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363)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7장 고독한 천재의 죽음⑧
대하소설 「신불산」(363)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7장 고독한 천재의 죽음⑧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01.18 07:20
  • 업데이트 2023.01.18 1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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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독한 천재의 죽음⑧

주로 언양의 할아버지제사를 지내고 선산을 둘러보던 명절제사를 이번에는 영주로 가기로 했다. 형 일찬씨의 첫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대름 오능교?”

“섭섭하시지요?”

수인사가 끝나고 안방으로 들어가던 열찬씨가 흠칫 놀라며 문지방에 멈춰 섰다. 아무래도 방안이 너무 허전하고 생소한 것이었다.

“형수, 책장은 요?”

혹시 창고나 어디로 옮겨놓았는지 묻는데

“진작 없앴지요. 방 비잡은 데 내가 책장 그거 뭐 하구로?”

불안한 예감을 반증하듯 김해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라면 책은 요? 그 많은 책들은 다 우쨌단 말잉교?”

“책도 고물장사 줬지. 한 3천원 받았나...”

“그라면 일기도 쓰고 시도 쓰고 독후감도 쓴 그 두꺼운 수첩들은 다 우쨌능교? 설마 그것까지 다 버렸단 말잉교?”

“아따, 보리 주면 외 안 주나? 책 주면서 그것도 다 주었지. 그 케케묵고 골치 아픈 거 내가 마로 놔둘 끼고?”

“아니, 그 책들이 어떤 책들인데? 우리 형님이 평생을 읽고 쓰고 피땀이 배인 것들인데 그걸 우째 아무 상의도 없이 다 버린단 말잉교?”

형님 생전에 책을 못 내면 사후에 자신이 정리해서라도 책을 내겠다던 그 목숨처럼 아끼던 책이 아닌가? 비록 냉정하고 매몰찬 형님이지만 그 독후감을 읽고 정리하면서 그 날카로운 안목과 일목요연한 요약과 번뜩이는 지성을 발견하고 자신의 헝클어진 학문도 많이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열찬씨는 한없는 상실감, 열패감과 함께 밤새도록 줄담배를 피우고 목에 가래가 차서 꺽꺽거리면서도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여러 갈래의 책을 수준 높게 해설해주던 일찬씨의 모습이 눈에 선해

“아이고, 이 일로 우짜노, 우짜노? 죽 쑤어서 개 준다 카더니 남의 한 평생 노작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구나. 이 일로 우짜면 좋노?”

망연자실한 열찬씨가 김해댁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데

“내사 마 하나도 안 아깝고 속이 다 시원하다. 내 그 노무 책하고 일기장인가 신가 독후감 때문에 한 평생 소박데기대접밖에 더 받았나? 저녁밥 숟가락만 놓으면 책만 본다고 언제 지 마누라 얼굴 한번 쳐다보기나 했나? 지 마누라를 그 노무 책의 반만큼이라도 챙겼으면 내가 춤을 추었을 끼다. 아니 매일 업어주었을 끼다.”

입을 앙다무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분한 모양이었다.

“아이고, 이 일로...”

낭패한 열찬씨가 차근차근 방안을 둘러보니 평소 형 일찬씨가 앉은뱅이책상을 놓고 책을 읽던 아랫목에는 책상 대신 크고 화려한 침대가 놓여 머리맡의 거울이 번쩍번쩍했다.

그리고 책장이 놓였던 자리에는 갈색의 군용담요 한 장과 파란 화투 통, 유리재떨이가 놓인 것으로 보아 매일 고스톱 판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웬 깡통이 하나 있는 것으로 보아 그건 아마 개평을 담는 통인 모양이었다.

이어 울산의 백찬씨 가족이 도착하고 수원의 우현네 식구까지 도착하자 세 살짜리 아이에서 부터 중년에 이르는 무려 열한 명의 식구가 두개의 판에 둘러 앉아 저녁을 먹는데

“니는 직장 잘 댕기나?”

열찬씨 형제와 현우씨까지 남자끼리 따로 앉은 열찬씨가 조카에게 묻자

“예, 뭐 그냥...”

현우씨가 머리를 긁적이는데 순간적으로 쏘아보던 세 개의 눈빛, 김해댁, 영순씨, 상미엄마의 눈빛 중 상미엄마의 눈빛이 겁에 질린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무슨 미심쩍은 일이 있는가 싶어 열찬 씨가 숟가락을 놓고 소주잔을 채우는데

“잔아부지, 저는 감기기운이 좀 있어서...”

현우씨가 숟가락을 놓고 옆방으로 건너갔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방안공기에 아이들까지 숨소리를 죽인 식사가 끝나고 우현이댁과 두 동서가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느라 부엌으로 들어간 사이에

“대름요.”

김해댁이 은근히 열찬씨를 바라보더니

“현우는 진작 직장 사표냈다 아이가?. 지 아부지 초상치고 첫 출근한 날 바로 사표를 내고 왔다 아이가?”

“아니, 젊으나 젊은 놈이 펀펀 놀면 식구들은 뭐 묵고살라꼬? 큰 아 상미는 인자 유치원 졸업하고 초등학교 갈 나이가 됐을 낀데?”

“당장이사 큰돈이 드나? 저거 아부지 퇴직금도 있고 또 지 퇴직금도 있고.”

“그라문 요새는 뭐하능교? 매일 방안에 처박혀서 알이라도 까능교?”

“몰라. 무식한 내가 아나? 상미애미 말로 뭐 주식인가 재태큰가 한다고 매일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산다카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한숨을 푹푹 내쉬는 형수의 표정이 너무 어두워

“혹시 그 새 뭔 일이 있는 거 아잉교? 주식에 몽땅 탕진하거나.”

