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고독한 천재의 죽음⑩
넋을 잃고 쩔쩔 매는 우현씨댁을 영순씨가 도와 저녁상을 차려 식사가 끝나도록 우현씨는 나타나지 않고 아이들도 낯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무서운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장손이 나타나지 않아 어쩌면 수원의 첫제사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를 하면서도 아무도 내색은 않고 잠자코 백찬씨와 영순씨가 밤을 치고 오징어와 찐 달걀을 다듬으며 제수를 준비하고 열찬씨가 지방을 쓰는데
“우리 통닭 한두 마리 사다 묵으면 안 되겠나? 이집 제사상에 올라간 통닭 기다리다간 목 빠져 죽겠더라.”
순찬씨가 과일, 떡과 함께 놓인 제사상에 올라갈 통닭을 보고 말했다. 전에 영주에서 끝끝내 맛도 못 본 통닭이 떠올라 괜히 김해댁에게 시비를 걸어보는 것을 눈치 챈 영순씨가
“질부야, 우선 통닭 두 마리 시켜라. 돈은 내가 주께.”
해서 배달된 통닭을 한 조각씩 뜯고 열찬씨는 소주잔을 채우는데
“올케야, 내 앞으로는 이 먼 제사에 다시 올지 안 올지도 모르겠고 기왕 온 김에 내 한 마디만 하고 가자. 우리 일식이아부지나 오빠가 이래 허무하게 죽듯이 나도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운을 떼자 덕찬씨와 열찬씨가 걱정스레 쳐다보는데
“내 골 아픈 이바구는 안 한다. 내가 뭐 친정조카 빚 갚아줄 돈도 없고. 이건 내가 가슴에 품고 죽기에는 너무 억울한 이야기다.”
작심한 듯 눈에 힘을 주며
“내 향산할매의 소개로 부산보수동에 어느 할매집에 식모살이를 할 때지. 죽은 영감이 한약국을 해서 집도 잘 살고 할매도 어질고 후해서 열다섯 살인 내가 머리에 털 나고 처음으로 삼시세끼 밥걱정 없이 살아 얼굴이 반질반질 하고 촌 때 를 다 벗었다고 할머니가 웃었지. 그 때 국제시장 건너 헌책방에 가까운 우리 집 담 앞에 가끔씩 진주에서 왔다는 배가 복지처럼 나오고 이마가 중놈처럼 벗어진 영감 하나가 오전 열한 시쯤에서 해질녘까지 갑바쪼가리를 펴고 장사를 하는데
“자, 고약이 왔소. 환약이 왔소. 만병통치 명약이 왔소. 자 지나가는 아저씨, 아줌마, 할아버지, 할머니, 새댁이, 새신랑 잠깐만 걸음을 멈추고 한번 들어나 보소. 이 고약과 환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저 민족의 영산 지리산 뱀사골에 산삼뿌리가 썩은 약수 물을 먹고 산 개구리와 산새와 새알과 쥐와 다람쥐를 먹고 산 살모사, 까치독사, 칠점사, 흑질백장 독사에다 바다건너 제주도 한라산에 백년에 한번 꽃핀다는 백년초 열매에다 강남 갔던 제비가 산다는 태국이나 인도나 호주, 그러니까 흑국놈이나 인도지가 산다는 땅의 용안육을 넣은 천하명약이라 한평생 노동으로 손가락, 발가락, 허리어깨팔다리 뼈마디마디마디 골병이 들고 천만, 폣병, 황달, 흑달로 복수가 차고 숨넘어가는 사람도 이 환약 한 호콤만 먹으면 금방 번쩍 눈을 뜨고 흔디, 부스럼, 무좀, 건선, 백선, 치질, 치루, 치질, 대상포진에 눈에 다래끼, 거짓말 하다가 입에 솔이 난 사람도 이 고약 한 방울만 바르면 순식간에 씻은 듯이 나아 명주고름처럼 피부가 하얗고 부드러워져 여자는 길가는 남자들이 쳐다보고, 남자는 빨래하는 여자들이 모두 쳐다보는 이 천하명약이지요. 자! 날이면 날마다 오나, 밤이면 밤마다 오나, 이 봐라, 아아들 하고 학생들은 좀 빠지고 숨넘어가는 사람도 금방 살리는 환약 한 봉지, 고약 한 통이 단돈 3백 원이니...”
