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371)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9장 딴따라 과장의 '남항등대'⑤
대하소설 「신불산」(371)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9장 딴따라 과장의 '남항등대'⑤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01.26 07:30
  • 업데이트 2023.01.24 2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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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딴따라 과장의 '남항등대'⑤

반 고흐의 유화처럼 어지럽게 번지던 대신공원 산기슭의 벚꽃과 진달래의 꽃무리들이 어느새 조금씩 퇴색해 아담한 구덕수원지의 수면에 흩날리더니 서대신동 구청별관 2층 문화관광과의 좁은 발코니에서 바라보면 이제 그 화려한 번쩍거림과 어지러운 번짐이 사라진 파스텔화처럼 다가오면 사람의 마음을 애련하게 만들었다.

추적추적 봄비가 내려 자갈치 앞바다 남항의 해무를 말아 올린 구름이 엄광산과 구덕산의 산허리를 감살 때쯤은 문득 겸재(謙齋)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처럼 흐릿한 산수화가 되어 근간<서구의 노래>제정이나 <암남동 조각공원>조성으로 가뜩이나 골머리를 싸맨 문화관광과장 열찬씨의 머릿속을 한층 어지럽혔다.

어느 듯 그런 4월이 가고 5월이 기울어 구청화단의 쥐똥나무의 하얀 꽃이 지고 맺힌 연두 빛 가녀린 열매가 점점 초록색으로 짙어진 신록 뒤로 어느새 후끈한 여름의 냄새가 풍겨왔다. 벌써 6월이 된 것이었다.

 

천만갑 교수가 다녀간 이튿날 구청장실로 부구청장과 총무, 주민복지, 도시국장, 기획감사실장에 담당인 문화관광과장과 업무관련 총무, 건설, 산림담당의 지역경제과장까지 소집해 '암남공원조각공원' 조성의 취지와 지역발전에 미칠 긍정적 효과를 설명하고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일 것을 요구한 김형호 구청장은 다음 월요일 아침 전 실과장과 동장이 참석한 간부회의에서 서구의 모든 행정력을 총동원해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추진할 것을 강조했다.

기획감사실에서 구청장지시사항으로 직접 관련부서에 공문으로 시달한 것도 부족해 6월 1일 정례조례에서는 전 직원이 모인가운데 이 '암남공원조각공원' 조성사업이야말로 작금 퇴락한 송도해수욕장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벌이는 송도연안개발사업 및 해수욕장정비사업과 더불어 우리 서구의 명운과 지도를 바꿀 대사업임을 누누이 강조하며 다시 한 번 관련부서는 물론 서구의 전 직원이 총력을 다 해 매진할 것은 누누이 강조해 가뜩이나 긴장한 열찬씨와 문화계장, 담당 정병진씨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러나 열찬씨와 문화 팀 직원들이 단지 '암남공원조각공원' 조성사업에만 매달리면 되는 형편이 아닌 것이 이미 시작한 <서구의 노래>제정 사업이 벌써 서구민은 물론 전 부산시민을 상대로 가사의 공모사업에 들어가 어렵게 심사위원으로 모신 강은교 시인과 구청장의 만찬을 열찬씨가 배석한다든지, 그렇게 한 건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중에서 문득 우리가 이왕에 시민의 공모를 받는 판이면 꼭 시나 노래만 공모할 것이 아니라 천혜의 절경을 가진 서구의 사진들을 공모하자는 구청장의 의견 제시로 매번 새로운 일거리가 생겨났다.

담당계장과 직원이 쩔쩔 매는 것을 걱정하면서도 순간적인 발상과 열정을 참지 못한 열찬씨가 그것도 단순히 금상, 은상을 선발해 시상만 할 것이 아니라 그중의 대표적 사진들을 모아 저 유명한 동해안의 <관동8경>처럼 우리도 <서구8경>을 제정해 보자는 제의를 해 역시 자네는 타고난 아이디어맨이 문화 통(通)이라는 구청장의 흡족한 찬사와 함께 또 다시 엄청난 일거리를 만들고 마는 형편이었다.

