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9일 영광도서 8층 대강당에서 목요학술회 창립 43주년 토론회와 함께 송년회가 열렸다. 토론에 앞서 노무현 청와대 정책실장을 역임하고 보수와 진보를 넘나드는 지식인으로서 윤석렬 대통령의 숨은 조언자로 알려진 김병준 교수의 특강이 있었다.
‘왜 자유인가?;새로운 레짐을 향한 질문’이라는 주제 강연을 아래에 정리했다.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흔히 조선이 당쟁과 세도정치 때문에 어려워졌고, 결국 이 때문에 남의 나라에 나라를 빼앗기는 ‘망국’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대원군과 명성황후, 그리고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매국노들 때문에 망했다고 한다. 틀린 말 아니다. 과도한 분열과 대립, 시대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 지도자들, 그리고 이들 ‘매국노들’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당쟁과 세도정치가 없고, 이들 지도자들이나 매국노들이 없었다면 조선은 건재했을까? 임진왜란 전후부터의 그 ‘나라도 아닌 나라’꼴을 면할 수 있었을까?
왕정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국가가 다룰 정책문제가 적고, 그 내용과 구조 또한 단순한, 이를테면 단순 농경사회 같은 시대에나 가능한 체제이다. 상공업이나 유통경제가 발달하고, 그 결과 국가가 다룰 문제가 많아지고 어려워지는 상황에서는 존립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당장 의사결정의 질을 보장하지 않는다. 세습체제인 만큼 왕이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되는데, 그 역량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위 정책결정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신분질서에 입각해서 이루어지다보니 충원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귀족끼리 나누어 먹듯이 하는 경향도 있다 보니 적재적소의 인사원칙도 지켜지지 않는다. 체제가 온전하게 작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안 되는 집안에 자식들 간 싸움이 잦듯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분열과 대립이 극심해진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고, 또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워야하기 때문이다. 당쟁만 해도 바로 이런 과정에서 생겨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망국의 원인이기에 앞서 말이다. 세도정치도 마찬가지,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권력을 잡아야 하는 상황, 이것이 곧 세도정치라는 패권정치로 연결된다.
세계 역사를 보라. 상공업과 유통업의 발달 등, 농경사회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왕정은 모두 무너졌다. 중동 일부 국가들과 같이 자원이 풍부하고, 그리고 이로 인해 정책역량과 관계없이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상황이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 그 어떠한 국가도 왕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를 ‘레짐’regime의 문제라 부른다. 레짐은 정권, 정부 등으로 번역되지만 사실은 그 보다 훨씬 더 넓고 큰 의미를 지닌다. 특정 체제와 이를 유지하게 하는 규범과 관습 그리고 정치문화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경우 왕정이라는 체제가 바로 그 레짐의 근간이었고, 이를 유지하게 하는 유교적 이념과 관습 등이 모두 그 뿌리 내지 내적 보호막이었다. 동인이 집권을 하건 서인이 집권을 하건, 또 안동김씨가 집권을 하건 풍앙조씨가 집권을 하건 왕정이라는 레짐은 변화가 없었다. 누가, 어느 쪽이 정권을 잡든 나라는 시대착오적인 레짐과 함께 몰락의 길을 수밖에 없었다. 또 그럴수록 분열과 분쟁, 그리고 패권주의는 더욱 극심해졌다.
조선에도 이러한 레짐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도 있었고 인물도 있었다. 인물로 말하자면 ‘천하공물론’과 대동계로 공화정에 가까운 사상을 가졌던 정여립과 자유주의적 사고로 신분질서 타파를 실천에 옮겼던 허균과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했나. 정여립은 1천 명 이상이 죽임을 당했던 ‘기축옥사’의 원인이 되었고, 허균은 사지와 머리를 찢어 죽이는 ‘능지처사’를 당했다.
왕정이라는 체제와 이를 지지하는 규범 관습 문화 등, 즉 레짐은 그렇게 강했다. 불행하게도 말이다. 조선 후기 수백 년 동안 죽지도 않고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는 일종의 ‘좀비’가 되어 백성의 삶을 피폐할 대로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결국 명치유신을 통해 ‘막부’라는 세습통치의 레짐을 해체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광복 이후의 ‘레짐’
왜 과거 역사를 이야기하는가? 오늘날에도 우리의 발목을 잡는 잘못된 레짐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국가주의 레짐,’ 즉 국가권력이 이 곳 저 곳 우리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체제와 이러한 체제를 당연히 여기는 인식 관념 문화의 문제이다. 한 때는 머리의 길이, 치마의 길이를 국가가 규제하고, 밥에 잡곡을 얼마나 넣어 먹어야 하는지도 국가가 규제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는 훨씬 자유롭다.