청산유수로 밑도 끝도 없이 지껄이던 아부지 나이 또래 영감이 있었지. 하루는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져 영감이 황급히 전을 걷고 사라져 집 안팎이 고요했는데 마침내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이자 싱싱한 제주갈치찌개를 먹고 싶다는 주인할매의 심바람으로 시장을 보러 대문을 열고 나갈 때 말이야.
대문 앞에 웬 담배쌈지 같은 것이 하나 떨어져 있어 무심코 집어보니 글쎄 그게 담배쌈지가 아니고 돈주머니였어. 가슴에 쌍방망이질을 하듯 두근거리고 눈앞이 아찔했지.
일단 대문 안으로 들어와 연탄창고 모퉁이에서 돈을 꺼내 세어보니 빨갛고 파란 지폐가 모두 2만 환이 조금 넘었어. 아직 화폐교환 전이었지만 아마 지금 돈으로 50만 원이나 100만 원에 가까운 큰돈이었어.
틀림없이 진주에서 온 약장수영감의 돈주머니로 소나기로 전을 걷을 때 황망 중에 잃어버린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지. 지금쯤 돈주머니가 없어진 줄 알았으면 얼굴이 사색이 되어 옛날 우리 아부지가 언양장 닭 전에서 닭싸움을 붙이다가 부산 깡패들에게 거덜이 나고 억장이 무너져서 갱빈 자갈밭에 넋을 놓고 누워서 한숨만 푹푹 쉬며 하늘만 바라보던 그런 심정이란 생각이 들었지. 그래도 왠지 모처럼 생긴 거금을 놓고 싶지는 않았어. 일단은 주머니를 치마 속에 깊이 숨기고 시장을 봐서 돌아와 대문을 열려는데
“찬아, 찬아, 금찬아!”
귀에 익은 목소리로 누가 불렀지만 나는 방금 약장수영감이 돌아온 것 같아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서니 뜻밖에 거기에 일찬이오빠가 서 있었어. 열아홉, 한창 나이에 정신이 없어서 천지강산을 떠돌며 온갖 엉뚱한 짓을 하다 마침내 그 한겨울에 집을 나가 따라가던 열찬이가 얼어 죽을 뻔한 그 때였던 모양이었어.
“어, 오빠!”
반갑기도 했지만 하도 행색이 험해서 차마 집으로 들어가자는 말도 못 하고 한참이나 마주 바라보다
“오빠, 밥은 묵었나?”
“뭐, 밥이라? 밥...”
흐릿한 눈빛으로 말을 흐리는 모양이 며칠이나 굶은 것 같았어. 순간
“자, 오빠. 이 돈으로 밥이나 사무소!”
나도 모르게 돈 줌치를 건네주었는데
“그래, 고맙다. 잘 있어라!”
줌치를 받은 오빠가 성큼성큼 헌책방골목 쪽으로 걸어가는데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내가 앗차, 싶어
“오빠!”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도 이미 찾을 수가 없었어.
밤새 가슴이 벌렁거려 한 숨도 못 잔 내가 이튿날 점심때쯤 대문 밖을 내다보는데 마침 그 약장수영감이 담 밑의 하수구구멍에 엎드려 꼬챙이를 넣어 휘휘 젓다가 죽을상을 하고 일어나 손을 탁탁 털며 먼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
좌우간 그 날 이후로 그 불쌍한 약장수영감은 다시 보이지 않았어. 나는 애써 그 영감을 잊으려고 노력했지. 난 절대로 돈 줌치도 아무것도 안 조았다, 그리고 오빠도 누구도 오지 않았고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단지 뭔가 착각이다, 이건 내가 잠시 정신이 없었거나 어디에 홀린 거다, 그렇게 자꾸만 내 마음을 단속하며 5년이나 지나서 마침내 그 생각이 거의 잊어질 때 쯤 불현듯 다시 생각이 났어. 그게 말이야.
흐릿한 과거를 더듬던 금찬씨의 눈이 다시 반짝 하면서
“그건 내가 우리 일식이아부지하고 혼담이 성립되어 사성이 오고 봉채가 오고 상 이불을 만들며 시집갈 준비를 할 때였지. 박정희 대통령이 울산에 공업단지를 만들고 국토개발사업을 벌이면서 살기가 훨씬 나아지고 있었어.
