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生)이 있으면 죽음(死)이 있다. 태어나면 죽음으로 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애써 외면한다.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제도 죽었다. 사회제도도 태어나고 죽는다. 시대적 요구에 따라 모든 사회제도는 태어나고, 시효가 종료되면 사라진다. 국가 공휴일 제도도 시대에 따라 변천한다. 8·15 광복 이후에 기독 탄생일(크리스마스)과 식목일이 국가 공휴일로 처음 지정되고, 6·25 이후에는 국제연합일(UN데이)과 현충일이 추가된다. 그러나 시의성이 없어진 식목일과 국제연합일은 오늘날에는 국가 공휴일에서 제외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설날은 좀 특이한 과정을 거친다.
우리나라의 설날 변천 과정에는 뼈아픈 한국 현대사의 모순들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설날 이중과세에서 예각적으로 드러난다. 이중과세(二重過歲)란 설을 한 해에 두 번 쇠는 것을 의미한다. 양력설(신정)과 음력설(구정)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의 세대들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예전의 세대들은 피부로 체감한 생생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지금의 설날(음력설)에 대해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것은 예전부터 공휴일이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정확히 공식적으로 음력설이 국가 공휴일로 처음 지정된 것은 1985년이다. 갑오개혁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해방 후 대한민국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도 양력설은 3일 연휴였지만 음력설은 공휴일이 아니었다. 1985년도에 와서야 비로소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하루가 국가 공휴일로 지정된다. 1989년에 와서 민속의 날이 설날로 명칭이 변경되고 3일 연휴가 된다.
그러면 사람들의 생각 속에 왜 음력설이 예전부터 공휴일이었다고 착각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공식적인 국가 공휴일은 아니지만 실제로는 음력설에 가족·친지들이 모여서 차례를 지내는 가족 의례를 거행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양력설을 지내는 집안도 있었지만 대부분 서민은 음력설을 쇠었다.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공무원이나 금융기관 종사자들은 음력설을 쇠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일반 회사나 공장, 자영업자들은 대부분이 하루 또는 며칠을 휴무하고 음력설을 쇠었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음력설이 예전부터 공휴일이었다고 착각하기 쉬웠다.
설날 이중과세는 역법(曆法)의 사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역법이 공식적으로 태음력에서 태양력으로 바뀌는 것은 갑오개혁 때부터이다. 1896년 1월 1일부터 태양력(그레고리우스력)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태양력으로 역법이 개편됨에 따라 한국인의 생활풍습이 급격히 변화한 것은 아니지만 태음력 중심의 생활주기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진 경성(서울)에서는 눈에 띄게 나타난다. 주로 양력의 사용은 학교, 관청, 교회 등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하고, 초기에는 그 사용이 소수에 국한되었지만 점차 보편화된다.
그러나 역법 개정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조선 정부는 중요한 의례 일을 음력 날짜에 재배치한다. 역법 개정에 따라 세시풍속과 제사일 문제 등에 충돌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제삿날과 생일날은 음력으로 지내는 사람이 많다. 아무튼 이때부터 한국의 역법은 기본적으로 양력과 음력의 이원적 체제로 병행된다. 달력의 이원화는 양력과 음력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그것은 설날의 경우에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우리의 음력설을 부정하고 양력설만을 쇨 것을 강요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이중과세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그것은 일제가 우리 전통을 말살하기 위해 정책적 차원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그러한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생활풍속이 하루아침에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의도대로 음력설이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이중과세에 대한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들 간에도 적지 않은 갈등을 유발하면서 이중과세라는 새로운 풍습을 정착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신풍속은 계층적으로 차별성을 보인다. 학교, 은행, 교회, 회사, 신문, 잡지사, 기타관공서 등의 공적 생활에 종사하는 공무원과 회사원, 주로 서구식 고등교육을 받은 화이트칼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양력설을 쇠는 추세가 확산하여 간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제 시기에 양력과 음력은 독특한 상징적 의미를 획득한다. 양력은 근대성을, 음력은 전근대성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 양력은 친일주의와 서구종속을, 음력은 민족주의와 전통주의라는 의미를 획득한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음력설은 국가 공휴일에서 제외된다. 그리고 음력설에 대한 탄압은 1960년대부터 산업화와 공업화가 추진되면서부터는 더욱 가속화된다. 경제개발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제3공화국은 증산과 수출, 성장과 발전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구정 공휴일 불가 정책’을 표방한다. 특히 공무원들에게는 설날 지각해도 안 되고, 더구나 결근해서는 큰일이 날 것이라고 위협하며, 이날에는 암행감사반이 실태 조사를 나설 것이라는 협박까지도 한다. 이러한 정부의 지속적인 구정 억압 정책으로 인해, 음력설은 한편으로는 끈질긴 지속력을 지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풍속이 쇠퇴하는 경향도 보인다.
그러나 1985년도에 음력설이 처음으로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면서부터 우리나라의 설 풍속도는 급속도로 변모한다. 당시의 상황을 조선일보는 “첫 공휴(公休), 이번엔 구정(舊正)바람: 밀리는 대목 손님에 상가(商街) 흥청, 열차, 버스 귀성표(歸省票)도 일찍 동나”라는 기사를 싣는다. 서울신문도 “「90년 만의 설」 재현되는 세시풍속: 「뿌리」찾은 설레임 구정맞이 지방 표정” 등의 기사가 게재된다. 이처럼 구정이 우리 고유의 명절로 부활하면서, 상대적으로 이제 신정은 위축되거나 그 풍속도가 급속히 변한다.
