내 이튿날 10시에 남천동의 방송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정작 출연이 확정되자 영순씨의 가장 큰 걱정은 방송출연 시에 무슨 옷을 입을 지였다. 방송국에 전화를 해보니 무슨 옷을 입어도 좋으나 평상복이나 양장보다는 아무래도 한복이 어울릴 것 같다고 했다. 한복이라면 7년 전 아버지진갑 때  맞춘 옷이 있었지만 하복이라 늦겨울에 맞지 않을 것 같아 새로 맞춰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영순씨가 친정 쪽 누군가의 혼수 감을 뜨러 부산진시장에 갔을 때 견본으로 걸어놓은 것이 마음에 꼭 들었다면서 그걸 사거나 빌리기로 하겠다고 했다.
 이튿날 방송국에 가서 담당 PD와 작가, 그리고 진행자 차경애아나운서를 만났다.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기는 했지만 자그마한 키에 동그랗고 오밀조밀한 얼굴이 천상 귀염상인 차경애 아나운서는 아무 걱정할 것 없이 그저 진행자나 패널이 유도하는 데로 자연스럽게 느낌이나 일상생활의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안심시키고 자리를 떴다. 
 
휴게실에 앉아 담당 PD와 작가, 영순씨부부가 장시간 입을 맞춘 것은 먼저 동장이라는 무겁고 딱딱한 이미지의 50이 다 된 공무원이 어떻게 이렇게 순수하고 감성적인 연시를 쓰게 되었는지, 또 그런 시를 접한 아내는 기분이 어땠는지를 물어보기로 했다. 

또 얼핏 생각하면 좀 이상하지만 언제나 현실에 집중하는 여자와는 달리 오래오래 첫사랑을 잊지 못 하는 사내의 속성상 연시를 쓰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밝고 부드러운 문학적 감성을 가진 공무원이 공무원조직자체에도 훈풍과 활력을 불어넣고 특히 목민관인 동장으로서 주민에게 더 쉽게 더 많이 어필할 것이라는 기본 포맷을 잡았다.  

그리고는 열찬씨가 아내에 대한 시 한 편을, 또 차경애아나운서가 시집 <비오는 날의 연가>에서 분위기에 맞는 시 한편을 골라서 낭송하기로 포맷을 잡고 미팅이 끝났다.

 

부산진시장의 진열대에 걸렸던 옷이라 그런지 영순씨가 빌려온 옷은 너무나 잘 어울려 한껏 젊어 보이고 귀부인의 자태가 풍겼다. 분장실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나오는 선녀 같은 영순씨에 비해 매인인 열찬씨는 너무 얼굴이 검고 이목구비도 뚜렷치 않아 도무지 태가 나지 않았다. 

스튜디오에는 사각탁자의 중앙에 차경애 아나운서가 앉고 왼쪽엔 열찬씨부부가 오른쪽엔 정신과의사와 여성운동가 남녀가 패널로 앉았는데 그날따라 화사한 한복을 입은 차경애 아나운서와 영순씨가 장미나 모란처럼 눈부신데 비해 나머지 셋은 빛을 잃는 형국이라 방청석의 여남은 명의 주부들이 주로 영순씨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뭐라고 수군거리는 눈치였다.

약속된 줄거리대로 차경애 아나운서가 먼저


못 이룬 사랑

꽃 한 송이 꺾어주지 못 했네
人形 하나 안겨주지 못 했네
혼자 애태우는 벙어리 사랑  
가슴속에 맴도는 안타까움뿐

그리고 세월이 흘러갔네. 
웃자란 그리움은 가지를 치고
늙은 그리움의 가지 끝에 
다시 안타까운 잎새가 돋고

사랑노래 한 절 부를 수 없네.
그냥 안타까이 늙어 간다네.
살아있는 한 그리움 있어
애태우며, 애태우며 살아간다네.  

 

차분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낭송하자 일순 분위기가 조용해지면서 두 명의 패널과 방청객들이 지그시 눈을 감고 음미하더니 마지막엔 짝짝 박수를 쳤다. 또 한참 이야기가 진행 된 뒤에 이번엔 시인이 직접 아내를 위해 쓴 시를 낭송하겠다는 멘트와 함께 열찬씨가 

 
 아내의 손

 뽀송뽀송 말랑말랑
 보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
 가로등 지나서야 살며시 잡던
 내 젊은 그 시절 당신 손에선
 황홀한 떨림과 가는 속삭임
 장미 빛 미래가 펼쳐지더니

 어느 듯 스무 몇 해
 찌개 끓이고 아이 보듬고
 흔들리는 남편까지 부축하면서
 물래 한 번씩 눈물 훔치며
 들풀처럼 덤덤히 시들었구나.

 생각해보면
 내 언 손을 녹여준 밤 그 얼마며
 잠 못 들어 뒤채며 끙끙 앓는 밤
 이불자락 여며주기 얼마나 될까

 새삼스레 낯익은 손 감추지 말게
 세월만큼 늙어온 손 더 고운 것을

 난 알고 있다네.
 내 여생 남은 행복 거기 있는 걸.

 

떨리는 분위기를 진정시키느라 다수 울렁울렁한 목소리로 열찬씨가 어제 밤에 급히 쓴 시를 읽어나가자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지면서 가늘게 떠는 영순씨의 손이 열찬씨의 시야에 들어오는데 하필이면 카메라 앵글이 그 떨리는 손을 잡고 있었다. 

순간 당황한 열찬씨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며 목소리가 울먹거려 겨우 낭송을 마쳤는데 방청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며 두 패널과 차경애아나운서도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무사히 생방송이 끝난 것이었다.

 

영순씨의 차로 부민동사무소에 열찬씨를 내려주어 사무실로 들어가는 데

“동장님!”

창구여직원들을 비롯한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며

“멋집니다. 관내 부녀회원과 통장, 유지들이 전화를 하고 구청민원실 텔레비전을 본 구청직원과 구민들도 난리가 났습니다. 축하합니다.”
“사모님이 너무 멋져요. 손은 또 어째 그렇게 희고 보드라운지.”

제가끔 한마디씩 던지는데 박문호동정자문위원장과 구영석구의원의 축하전화가 왔다. 
 

저녁에 마침 부부동반모임이 있어 국제신문사 아래 뷔페식당에 들렸는데 집에 도착하자말자 친구와 계원, 친정의 친척들로부터 여남은 통의 전화를 받은 영순씨의 표정이 상기되어 두 뺨이 발그레 익었다. 쟁반에 음식을 담아 테이블에 앉는데 지나가던 아줌마 서넛이

“아침에 텔레비전에 나온 아줌마네.”
“아이구, 손이 우째 저래 곱노? 아직도 영판 처녀손이네.”
“암만 시인이라 캐도 시커먼 남편보다 아깝다, 아까워!”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고 가고 같은 계원 부인네들도 부러워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기분 좋나? 인자 그 우울한 기분은 좀 풀맀나?”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