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물膳物과 뇌물賂物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뇌물은 대가를 기대하거나 지나간 대가에 대한 대가로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뇌물은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선형線形적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이때 원인은 결과보다 먼저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뇌물은 서로 비교된다. 비교는 우열優劣이라고 하는 ‘위계’位階를 낳는데 그 위계의 힘이 관계를 짓누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흔히 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대부분 ‘뇌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때 뇌물을 주고받는 관계란 ‘교환交換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교환은 반드시 ‘사적私的 소유’가 선행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자기 것을 남에게 주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이게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는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뇌물이 갖고 있는 ‘모순’을 여지없이 드러내게 된다. 하지만 뇌물과 달리 선물은 그런 관계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가령 예수의 정의[가령 사랑, 은혜, 선물, 용서, 구원]는 그가 ‘갖고 있던 걸’ 우리에게 주는 ‘뇌물의 방식’이 아니었다고 알고 있다.
예수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 늘 ‘너의 믿음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게 예수가 정의를 우리에게 주는 방식이다. 그것은 내가 갖고 있던 무엇을 내가 아닌 남에게 주는 방식과는 다르다. 굳이 말하자면 그런 방식을 ‘증여’贈與라고 할 수 있을까. 증여는 주거나 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걸 물들여 나가고 흘러넘치는 방식이라고 하면 어떨까. 하지만 예수를 통해 전해지는 정의가 선물이라 할지라도 정의가 그냥 전해 질 수는 없을 것이다. 정의는 (율)법을 통해 전파되는 것 같다. 이때 정의가 무형적인 것이라면 법은 유형적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 눈에 정의는 보이질 않고 ‘법’만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의는 법에 갇혀 있는 게 아니다. 정의는 결코 법에 갇혀서는 안 된다. 법에 갇힌 정의는 이미 정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의를 법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정의라는 선물과 동시에 ‘용서’가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이때 선물은 미래의 것이 아니고, 용서도 과거의 것이 아니다. 선물과 용서는 ‘동시성’同時性으로서 함께 베풀어진다. 여기서 용서를 한 번 살펴보자. 흔히들 용서는 과거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라 용서할 수 없다. 용서 역시 어떤 운동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용서란 늘 ‘현재적 용서’이어야 할 것이다. 반성도 용서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지나간 과거는 반성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현재에서 작동하는 과거만’을 반성할 수 있을 뿐이다.
용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우린 반성이나 용서가 과거의 것이고 그 과거의 것을 과거인 것인 그대로 용서하거나 반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건 가능하지 않다. 그런 방식의 용서와 반성은 악순환을 반복할 뿐이다. 가령 지금의 일본이 자신의 과거를 제대로 반성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것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지나가 버린 과거의 반성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버리지 못한 과거의 습속 즉 ‘현재의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해결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친일’의 청산이 제대로 선행되지 않는 한 ‘반성’은 어렵다는 말이다. 하여 모든 반성은 과거가 아니라 바로 현재의 반성이어야 한다.
이번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사건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그때 선물이 먼저 제공되고 용서가 뒤에 베풀어지는 게 아니다. 이것 역시 동시성으로 이해하는 게 좋겠다. 여기서 ‘동시’同時란 ‘현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건 시간이란 현재 밖에 없다는 개념이지만 현재에 묶여 있으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여기서 현재란 우리의 일상적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현재를 부정할 경우 우리는 과거나 미래에 매달리게 된다. 그때 그 틈 사이로 온갖 ‘악’惡과 관련된 개념들이 밀고 들어온다. 그러므로 예수의 ‘선물과 용서’는 늘 현재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자. 같은 논리로 선물 역시 미래가 아니고 ‘현재적’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다! 현재 이 순간의 삶 속에서 용서와 선물은 베풀어진다.
사실 예수의 정의는 기존의 (율)법과 계약관계(?)를 끊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가령 유대 율법에 갇힌 예수는 새로운 정의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걸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정의를 만드는 것이고 더불어 새로운 율법도 만들어지는 것이었기에, 예수의 정의는 율법에 갇힐 수는 없었다. 율법에 갇히는 순간 더 이상 살아있는 정의는 작동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무용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정의는 반드시 율법을 통하여 실현된다. 실현되지 않은 정의는 사실 ‘정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깊은 산 속에 있을 뿐, 산 밑으로 내려오지 않은 ‘무술武術의 내공’은 신비롭기만 할 뿐 더 이상 우리 삶에 필요한[혹은 널리 유익한] 무술이 아닌 것과 같다. 예수의 정의가 세상으로 번져가기 위해선 반드시 율법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 율법은 과거 유대의 율법이 아니다. 예수의 정의를 널리 펼치려고 했던 바울은 유대 율법을 극복해야만 했을 것이다. 정의가 율법에 갇히게 될 때 정의는 이름만 정의인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다. ‘선물과 용서’의 상징인 ‘십자가’가 폭력으로 변질된 수많은 역사를 생각해보라.