하반기의 효율적인 업무추진은 물론 <서구의 노래> 제정, <암남동조각공원> 조성, <서구8경사진공모>등 의욕적인 신규사업의 추진을 위해 7월초에 예정된 서구의회의 임시회에 상정할 제 1회 추가경정예산에 필요한 예산을 빠짐없이 신청하고 차질 없이 확보하라는 구청장의 특별지시에 따라 한창 예산신청서 작성과 검토에 여념이 없는 문화관광과에 안 그래도 언제 한 번 집으로라도 찾아가 어떻게 설득해볼까 고민의 대상이던 동대신1동의 이기율 의원의 전화가 와서

“아니, 가과장 당신은 시인은 정상인과 다른 돌출행동을 해도 남들이 다 이해해 줄 것을 믿는 모양이지만 여기는 문단(文壇)도 예술계도 아닌 냉엄한 행정일선인데 어찌 아직 예산의 확정, 아니 신청이나 심의도 안 된 <서구의 노래> 제정사업의 노래가사를 공모하는 거요?”

다짜고짜 쏘아붙이더니

“아, 의원님 그게 꼭 그런 것이 아니고-”

어떻게든 기분 나쁘지 않게 설명해보려는 열찬씨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점잖은 서구를 아예 니나노 판, 딴따라 판을 만들자는 것이요? 아니, 그것도 부족해 <암남공원조각공원> 조성사업, <서구8경> 제정, 사진공모사업까지 벌여 서구를 그저 먹고 노래하고 구경하는 놀자판으로 만들자는 것이요? 가뜩이나 예산이 부족해 작은 골목길포장사업이나 하수도설치는 물론 청소차구입, 영세민지원사업비도 부족한 서구에서 그래 일개 문화관광과가 추경예산의 절반이상을 신청한다는 것이 말이나 된단 말이요?”

마치 자신의 이름 기율(紀律)처럼 문화관광과의 기율이라도 잡는 것처럼 몰아붙이며

“아무튼 임시의회 때 봅시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과장 당신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고 지방자치제도의 근간, 그러니까 행정기관과 의회의 견제와 균형을 위한 공적업무이니 그 때 가서 혹 섭섭하더라도 날 원망은 말기 바랄 뿐이요.”

단단히 염장을 질렀다.

그래서 과장실 원탁에 문화계장과 담당, 같은 과의 공보계와 광고물계장에 언론보도담당인 박기도 공보주임까지 모아 대책을 숙의하는데

“과장님, 그건 단순한 자료제공이나 설명으로 해결될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발상자체를 일이나 돈의 문제가 아닌 사람의 문제, 즉 이기율 의원을 꼼짝 못 하게 옭아매거나 최소한 한 두 건의 애로사항 정도는 반드시 설득하고 풀어줄 가족이나 친지, 절친한 친구를 찾아보는 것이 아마도 해결의 지름길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날마다 새벽 여섯 시전에 출근해 당일의 조간신문을 읽고 TV와 라디오의 지방소식을 보고 들어 구청과 관련된 각종기사를 스크랩 또는 요약하여 구청장과 주요간부들이 출근하기 전에 책상위에 얹어놓고 특히 구정에 부정적인 기사를 사전에 예방하거나 문제발생시 해명방안을 모색하고 더더욱 구청장개인에 대한 가십이나 신상문제가 보도되는 것을 목숨을 걸고라도 막는 것은 물론 어떻게라도 가끔 한 번씩은 구정시책에 호의적인 기사나 동정 란(欄)에 구청장의 사진이 실리도록 하는 일에 1년 이상을 몰입해온 박기도 공보주임이 전혀 예상치는 못 했지만 한편으로는 참으로 그럴 듯한 제의를 했다.

그럼 누가 그 꼬창꼬창한 호랑이구의원을 꼼짝 못 하게 얽어맬 특별한 인연이나 능력이 있겠느냐, 어떻게 그런 사람을 찾겠느냐는 열찬씨의 질문에

“과장님, 그 문제라면 제가 잘 알지요. 제가 이기율 의원이 예비군중대장시절에 같은 동대신동에 근무했는데 그 때 동대신1동에 근무하던 사회과의 정봉석씨랑 제일 친했지요. 그 깐깐한 양반이 어떻게 마음을 열었는지 마치 형제처럼 잘 지냈지요. 또 구의원 출마같은 신상문제도 아마 정봉석씨와 많이 상의를 했을 것이니 엔간한 문제라면 쉽게 설득이 될 것입니다.”

