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고독한 천재의 죽음⑦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기분 좋나? 인자 그 우울한 기분은 좀 풀맀나?”
싱글싱글 웃으며 열찬씨가 묻자 한참이나 열찬씨를 쳐다보던 영순씨가
“내 얼굴도 검고 손길도 거칠고 성질도 급하고 돈도 못 벌고 또 맨날 술만 먹는 당신하고 벌써 30년을 살았는데 그래도 당신이 한번씩 이래 기쁨을 줘 고맙소.”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는지라
“오늘 말고 언제 또 좋더노?”
묻자
“알고 보면 당신도 참 괜찮은 남자라. 또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남자지. 당최 손끝이 야무치지 못하고 맨날 술을 먹어서 그렇지.”
“에이, 좋은 날이 많다면서 그 기 무슨 소리고?”
“참, 그렇구나. 우선 당신이 우리 아버지진갑잔치 차려주었을 때 너무 고맙더라. 그날 처음 당신이 태산같이 무겁고 시집을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사무관승진시험합격하고 출판기념회 두 번.”
“그렇구나. 또 있나?”
“울아부지 초상 때 앞뒤 두량 다 하고 태산같이 밀어붙일 때, 참 둘째 외삼촌하고 싸울 때는 정말로 든든하고 힘이 되더라.”
“아이구, 그만해라. 소쿠리뱅기 너무 타다가 땅에 떨어지겠다.”
“그라고 오늘, 오늘 정말 처음으로 시인의 아내인 것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다 들었어. 당신, 정말 고맙소.”
둘이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부터 영순씨는 숨소리도 고르게 깊이 잠이 들었다.
비로소 한숨을 돌리고 어느 해보다도 시끌벅적한 연말을 맞았다. 새로운 세기가 오고 새로운 밀레니엄이 온다고 했지만 열찬씨에게도 이제 마흔아홉이 끝나고 바야흐로 지천명(知天命)의 50대가 오는 것이었다.
마침내 2000. 1. 1. 아침이 밝자 열찬씨는 직원들과 지역유지들을 인솔해 송도 암남공원 매립지에서 열린 새천년 해맞이행사에 참석했다. 주관부서인 문화관광과에서 예측한 한 5백 명 미만 보다 몇 배나 많은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와 장사진을 치고 기념타월과 떡을 받다 중간에서 동이 나는 바람에 기다리던 사람들이 아우성을 지르고 행사장을 뒤집어버려 천년에 한 번 온다는 뜻 깊은 아침이 그만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민주시민이라는 것이, 동북아의 중심으로 21세기 세계경제를 이끌어간다는 경제대국의 자부심이 한갓 떡 한 조각, 타월 한 장에 휴지 쪽처럼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문화관광과 직원들이 당황해서 쩔쩔매는 동안 성질이 불같은 김모구청장은 못 당할 것 같으면 차라리 시작이나 말 것이지 어째서 수요예측, 그러니까 참석인원도 제대로 파악을 못 했느냐면서 불같이 화를 내며 김길탁 문화관광과장을 몰아붙였다.
제 1기민선 때 공천자 변모후보 측에 서서 충성을 다짐하고 개표장의 승리소식이 들려오자 재빨리 당선자의 사무실로 달려가 누구보다도 바짝 새 구청장의 옆구리에 붙어 서서 승리의 개가를 높이 외치며 논공행상에 빠지지 않더니 제2기 민선의 투표일까지는 여전히 공천자의 충복이다가 당락이 바뀌면서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취임식을 하기도 전부터 어느 새 새로운 구청장의 옆구리를 끼고돌며 심복임을 과시하던 비상한 적응력을 가진 김길탁 문화관광과장, 그러니까 열찬씨와 서울법학원을 함께 다닌 애증의 동료가 수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공식행사장에서 박살이 나는 것이 고소하면서도 안타까운 것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처럼 동쪽 하늘도 옅은 구름이 끼어 일출예정시간이 좀처럼 일출의 기미가 없더니 마침내 흐릿한 수평선이 붉게 타오르며 거대한 불덩이가 얼굴을 내밀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조아리며 절을 하거나 손을 비비며 저마다의 소원을 빌었다. 한순간에 못 받은 타월과 떡에 대한 아쉬움도 잊어버린 듯이.
행사장에서 돌아오면서 열찬씨는 이미 쉰이 되었는데 앞으로 남은 생이 얼마나 될까, 공자님이 제 스스로 죽을 날을 생각한 고종명(考終命)의 일흔까지 한 20년이 남았다면 그 사이에 자신이 이루어야 할 천명(天命), 즉 하늘이 내린 책무를 나는 알고나 있는가, 그리고 이룰 수는 있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이 쉰이 되도록 내가 이룬 것은 과연 무엇이 있는가? 가난한 유년기와 외로운 사춘기와 실패한 첫사랑, 휴학으로 좌절한 장취불성의 혼란과 좌절, 그리고는 너무나 일순간에 그 모든 꿈과 포부를 묻어버리고 현실의 삶에 투항한 영순씨와의 결혼과 아이들을 키우면서 살아온 소시민의 삶, 그리고 교통사고와 신체적 불구, 천신만고로 사무관이 되었지만 줄서기 실패로 인한 귀양살이의 수모, 비록 시인이 되었지만 신춘문예나 <현대문학>출신이 아니라고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은 아웃사이더.