그러나 국가주의 레짐의 뿌리는 여전히 강하다. 일례로 교육문제를 보자. 국가가 교사의 자격을 규정한다. 또 무엇을 몇 시간 가르칠 것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방법도 규정한다. 국가가 정한 규칙을 위배하면 학교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에 따른 제재가 가해진다. 의무교육의 밖으로 쫓겨나 일체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 교사든 학생이든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 물어보자. 국가기구인 교육부가 미래에 어떤 산업이 성장하고 가라앉을지, 우리에게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 그에 따라 어떤 선생님이 필요하고, 학생은 어떤 자질과 능력이 필요한지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 교육부에 자문하는 교육전문가들이 잘 안다고? 그럴까? 그들이 뭘 공부하고 무슨 일을 했는데, 현장의 전문가들도 모르겠다는 우리의 경제와 산업 그리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미래 인력수요를 다 안다는 말인가?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 아닌가? 이런 세상에 누가 무엇을 얼마나 알아서, 무엇을 몇 시간 가르치라 말하고, 교사자격을 지금처럼 엄격히 규정한다는 말인가?
언젠가 핀테크로 성공한 기업의 젊은 CEO가 한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의 말이 가슴을 찔렀다. 혁신적 금융기업을 시작했는데, 국가의 과도한 규제로 인해 수 없이 좌절해야 했다고... 규제가 그렇게 강한 줄 몰랐기 때문에 시작했지, 만일 그렇게 강한 줄 알았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그런 줄 몰라 시작했다니... 그가 일으킨 기업은 그나마 대통령까지 나서 문제를 푸는 등, 우여곡절 끝에 오늘의 성공을 이루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또 스타트업 기업들이 ‘그런 줄 알기 때문에’ 시작도 못하고 있을지를.
어디 이 뿐이겠나.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배임죄 등, 개인과 기업의 행위를 과도하게 규제하는 법과 제도가 널려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에 너와 나, 그리고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있고, 그 결과에 관대하다는 것이다. 당연히 시민사회 스스로 자율적으로 해결할 일도, 또 시장의 자율적 정화능력이 자라게 되어 있는 일도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인식한다.
예를 들어보자. 지난 대통령 선거기간에 윤석열 후보가 불량식품에 대한 규제가 과하다고 한 발언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시민사회단체와 언론 등이 ‘그러면 불량식품을 먹어도 좋다는 말이냐?’비판과 비난을 했다. 일반 국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윤 후보의 뜻은 ‘먹어도 좋다’에 있지 않았다. 국가의 규제가 완화되게 되면 소비자가 들고 일어나게 되어 있고, 학부모나 선생님들이 들고 일어나게 되어있고... 그래서 국가규제 보다 더 강력한 자율적 사회규제가 지역과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영되게 된다는 뜻이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자율적 정화역량을 부정하고, 또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부정하고 국가에 의한 통제에 의존하는 것일까? 개인이고 기업이고 국가가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그 속에는 국가주의 속에서 우리도 모르게 자라난 우리 스스로에 대한 부정이 있다. 사납고 이기적이고 어리석고... 그래서 국가가 감독하고 규제하고 교육하고 해야 하는 존재로 우리 스스로를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바로 레짐의 문제이다.
국가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가?
국가주의 레짐이 늘 부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한계가 뚜렷했던 시절 이를 통합적으로 관리하고 키우는데 있어 긍정적 역할을 했다. 소위 ‘추격[fast following] 경제’의 시기에 있어 우리의 경제와 산업을 키우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선도[first moving] 경제’의 시대다. 어디로 갈 지, 또 무엇을 해야 할 지 너도 나도 확신이 서지 않는 상황이다. 당연히 자유주의 정신에 입각한 창의성과 상상력, 그리고 도전정신이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게 된다. 국가가 우리를 규제하고 감독하고 교육하고 등록시키고 승인하고 허가하고 감시하고... 하며 이끌고 갈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에 더해 국가주의의 몸체라 할 수 있는 국가기구는 더 이상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통령만 해도 그렇다. 흔히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졌다고 하는데 이는 현실과 많이 떨어지는 이야기이다.