그 때까지만 해도 해마다 봄이면 양식이 떨어져 쑥을 뜯고 송기를 벗겨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티던 사람들이 보리이삭이 패자말자 겨우 물이 조금 잡히는 이삭을 따다 절구에 찧어 질척거리는 풋바심을 만들어 먹으며 비로소 한숨을 돌리던 형편이 슬슬 풀리기 시작할 때였지.
이젠 가까운 울산의 공장으로 취직을 한 사람이 생겨 농사가 없거나 적어 펀펀 놀던 사람들이 한 달에 쌀 몇 가마니 값을 월급으로 받는다는 사람도 있었고 자조근로사업이라고 한 이틀만 남천내에 방천을 쌓거나 봉골산, 옥산에 사방공사를 하면 미국사람하고 한국사람이 악수를 하는 그림이 있는 포대의 밀가루를 한 포대씩 주는 바람에 수제비, 국수, 밀떡, 쑥털털이, 정구지털털이를 어렵잖게 먹으니 밥 굶는 집이 없어졌지.
하다 못 해 여기저기 공장을 짓고 길을 낸다고 태화강 80리에 지천으로 깔린 모래자갈도 다 돈이 되는지라 버든사람들은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삽 하나, 철망달린 채 하나면 하루에 몇 루베씩 모래자갈을 걸러 팔아 집집이 담을 고치고 라디오를 사고 장날이며 내남 할 것 없이 고기 굽고 지지는 냄새가 담을 타넘어 온 동네가 잔칫집 같았지.
그야말로 박정희 대통령의 말마따나 진짜 반만년 묵은 보릿고개가 없어지는 모양이었어. 서울 부산 대구가 아닌 언양같은 반촌에서도 연애결혼을 하거나 예식장에서 신식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구식결혼을 하는 경우라도 신부 집이 엔간히만 살면 신랑의 양복과 구두 한 벌은 해 주는 것이 유행이 되고 노마이라고 불리는 양복을 받느냐 마느냐에 따라 처가가 잘 사느냐, 못 사느냐 또 장가를 잘 가느냐 못 가느냐로 가름이 되는 판이었지.
비록 우리 집이 농사도 적고 아버지도 병들었지만 장남인 오빠가 공부도 잘 하고 농협이라는 좋은 직장에 댕겨 한 달에 쌀 몇 가마니 값을 받는 판이라 우리 일식이아부지는 당연히 처가에서 양복과 구두를 받을 것으로 짐작했고 중신쟁이 상사이할매도 아마 오라비가 노마이쯤은 해줄 것이라고 했단다.
그런데 결혼 날이 다 되도록 아버지는 물론 오빠한테서도 일절 말이 없었지. 하도 답답해 엄마한테 이야기하니까
“이년이 친정 기둥뿌리 뺄라카나? 아직 어린 열찬이, 백찬이 공부시키기도 힘든 판에 니하고 덕찬이 노마이 해주면 집구석이 전디겠나?”
사정없이 등짝을 후려치는 것이었어.
울어도 시집은 가야된다고 그렇게 빈손으로 시집을 갔는데 한 두어 달이 지나자 우리 일식이아부지가 술만 채면 그놈의 노마이이야기를 꺼내 내가 참 고개를 들 수가 없었지.
그런데 그 때까지만 해도 아침마다 밭둑 밑에 새미물을 여다 묵는데 하루는 골티 대밭 집 도산댁이가 장에 가서 들었다면서 배낸가 모단인가 어느 동네에 없는 집 딸이 시집오면서 신랑 양복을 못 해 왔는데 신랑은 물론 시어마시, 시누들이 날마다 들먹이며 하도하도 구박을 해서 그만 감나무에 목을 매고 죽었단다. 그래서 초상날 처가집안의 총각이란 총각들이 다 몰려와 행상을 따라가며 “노마이! 노마이!”하고 울었다는 이야기에 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지.
말이사 바른 말이지 우리 시 할매가 좀 무섭고 심청궂은 사람이며 시누이 하나 있는 것은 아직 어리고 한 집에 안살아 괜찮지만 다섯이나 되는 시고모들이 여간 별난 사람들인가?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