50년간이나 살아온 인생의 성적표가 너무나 보잘 것 없이 초라한 것이었다. 그래도 살아야지, 무언가는 이루어야지. 자신만 바라보는 가족과 보잘 것 없는 시를 읽고 감동하고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지 생각하며 결국은 열심히 사는 그 자체가 바로 천명(天命)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튿날 여덟시 반에 간부공무원들의 신년하례식을 거쳐 아홉 시에 시무식이 열렸다. 동사무소로 돌아와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단체장들에게 새해인사 전화를 돌리는데 김부일 주임이 다급하게 동장실 문을 두드렸다. 열찬씨가 문화관광과장으로 발령이 났다는 것이었다.
오후 두 시에 발령장을 받고 별관 2층 문화관광과장실로 들렸는데 세무과장으로 영전한 김길탁 과장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이제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은 가열찬 시인께서 부임해서 문화관광과는 펄펄 날겠구먼. 아무튼 잘 해 보시오. 문화라면 열두 가지도 넘는 취미와 의욕을 가진 우리 영감님 맘에 쏙 들게 말이요.”
묘한 뉘앙스를 풍기며 자리를 비워주었다.
주무계인 문화계와 구정홍보를 담당하며 언론기관을 대응하는 공보계, 광고물관리계를 담당하는 문화관광과는 사무실이 좁아 가운데 메인사무실에는 문화계, 공보계과 과장실이, 좌측 협실에는 광고물관리계가 우측에는 기자실이 있는 기형적 구조에 십여 명의 직원들이 마치 삼국지의 군웅들처럼 할거(割據)하고 있는 이상한 배치였다. 열찬씨가 그간 동사무소와 중구를 돈 지가 6년이나 되어 계장급을 제하고는 거의가 모르는 직원들이었다.
언론동향을 담당한다는 이유로 문화관광과장은 매주 월, 수, 금 세 차례나 아침 여덟 시 반에 구청장실에서 여는 실, 국장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바람에 아침 여섯 시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부지런히 출근해야 하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전날 밤에 관내에 무슨 일이 있고 언론에 보도된 사건사고는 없는지 특히 구정의 행정동향이나 주요사업, 혹시 구청장의 동향이나 시책방향에 대해 부정적, 비판적 기사는 나지 않은 지 여덟 시경에 사무실에 도착해 30분 사이에 공보계주임이 요약해준 스크랩을 읽고 내용을 파악하고 비판적 기사에 대해서는 관련부서와 연락해 원인을 파악하고 대책을 새우며 필요하다면 공보계장을 신문사나 방송국의 출입기자에게 보내어 수시로 동향을 보고 받아 간부회의 석상에서 보고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보고 자료는 축제나 문화에 대한 것이 우선이 되겠지만 그건 문화관광과를 포함한 국 전제를 아우르는 총무국장이 먼저 보고해버리니 열찬씨 몫은 잘해야 본전인 언론보도사항이라 매번의 간부회의가 가시방석이었다.
그래도 신통한 것은 장수환이라는 공보계장이 아주 친절하고 공손하고 눈치가 빠르고 박기도 주임이 너무나 민활하고 부지런해 단 한 건도 놓치는 법이 없이 가자들과 언론동향을 파악하고 또 늦는 법이 없이 보고 자료를 챙겨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가장 힘든 일은 자식뻘인 젊은 출입기자들과 점심이나 저녁 술자리를 벌이며 너나 돌이 비슷한 조롱을 당해도 억지로 참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셔야하는 것은 자신이 워낙 술을 좋아해 그나마 견딜 만했다.
주무계 고명석 계장은 7급 공채출신이었는데 홀쭉한 얼굴과 메마른 체격에 두꺼운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허리가 좋지 않아 늘 찌푸린 얼굴로 허리를 감싸 안고 다녀 영판 식민지의 파리한 지식인이자 난해한 천재시인 이상(李霜)을 떠올렸는데
“고 계장, 내 당신의 허리가 낫는 법을 알지. 우짜든동 세월이 흘러 사무관이 되면 당장 낫고 말지. 지금은 유일한 약이 바로 사무관이야!”
열찬씨의 말에 마주보고 웃었다.
과 업무 전체를 총괄하는 문화계주무 정병진씨는 훤칠한 용모에 당당한 체구가 영화배우나 탤런트를 연상시킬 정도로 미남이라 여직원들의 인기가 높았다. 대부분의 미남이 까칠하고 게으르며 콧대가 세다는 속언을 뒤집기라도 하듯 성격도 부드럽고 공손하며 업무에도 긍정적인 마인드와 추진력을 가진 유능한 직원이었다.
새로운 직원들과 낮에는 업무계획을 짜고 밤에는 가끔 회식도 하며 단합을 다져 일욕심이 많은 김모구청장의 별별 오더를 처리했다. 직원들과 별도로 동장시절 눈에 거슬리던 운동회식의 구덕골문화예술제와 송도바다축제의 개선계획을 구상하는 사이 어느 새 설날이 다가왔다.
주로 언양의 할아버지제사를 지내고 선산을 둘러보던 명절제사를 이번에는 영주로 가기로 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