일례로 대통령에게 산업구조 조정을 할 수 있는 힘, 노동개혁 연금개혁 금융개혁 인력양성체제 개편 등을 적기에 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대통령에게 이러한 힘은 없다. 산업구조조정의 문제만 해도 그렇다. 과거 같으면 이 기업 저 기업에게 반도체 하라, 조선 하라 강제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대통령실 행정관이 기업에 전화 한 통화 한 것이 ‘게이트’가 되는 시대이다. 무슨 일을 그렇게 밀어붙일 수 있겠나. 게다가 노조든 언론이든 시민단체든 그 힘은 커질 대로 커져있다. 게다가 법 하나 만드는데 평균 3년 안팎이 걸리는데다 툭하면 여소야대 정국이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뭐 그리 많겠나.
국회가 지닌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흔히들 사람의 문제라 하는데 사실상 문제는 그 이상이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면 국회라는 기구 자체가 농경시대의 유물이다. 즉 정책문제의 수가 적고 이해하기도 쉬운 시대, 또 별로 급할 것이 없는 문제가 대종을 이루었던 시대의 기구라는 말이다. 지금은 신속성을 요하는 문제나 이해하기도 힘든 문제가 대량으로 발생하고 있고, 이들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서로 부딪치고 있다. 심의하고, 숙고하고 다투고 대립하고... 본질적으로 의사결정의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고, 또 쉽게 이해관계 집단에 포획될 수밖에 없는 기구인 국회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관료기구 또한 마찬가지이다. 장기집권이 가능했던 권위주의 시대에는 권력의 보호 아래 과감한 일도 스스럼없이 처리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법령 규칙 규정 등이 모두 관료에게는 지뢰로 작용한다.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욕구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복지부동이나 보신주의가 하나의 큰 경향으로 나타나게 된다. 아울러 권력으로부터의 보호막이 약화되면서 외부의 이해관계 세력에 쉽게 포획되기도 한다.
한 마디로 국가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미국이나 유럽 등의 다른 나라 같으면 대통령과 의회의 권력을 지방으로 분산시키며, 또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조합주의 기구나 독립규제위원회 등에 분산시키며 국가기구들이 가진 이러한 문제를 완화시키고 있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도 못하다.
이 작동하지 않는 국가기구 안의 구성원들은 어떠한 행태를 보이겠는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잘 풀리지 않는 집안일수록 말썽도 많고 싸움도 많다. 신분이 보장된 관료는 책임을 회피하는데 엄청난 에너지를 쏟고, 표를 먹고 살아야 하는 정치인들은 끼리끼리 뭉쳐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대중을 선동한다. 또 국가의 미래가 어떻게 되건 돈을 뿌리며 매표행위를 한다. 작동하지 않은 국가주의 체제와 문화 속에서 패권주의와 대중영합주의가 자연스럽게 자라난다. 왕정이라는 ‘좀비’레짐 아래 당쟁과 세도정치가 자라고,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가진 지도자들이 출현했던, 그 때 그 모습 아닌가.
새로운 레짐을 향하여
국가권력을 줄여야 한다. 국가권력이 줄면 정치의 영역도 줄어들고, 궁극적으로는 정치도 줄어든다. 그러면서 국가기구의 활동도, 또 정치도 정상화 될 수 있다. 만성 소화불량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국가권력이 줄면 국민은 그만큼 자유로워진다. 자유로워진 우리 국민은 스스로 가진 혁신역량을 한껏 발휘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더 세계의 중심을 향해 한 걸음 더 크게 나아갈 수 있다. 온 세계가 힘들어 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어려울 때일수록 혁신역량이 빛을 발하는 법 아니겠나. 혁신역량이 높은 국가와 국민에게는 오히려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국가의 역할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개인과 기업의 이기심이 공적 가치 창출로 연결되곤 한다고 해도, 자유주의 체제가 가지는 결함은 분명하다. 빈부격차가 심화될 수도 있고, 있는 사람의 힘이 없는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국가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자유’의 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자유를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적은 불평등과 불공정 등이다. 자유를 부정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언제 그 세력을 키워나갔나. 빈부격차가 심한 상황이나, 공정과 상식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이다. 따라서 자유를 강조할수록 우리는 적절한 분배와 정의, 그리고 공정과 상식 등의 가치와 이를 위한 국가의 역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솔직히 이 점에 있어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에게는 큰 문제가 있었다. 불평등 불공정 등의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진보가 내어 놓는 사회정책 등에 있어서도 ‘퍼주기’라며 비판만 했지, 자유주의 버전의 분배정책을 내놓지 못했다. 공정과 정의를 위한 정책도 내놓지 못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제대로 된 자유주의자도, 제대로 된 보수주의자도 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부터라도 그만큼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레짐 체인지의 꿈?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35번 ‘자유’를 외쳤다. 그러면서 분배와 형평, 정의와 공정의 가치도 함께 천명했다. 그리고 광복절 기념사에서 다시 자유를 33번 언급했다. 대통령의 외침은 국가주의적 틀을 벗어나자는 것이다. 국가주의의 틀 안에 있으면서도 이를 인식하자는 못하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자는 뜻이다. 대통령 스스로 이야기하지 못하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이것은 ‘레짐 체인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국가주의적 Ancient Regime을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만들자는 선언이다.