오래 새마을지도자를 하다 거주지 동대신1동사무소에 임시직으로 들어와 예순이 가까운 그해 처음 계장이 된 광고물계장이 선뜻 제안했다. 정봉석씨라면 사회과 시절부터 동산병원, 세일병원 입원 시절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열찬씨가 한껏 기분이 풀어져

“정봉석씨라면 틀림없이 해내겠지. 아니 만약 안 되면 김계장님이 직접 가셔도 잘 할 것 같고요. 명답을 찾아주어서 고맙습니다. 계장님.”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은 계장에게 경의를 표하며 한숨을 돌리는데

“과장님, 그게 그렇게 단순한 일만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 선결사항, 즉 의원님만 찬성을 하시면 아무도 반대할 사람이 없이 이미 전 의원님들에게 다 동의를 받았습니다, 하고 제시할 정도가 되어야하는데 그전에 언제 무슨 말을 할 지 모르는 마치 다이너마이트의 뇌관 같은 초장동 이모 의장님을 먼저 설득을 하여 의원 전체의 의견조율을 단단히 다져놓아야지요.”

정병진 담당의 이야기였다. 혼자 꽤나 깊이 고민한 듯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래요? 그럼 그 문제는 또 어떻게 해결한다?”

열찬씨가 좌중을 둘러보는데

“과장님, 오늘 회의는 이 정도까지만 하지요. 그 문제는 제가 총무과랑 비서실, 안 되면 예산계라도 들러서 해결할 방법을 찾지요. 그리고 과장님과 정주임은 물론 두 분 계장님과 박기도씨도 오늘 저녁에 약속을 잡지 마십시오. 어쩌면 문화관광과 주요멤버들의 회식이 벌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회의가 마감되자 고 계장이 서둘러 수첩을 끼고 밖으로 나갔다. 열찬씨가 히죽 웃으면서 고계장이 여기저기 들러 업무추진비를 구걸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사실 지금 의장인 초장동 이모의원은 특별히 하는 일이 없이 국제시장에서 한복집을 하는 아내의 등에 업혀 살면서 오랫동안 초장동청년회와 새마을지도자, 바르게살기위원회의 감투를 쓴 일종의 터줏대감이자 골목대장으로서 특히 새벽마다 관내를 한 바퀴 돌면서 동네노인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나이가 비슷한 사람이면 어렵잖게 형님, 동생, 누님, 형수 자(字)를 붙여 어렵사리 구의원이 되어 벌써 재선고지를 밟은 사람인데 의장이 됨과 거의 동시에 아는 친구와 동업으로 광복동번화가에 제법 큰 살롱을 개업해 건설, 건축, 위생과장 등 공사나 단속업무를 맡은 과장을 비롯해 의회와 관련이 깊은 여러 공무원들이 자의든 타의든 한두 번 그 비싼 양주병이나 팔아주어야 만사가 잘 돌아간다는 예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자, 과장님, 계장님들, 그리고 정 주무, 박 주무!”

한 시간 뒤쯤 돌아온 문화계 고계장이 다시 원탁에 아까의 멤버를 불러 모으더니 오늘 일과 후에 간단히 저녁을 먹고 빠짐없이 이모 의장의 살롱에 참석하되 비서실과 총무과에 들러 얻어온 업무추진비가 양주 한 병 값 정도이고 문화관광과의 과장판공비를 겸한 직원회식비인 업무추진비에서 또 한 병 값 정도가 염출되니 그리 알고 두 병정도의 양주 외에는 주로 맥주나 마시면서 예산을 맞추자는 부탁이었다.

“아, 그럼 내가 한 병 값 정도는 내지요. 명색 과장인데.”

열찬씨가 나서자

“과장님은 대학생 자녀가 둘이나 된다면서요? 그것도 사립대학에... 정 형편이 안 돌아가면 그래도 동대신동 2층 건물주인 제가 한 병 값을 내지요.”

“그게 아니고-”

“아닙니다. 과장님, 그게 맞는 말입니다. 안 되면 맞벌이 알부자로 소문난 제가 한 병을 내지요.”

같은 동사무소의 여직원과 결혼해 이제는 퇴직해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아내와 부동산계에선 제법 큰손에 가까운 재력을 가진 장모의 그늘로 비교적 여유 있게 사는 장수환 공보계장도 거들었다.

 

아무튼 그날 저녁 업무를 마치고 일부러 느긋이 저녁식사와 반주를 하며 시간을 끌어 부평동 극장골목 너머 술집골목에 하나씩 불이 들어오며 짜잔짠 음악소리가 울려 퍼질 때쯤 일행은 이모 의장의 살롱으로 들어갔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