열찬씨가 불안을 떨치지 못 하는데

“몰라. 무슨 떼돈이라도 벌 것처럼 큰소리 탕탕 치던 아아가 설 대목부터 저래 머리를 외로 꼬고 있는 것이 수상하긴 하지만...”

결국 둘이 한숨만 내쉬며 이야기를 마치자 그동안 한마디도 않고 눈만 반짝이던 백찬씨도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설날아침, 일찍 제사를 모시고 아침상에 둘러앉아 백찬씨의 주특기 백만 불짜리 비빔밥 한 그릇을 받아든 열찬씨가 지금 저승의 형님은 설날 떡국이나 먹었는지 언양의 두 형님 집에서는 차례로 제사를 모시고 형님들이 조카들을 이끌고 진장의 산소는 가는지 아버지어머니는 해마다 오던 자식 중 처음으로 단 한명의 아들도 찾아오지 않는 쓸쓸한 산소를 그냥 떠돌다 가시는가 생각하며 먹는 둥 마는 둥 하는데

“저 잔아부지!”

모처럼 고개를 든 현우씨가

“다른 집 장손들은 고향에 논밭도 있고 과수원도 물려받고 산도 많이 있다는데 우리 할아버지는 와 논밭도 하나도 없습니까?”

무슨 큰 발견이라도 한 듯이 묻는데

“니 그 기 무슨 소리고?”

어리둥절해서 무슨 말인가 생각하는 열찬씨보다

“우, 우현아!”

재빨리 말을 받은 백찬씨가

“니.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절대 안 되지!”

평소와 달리 단호히 자르는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아하, 그렇구나. 그 많은 전답과 집까지 팔아간 형수가 정작 우현이에게는 자신들은 부모재산을 하나도 못 받고 수많은 형제들을 건사하느라고 고생만 잔뜩 하고 어렵게 자수성가한 것이라고 말했구나. 비로소 짐작한 열찬씨가

“봐라. 현우야, 내 말 좀 들어봐라. 너거 할아버지가...”

입을 떼는 순간

“대름요.”

김해댁이 방금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은 낭패한 얼굴로 열찬씨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우현아, 그건 나중에 내하고 이야기하자.”

간절한 눈빛을 보내더니

“자, 어서 밥이나 묵읍시다.”

시선을 내리까는데

“잔아부지, 저는 속이 좀 안 좋아서...”

숟가락을 놓은 우현씨가 또 아랫방으로 들어갔다.

김해댁이 깎아주는 과일도 먹는 둥 마는 둥 열찬씨가 담배만 뻐끔뻐끔 피우다 소변을 보고 나오는데

“보소.”

문 앞을 지키던 영순씨가

“당신, 알고만 있고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마이소.”

하면서 귓속말로 속삭이는데 주식에 투자한 우현씨가 아버지의 퇴직수당, 위로금을 비롯한 5천만 원도 넘는 돈을 탕진하고 수원의 연립주택마저 잡혀 길거리로 나앉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대충 짐작하던 불안이 마침내 현실로 나타나자

“우짜겠노?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매듭이사 묶은 놈이 풀어야지. 내사 모리겠다.”

열찬씨가 허탈하게 대답하자

“당신, 이 판에 문자나 쓸 거요?”

영순씨가 입을 비죽거리는데

“그람 당신은 우짤 끼고? 무슨 용빼는 재주라도 있나?”

“....”

하릴없이 얼굴만 마주보다

“가자. 짐 챙기라!”

열찬씨의 호통으로 마무리되었다.

더 앉아있어 봤자 웃을 일도 없을 터 한시라도 바삐 이 갑갑한 집을 떠나 열찬씨는 구포의, 백찬씨는 청도의 처갓집이나 가는 게 상수라 싶었다.

또 손님이 어서 가야 동네 아줌마들을 불러 제사음식이나 나눠먹으며 이선생사모님으로 큰소리를 탕탕 치며 화투판을 벌릴 김해댁도 자신들이 나서기만 기다릴 것이 뻔했다. 눈치 빠른 제수씨까지 황급히 짐을 챙겨 대문을 나서는데 우현씨는 잠이 든 척 나오지도 않고 상미애미만 자신이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연신 물 묻은 손을 비비는데

“형수, 갈람더.”

그나마 가장 만만한 백찬씨가 말을 건네자 용기를 얻었는지

“데름, 보소!‘

김해댁이 울상을 한 얼굴로 열찬씨와 눈을 맞추더니

“우현이가 주식을 잘못해서 깡통을 찼답니더. 인자 곧 수원의 연립주택도 비워주고 길거리에 나앉는답니더.”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데

“...”

한참이나 쳐다보던 열찬씨가

“가가 나가 몇잉교? 지가 저지른 일 지 알아서 하겠지.”

고개를 돌려 승용차로 걸음을 옮기는데

“대름요!”

이번에는 한결 높은 목소리로

“사람이 길을 두고 뫼로 가능교? 그래도 돈 잘 벌고 출세한 잔아부지가 둘이나 있는데...”

“뭐요?”

방금 눈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열찬씨가 고함을 지르더니

“가자!”

집안의 전매특허, 난관에 봉착할 때 마다 소리치는 멘트를 발사했다. 이제 가장 나이 많은 사내가 된 열찬씨가 꺼내들 차례가 된 것이었다 쾅. 자동차 문을 닫으며

“작은 아부지는 어데 아부지 아이가?”

자신이 고함으로 잘라버려 김해댁이 못 다한 대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음력설이 지나고 불과 20일 남짓한 정월 스무사흘 날이 아버지의 기제사라 열찬씨내외는 미처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영주를 향할 판이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