이러한 뜻은 우리 사회에 잘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여당인 국민의힘과 내각, 심지어 대통령실조차 이에 대한 이해와 논의가 있는 것 같지 않다. 대통령의 외침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최소한 심각한 고민은 있어야 할 터인데, 그러한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먼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등 자유란 말이 우리 사회에 너무 많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늘 듣던 말 아니냐 하고 가볍게 넘어가 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또 하나,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국가주의 자체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또 과거에 비해 그나마 좀 나아진 상태에 있다 보니 지금보다 더 자유로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또한 국가주의 레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잠시 옆으로 가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몇 년 전 있었던 국정교과서 논쟁을 잠시 불러와 보자. 한마디로 몹시 당혹스러웠다. 소위 보수집단이 국정교과서를 찬성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보수의 기본가치는 자유인데, 사람의 역사관을 국가가 좌우하게 한다? 이게 말이 되나?
진보성향 교과서에 문제가 있다면 그 보다 더 설득력 있는 보수 교과서를 만들어 경쟁을 시키는 것이 맞고, 진보교사들이 진보교과서를 채택하는 것이 문제라면 학부모 등이 교과서 채택과정에 간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맞다. 그런데 이런 자유주의 방식을 두고, 국가가 국민의 역사관을 획일화시키는 국정교과서 방식이라니? 그것도 늘 자유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보수가... 실제로 국정교과서가 만들어진다고 하여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전교조를 비롯한 진보세력이 10권, 아니 100권의 대안교과서를 내어 놓고, 또 이를 가르칠 텐데... 이들 모두를 형무소로 보낼 것인가? 그럴만한 체제역량이 있기는 하나?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국가주의 레짐이 이렇게 강하게 살아있어서일까. 윤석열 대통령의 이러한 외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여당 곳곳에서 국가주의적 징후들이 나타나고, 그 결과 대통령이 외치는 ‘자유’의 뜻이 흐려지고 있다. 당연히 국민은 혼란스럽다. 정부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무엇이냐 묻고 있고, 심지어 뭘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무철학’의 대통령이라는 비판과 비난도 나온다.
맺으면서
레짐 체인지, 체제와 그 체제를 유지하게 하는 우리의 인식과 규범 그리고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자유주의의 원칙 아래 자기책임과 자율의 논리가 지배하고, 그 위에 분배와 형평, 정의와 공정이 자리 잡는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 툭하면 국가기구를 불러내는 우리의 생각과 인식 그리고 관념과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 대단하고 위대한 국민의 상상력과 창의력, 그리고 열정과 도전정신이 그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투명성과 참여가 쉽게 확보될 수 있는 정보화 사회이자 네트워크 사회이다. 기업이 소비자와 채권자 그리고 투자자와 주주에 책임을 지고, 학교가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직원 등의 학교공동체에 책임을 지고, 지방정부가 주민에 책임을 지는 세상... 그리하여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기업 하나 하나, 지역공동체 하나하나가 스스로 가진 역량을 한껏 발휘하는 자기책임과 자율의 세상... 이런 세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국가주의 ‘좀비’가 이 위대하고 대단한 대한민국 국민의 발길을 가로막게 해서는 안 된다.
<국민대 명예교수>
<정리 : 김 영 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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