세계화란 어쩌면 험한 세상으로 나아감이다. 이때 세계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세계화란 예수를 종교화, 즉 예수의 정의를 ‘개인화’하는 게 아니다. 예수의 정의를 ‘프랜차이즈화’하는 게 세계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바울이 의도했던 세계화는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 타자’他者의 발견이었고 그 모두를 ‘환영’歡迎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정의는 유대의 율법을 넘어 더 넓은 세상에서 ‘타자’를 발견하고 그들을 사랑하게끔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정의를 세계화하려는 것은 ‘타자 발견’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나 우리가 아닌 그 밖에 있는 타자를 발견하는 게 ‘세계화’였다. 그 힘을 분산하고 분산된 힘을 개별화하는 게 세계화는 아니다. 그것은 종교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도 가능하다. 우리가 타자를 발견하는 순간, 자신의 아주 평범했던 삶이 ‘부끄러워’진다. 예수는 그걸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타자를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신이 완전히 해체되어야 가능하다. 더 나아가 자신 뿐 아니라 우리가 해체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해체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오직 ‘정의’의 힘만이 남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오직 ‘정의의 욕망’만 남는 것, 무엇이든 뛰어 넘으려는 ‘욕망’만 남는 것을 말한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노예상태의 유대인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간 사건은 그걸 상징하는 것 같다. 그때 욕망은 노예상태는 물론이고 가나안 땅에도 머물면 안 된다. 그건 과거와 미래에 목을 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노예상태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려는 ‘운동성(혹은 욕망)’이다. 운동성은 끝임 없이 출렁거리며 계속 되어야 한다. 마치 탕탕한 강물처럼.
예수의 정의가 뇌물이 아닌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선물을 ‘여성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생각해 보자. 우주는 본래 여성성이었다. 여성성은 무한하게 생성生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성은 무엇인가? 여기서 남성성은 붓다의 말을 빌면 가설假設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성과 남성의 사랑행위를 통해 ‘생명체’가 생산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하지만 그건 의외로 쉽다. 그런 결합 자체가 여성성이다. 생산하는 것 자체가 여성성이라는 것이다. 그걸 우리는 분리해서 이원론적 관점에서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 여기는 것일 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여성과 남성이 사랑행위를 통해 아이를 낳는 사건을 생각해 보자. 한 생명의 탄생이 한 여성과 한 남성의 사랑행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사랑행위는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일 뿐 다양한 사건들이 모여서 된 것이다. 가을바람, 젊음, 술, 어둠, 냄새, 육체와 마음의 변화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건들이 관통하는 욕망으로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이다.
백 번 양보해서 사랑행위로만 축소해서 봐도 그렇다. 수많은 사랑의 행위들 중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여 수정된 수정란이 만들어진 특정 사랑행위만이 생명체가 되는 것인가? 아니다! 그건 사랑행위를 외부적으로 접근하는 서구적 관점일 뿐이다. 우리가 사랑행위를 하고 있는 그 순간, 바깥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가 우리의 사랑행위에 동참하고 있다는 '우주적 사건'을 생각해 보라. 우주가 그리고 여성성이 얼마나 충만하게 우리의 삶과 함께 출렁거리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수많은 사랑행위들을 통해 생명체를 만들어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랑행위를 할 때마다 남성과 여성은 육체와 정신의 상태가 변하고 생명체를 낳기 위한 연기緣起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가령 여러 번의 사랑행위를 했다면 그 모든 사랑행위가 생명체를 만들어낸 것이지 그 중 수정란이 만들어진 단 한 번의 사랑행위가 생명체를 만든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주는 늘 ‘사랑행위 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여성성이고 그게 우주이며, 생명체 뿐 아니라 모든 것들이 우주 즉 여성성 속에서 생성된다. 남성성은 가설假設된 것이고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여성성의 양태樣態일 뿐이다. 흐르는 강물의 순간순간 번득이는 물결이라 해야 할까. 물론 그것도 역시 우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 혹은 정의는 우리로부터 아주 멀리 있는 것일까? 아니다. 우주는 아주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지금, 여기’를 잊지 말자.
선물이나 여성성은 공기와 같은 것이다. 삶에서 반드시 공기는 필요하다. 하지만 호흡을 하면서 공기가 고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선물은 공기처럼 주어지고 결정적으로 그건 공짜다. 공짜인 공기가 없다면 삶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물, 여성성, 공기 등은 모두 그렇게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다만 공기 그 자체가 우리 삶이긴 하지만 생명체[생명체가 아닌 모든 존재도]는 그 공기를 자기의 삶에 알맞게 사용한다. 그게 ‘율법’의 역할이다. 신체기관으로 말하면 ‘허파’와 같은 역할이다. 공기가 없어서도 허파가 없어서도 그리고 생명체가 없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다. 그것들은 구별할 수 있을 뿐 분할할 순 없다.
선물과 용서는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일 뿐 시간적으로 선후관계가 아니라고 했다. 모두 현재적 삶과 관련이 있다. 중요한 것은 시간적으로 현재이고, 공간적으론 바로 여기, 즉 이곳이다. 그렇게 현재는 찰나적이다.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선물은 공기처럼 현재의 삶에 작용한다. 용서 역시 마찬가지다. 지나간 과거를 용서하는 게 아니라 현재적 삶에 작동하는 ‘현재적 과거’를 용서해야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현재’다. 현재는 선물과 용서에 의해 늘 ‘새롭게’ 될 수 있다. 그게 바로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삶의 모습 아닐까 싶다.

◇ 최희철 시인 : ▷부산일보 해양문학상 수상하고 ‘북양 어장 가는 길’, ‘포클랜드 어장 가는 길’ 등 집필 ▷2022년 ‘동부태평양 어장 가는 길’ 발간 ▷현재 원양어선에 승선하여 생물학적 자료를 수집하는 국제옵서버로 활동 중
※(사)목요학술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시민시대』는 본지의 콘텐츠 제휴 매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