음력설이 처음으로 국가 공휴일로 지정된 1985년도에 동아일보는 새롭게 변모된 신정 풍속도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신정연휴(新正連休)풍속 달라져: 차례(茶禮)는 「구정 공휴」로 모두 넘기고 온천·관광지마다 가족 단위 인파”라는 기사를 싣고 있다. 신정 퇴조 현상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1991년도에도 “신정연휴: 명절 분위기 퇴색(한겨레신문, 1991/01/04)”, “새해연휴 관광지는 「북새통」(부산일보, 1991/01/03)”이라는 표제로 기사가 게재된다. 이제 양력설은 명절로서의 의미가 퇴색하고, 음력설은 1985년도 이후 급속도로 우리 고유의 명절로 복원된다.
이러한 설날 이중과세 풍속의 변모 속에는 뼈아픈 우리 한국 현대사의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가장 일차적인 원인은 일제에 의한 영향이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우리의 전통문화 단절이나 설날 이중과세의 문제를 입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한국 사회 자체가 지닌 ‘내재적 요인’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한국 지배 엘리트의 형성과정이 포함된다.
한국의 초기 근대화는 189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의 조정을 거의 장악한 일제에 의해 이루어진다. 당시 일제의 강력한 영향 속에 취해진 개혁조치가 갑오경장이다. 여기에 포함된 중요한 정책 중의 하나는 ‘과거제도의 폐지’이다. 이것은 지배계급의 엘리트를 충원시키는 방법의 변경이라는 단순한 제도적인 개혁의 차원을 넘어, 우리 민족에게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일정한 유예기간을 거치지 않고 일시에 폐지된 과거제도는, 조선 시대 지배계층의 주된 구성원을 이루었던 전통적인 한학 지식인층(구 지식인층)을 일선 정치무대로부터 일거에 폭력적으로 배제한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구 지식인층 몰락의 제도적 토대로서 기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의 문물에 익숙한 신지식인층 등장의 역사적 계기를 마련한다.
해방 이후에도 이들 신지식인들은 미국식 교육 체제를 모방하여 제2세대의 신지식인층을 양산함으로써 우리의 전통을 우리 자신의 손으로 배척해 버리는 양태를 보인다. 해방 후 1949년에 처음으로 정해진 국가 공휴일에 기독탄신일(크리스마스)은 있지만, 우리의 전통이 배어있는 석가탄신일은 제외된다. 이것은 한국 지배 엘리트의 속성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석가탄신일은 1975년에 공식적인 국가 공휴일로 지정된다. 기독탄신일(크리스마스)보다 26년 뒤에나 공휴일로 지정된다. 이승만 정권 시대 때 초대 내각 구성원 중 42.9%는 기독교였다. 해방 당시 남한의 개신교는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큰 비중이다. 이승만 정권 시 역대 장·차관 및 처장의 약 38%, 국회의원의 21.3%가 개신교였다. 이런 배경이 크리스마스는 1949년에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고 석가탄신일은 뒤로 미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보수 우익은 일차적으로는 자기 내집단의 이해관계를 가장 우선시하고 자기 집단의 전통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인다. 이러한 현상이 서구의 경우에는 근대국가가 출범하면서 중세의 라틴 문화권에서 벗어나 각 지역의 전통문화를 민족주의와 결합해 각 민족국가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보수 우익의 근간을 이루는 전통적인 한학지식인이 갑오개혁 때 과거제도의 철폐로 정치적인 기능을 상실하고,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는 신지식인층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다. 이들의 대부분은 친일과 친미적 성향을 띠고 서구의 문물에 경사되어 우리의 전통적인 세시풍속과 생활문화를 경시하거나 비판적인 입장에서 바라본다. 특히 한국 역사에서 일제 잔재 청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내려오면서, 친일파가 반공을 명분으로 친미파로 변신하면서 한국의 보수 우익으로 자리 잡는 특수성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의 보수 우익은 적어도 전통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는 서구와는 다른 기형적인 보수 우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체적 지형이 국가 공휴일을 제정하는 방식에도 반영된다. 크리스마스보다 석가탄신일은 26년 뒤에나 공휴일로 지정되고, 음력설은 1985년도에 와서야 처음으로 공휴일이 된다. 그리고 1989년에 와서야 비로소 설날이라는 본래의 자기 이름을 찾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촛불 집회’에 대항하여 탄생한 극우 보수집단인 ‘태극기 집회’에서 성조기와 이스라엘기가 등장하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다.

◇ 김 문 겸 교수 :
▷부산대학교 사회학과에서 학사, 석사를 거친 뒤 동대학원에서 「한국인의 여가문화 : 노동과 여가에 대한 사회사적 접근」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6년 12월-2021년 8월 부산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일상성·일상생활연구회 회장, 한국문화사회학회 부회장, 부산대 사회조사연구소소장,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사회문화연구실장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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