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93) 인간과 ‘검은 백조’
【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93) 인간과 ‘검은 백조’
  • 조송원 기자 조송원 기자
  • 승인 2023.01.27 16:21
  • 업데이트 2023.02.0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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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되는 대로’ 사는 것보다는 나름의 계획대로 절도 있게 생활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일과표를 만들고 단기, 중기, 장기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돌아보면 계획은 ‘욕심이나 바람’의 표현일 뿐, 나침판 역할을 한 적은 거의 없다. 방학 때마다 방학 계획표를 만들었지만, 그 계획대로 방학을 보내 본 적이 있던가.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함에 있어, 계획보다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신조로 살아감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무책임한 말이 아니다. 성찰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주장이다. 삶의 뼈대를 이루는 직장을 구하는 일과 배우자를 얻는 일 그리고 사는 곳을 결정하는 일이 계획대로 진행된 적이 있던가?

물론 우리의 삶 자체가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던져진 존재’이긴 하다. 마는, 독립된 인격체이므로 주체적 삶을 꾸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삶의 목적에 맞춰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돌아볼 때마다, 왜 그 계획표는 단순히 낙서장에 불과했다는 깨달음을 갖게 되는 것일까?

사람은 생래적으로 자신의 실행력과 희망사항을 착각한다. 이런 착각을 사회 분위기가 조장하기도 한다. 공상, 심지어는 망상을 상상력이나 창조성으로 상찬하기 때문이다.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발명이 이뤄지듯, 진짜로 상상력이 뛰어난 창조적인 인간일지라도 99%는 도태되고, 1%만이 살아남아 각광을 받는 게 세상사다.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세상의 모든 지식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선험적 무지렁이다. 산속에서 밥만 축내고 있던 땡추가 세계경제와 국제정세를 논한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 말에 솔깃해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세계경제나 국제정세 등은 땡추나 그 사람들이 땅띔도 할 수 없는 논제다. 양쪽의 그 용기백배에 경탄할 뿐이다. 그 둘에는 차이가 있다. 땡추는 자신의 공상을 ‘그럴듯하게 이야기로 만드는(스토리텔링) 능력’이 있는 망상꾼이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땡추의 이야기가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진실이라고 ‘믿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10층짜리 빌딩을 하나 짓는 데, 얼마만한 학습시간이 필요할까? 우선 극히 일부분인 ‘설계’로 시작해 보자. 설계사가 그 건물을 설계할 능력을 갖추는 데, 대학 전공 학습을 비롯해 최소 10년이다. 그리고 그 설계를 실행하는 시공자 또한 그만한 시공능력을 갖추기 위해 10년 이상 걸리고, 나머지 토목기사, 포클레인 기사, 벽돌공, 미장이 등등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곧, 10층 건물 하나 세우는 데 동원된 사람들의 전체 학습 시간은 아마 100년을 족히 넘길 것이다.

10층 건물 건축과 국제정세는 이해의 난이도에서 차원을 달리한다. 한데 땡추가 산속에서 이슬 맞은 기도발로 이해할 수 있다고? 또 그 망상꾼을 믿는다고?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어떤 일이건 99%의 학습이 먼저이고 1%의 통찰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학습을 건너뛴 통찰은 그냥 사기이다.

계획표가 낙서장 역할밖에 못하는 첫째 이유는 인간의 ‘선천적 자신에 대한 무지’일 것이다. 곧, 자신의 능력과 욕심을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의 믿음을 지혜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개인이 이해하기에는 세상의 변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변수는 인간의 학습과 지적 능력을 벗어난다.

변수 중에도 아주 큼지막하고 결정적인 게 있다. 이름하여 <블랙 스완>(Black Swan)이다. ‘검은 백조’란 예외적이거나 발생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일이 일단 발생하면 세상에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가져오는 사건을 말한다.

KBS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보도 캡처

대표적인 게 전쟁이다. 러시아인이나 우크라이나 사람들 중에 전쟁까지 상정하여 계획표를 짠 사람이 있을까?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는 사건이다. 확률이 0.1%이라도, 실현되면 100% 현실이 된다. 지금 현실이 되었다. 모든 계획표는 낙서장에 불과하게 되어 버렸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외신을 읽으면서 ‘얼어붙은 분쟁’(frozen conflict)이란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칼럼니스트 도일 맥마누스는 외교 전문가들이 왜 이 전쟁이 ‘얼어붙은 분쟁’으로 결말이 날 것이라고 주장하는지를 설명한다.

(<The Korea Herald>, "Frozen conflict looming in Ukraine", 2023.1.20.)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의 지원으로 우크라이나는 푸틴의 침략군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공세까지 취하고 있다. 그렇다고 우크라이나가 승리할 것이라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주장은 국민들의 사기 진작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성급한 말일 뿐이다. 겨울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져있다. 푸틴 대통령은 2~3년 간 지속될 전쟁을 계획하고 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자신의 군대가 우크라이나와 그 동맹국들의 군대보다 더 오래 버틸 수 있다고 장담도 한다.

양측은 올 봄 새로운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 러시아는 15만 명의 새 징집병을 훈련시키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서방으로부터 지원 받을 방공 미사일, 장갑차, 탱크 등을 기다리고 있다.

미국의 목표는, 우크라이나가 자국을 방위하고 작년에 빼앗긴 땅에서 러시아군을 격퇴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빼앗긴 모든 영토를 수복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리고 러시아군이 붕괴할 것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다만, 우크라이나군이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면, 푸틴을 압박할 수 있다. 곧, 푸틴에게 이 전쟁은 ‘손해 보는 장사’이니 휴전 협상에 나서라, 고 강제하는 것이다.

문제는 러시아도 우크라이나도 타협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푸틴은 합병한 5곳의 우크라이나 지역 어느 곳도 포기할 생각이 없다. 반면에 젤렌스키는 2014년 빼앗긴 크리미아 반도까지 수복한다는 뜻을 고수하고 있다. 대다수 우크라이나인들의 여론이기도 하다.

그래서 외교 전문가들은 이 전쟁이, 어느 일방의 승리나 평화 협상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얼어붙은 분쟁’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 얼어붙은 분쟁에서는 미사일 공격이나 포격은 없다. 그러나 휴전도 평화 협상도 없는, 끝없는 소모전이다. 그러나 외교는 최선을 선택하는 게 아니다. 비록 냉전일지라도 미사일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것보다는 덜 파괴적이고 더 싸게 먹힌다.

이 칼럼을 읽으면서 내 자신의 이기심에 뜨끔했다. 얼어붙어 있으나 분쟁이 지속되는 한, 특히 우크라이나인들은 정상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계획표도 무용일 것이다. 희망 없는 비참함, 그게 우크라이나인들의 일상이 아닐까. 한데도 감정이입(empathy) 없이 그냥 ‘강 건너 불’이다. 그리고 ‘얼어붙은 분쟁’이란 말에만 관심이 간다.

나와 세계와의 관계, 좁게는 나와 정치현실 사이에 갈등이 존재한다. 일방이 승리할 수 없다. 하여 최선일 수는 없어도, 최악은 피하는 ‘얼어붙은 분쟁’화해야 하지 않을까?

낙서장이 될 운명인 걸 번히 알지만, 딴은 ‘검은 백조’까지 고려한 계획표를 마음속에 그려본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